날짜 : 2020년 2월 9일 일요일
본문 : 요한복음 13장 21-38절
“브루투스 너마저 나를?”
배반과 배신이 이야기될 때마다 인용되는 이 짧은 문장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 줄리어스 시저가 한 말로 알려져 있는데요. 로마의 왕을 가리키는 시저라는 말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을 정도로 당대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줄리어스 시저는 나중에 죽은 다음에는 신으로 추앙받기까지 했지만, 종신 독재관이 된 다음, 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자 원로원 사람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시저를 암살하기로 모의했고, 하루는 시저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려고 폼페이우스 대극장의 복도를 지나는 도중에 한 무리의 원로원 원로들이 그를 납치에서 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시저는 거기서 원로들의 칼에 목숨을 잃게 되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 시저가 가장 총애했던 부하인 브루투스도 함께 있었고, 시저는 그를 바라보면서 ‘브루투스, 너마저 나를!’이라고 탄식하면서 죽어갑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시저가 실제로 했던 말은 아닙니다. 나중에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라는 자신의 작품 속에 시저의 대사로 써 넣은 것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말이 시저가 죽어가면서 한 말로 오해되어 왔고, 그래서 배반을 상징하는 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쨋든 브루투스가 시저를 배반한 것은 정말 서글프고 한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원래 ‘배반’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러면 안되는 사람들,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배반’합니다. 그래서 배반은 그만큼 더 잔인하고 그만큼 더 악한 일이 됩니다.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신다음 예수님께서는 다시 식탁으로 되돌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되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 인 줄 너희가 믿게 함으로라”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가룟 유다에 대한 말씀을 해 주셨던 것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라도 듣고서 바른 길로 돌아오라고 그런 말씀들을 하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다른 제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저 분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가 틀림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그런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손에 팔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제자들은 혼란스러워 할 것입니다.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믿음은 완전히 사라져 버릴 지도 모릅니다. 자기 제자의 손에 팔려 죽는 메시야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을테니까요. 하지만, 제자들이 미리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면,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손에 팔려 돌아가시는 일이 주는 충격은 훨씬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주는 슬픔만 잘 견디어 낸다면,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시라는 것을 더 확실하게 그리고 쉽게 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무방비상태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맞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렇게 준비시켜 놓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신 다음에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까요? 왜 우리는 관심이 가는 말씀, 은혜롭게 들을 수 있는 말씀들 뿐만 아니라, 관심이 없는 말씀, 당장에 쓸모 없어 보이는 말씀에도 귀를 기울어야 하며,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놓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준비시키시기 때문입니다. 평안할 때, 우리는 우리 믿음의 진짜 모습을 모릅니다. 꽤 괜찮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내 마음을 헤집어 놓는 사람을 만나고 믿음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일을 만나 보면 그제서야 내 믿음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내 믿음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심각하게 흔들리고 저만치 떠내려갔더라도 다시 제 자리로 돌려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때 꼭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미리 들어놓고 마음에 새겨넣어 두었던 말씀이 있으면 그 때 그 말씀이 방패가 되어서 내 믿음을 지켜주고 시련과 시험의 파도에 떠내려간 우리 믿음이 되돌아갈 항구가 되어 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배반’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지금 당장 이 말씀이 필요한가요? 그렇지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주님을 배반할 일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오늘 이 말씀에 마음을 다해서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우리도 늘 가룟 유다처럼 될 수 있는 유혹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기는 하셨지만 예수님은 정말 정말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만큼이나 마음이 괴로우셨지요. 가룟 유다가 여전히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사실 이런 말씀에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머리가 붙으면 안됩니다.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파는 것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결국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길테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슬프고 아픈 말씀 앞에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머리를 붙이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미 정해진 일이고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제자들 중 하나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이라고 말이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쓸 데 없는 일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포기가 안됩니다. 정말로 사랑하면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말려도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려 보고 또 말려 봅니다.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말해 보지요. 그게 사랑이고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입니다.
하지만 철 없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서로 ‘나는 아닌데, 그럼 누구지?’하는 표정으로 궁금해 하기만 했지요. 베드로가 이렇게 보니 마침 예수님 옆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있었고, 그래서 베드로는 네가 좀 그게 누구인지 여쭈어 보라고 눈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제자’는 진짜로 예수님께 그게 누구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는 진짜로 빵 한 조각을 소스에 찍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빵 한 조각을 소스에 찍어서 주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 이것은 아주 각별한 행동이었습니다. 우선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부터가 그랬는데요. 유대인들은 아무나 하고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고, 그 사람이 나에게 그만큼 의미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떡을 소스에 찍어 건네는 것은 더욱 더 특별한 존경과 우정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소스에 적신 음식을 건넨다는 것은 그 음식을 받는 사람이 자신에게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떡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주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지도 않으셨고요. 예수님께서는 그 떡을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그만큼 특별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그것을 그렇게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불가사의합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지요. 우리가 그래도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나 자신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겠느냐고 하실 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나를 아는 것보다는 내가 나를 더 잘 알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는 우리를 모릅니다. 내 안에 얼마나 악하고 추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지, 내가 정말로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잔인한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며, 스스로에게 실망하기 싫어서 자신의 악함을 애써 부인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다 아십니다. 내가 모르는 나의 악함과 추함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저지르게 될 거짓되고 아름답지 못할 일들…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유혹과 압박에 못 이겨 믿음을 배반할 것까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우리들을 당신의 옆 자리에 앉혀 놓으시고 아무 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빵 조각에 소스를 찍어 건네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또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아시면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 가운데, 그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늘 이 사랑을 알고 더 배워가며 이 사랑 안에 더 풍성히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룟 유다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빵을 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그 빵을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그 빵의 의미를 몰랐고, 그 빵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을까요? 당연히 알았을 겁니다. 유다도 유대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유다는 빵은 받았어도 예수님의 사랑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도 심각했습니다. 13장 2절로 돌아가 보면 처음에 가룟 유다는 그저 예수님을 팔아 넘기려는 유혹만 받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그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 넣은 상태였으니까요. 그런데, 27절을 보면 유다의 상태가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2절부터 27절까지 오는 동안 가룟 유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를 팔아 넘기라고 유다를 유혹하던 사탄이 이제 아예 유다 안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유다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사랑을 쏟아 붓고 또 쏟아 부었지만, 유다는 그 사랑을 거절하고 자신의 마음을 통째로 사탄에게 내 주었던 것입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건낸 마지막 말씀이었는데요. 다른 제자들은 이 말씀을 못 알아들었어도 유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나는 너를 포기했으니까 너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집 부리는 자녀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마지막 탄식과 같은 말씀이었지요. 비록 사탄이 그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지만 그래도 유다는 아직은 자기가 하려는 일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 길로 밖으로 나가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가룟 유다의 이야기는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특히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받고 또 받았던 그에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왜 유다는 끝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보면, 요한복음 12장도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유다가 돈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돈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고 예수님을 팔려는 자신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유다가 그런 선택을 했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으로 가 보면 생명의 양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수군거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의미를 설명해 주신 다음에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를 처음부터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지요.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제자들과 예수님을 팔 사람을 따로 언급하고 있지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돈을 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율법선생에게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대답해 주신 적이 있는데요. 계명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방법을 담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이란, 그리고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뜻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가장 완전한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유다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돈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셨지요?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많이 깊이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지요. 그래서, 결국에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것을 다 아시면서도 그의 예수님을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릴 때까지 유다를 포기할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런 유다를 버리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많이, 깊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어떤 지를 다 알고 계시면서도 우리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십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늘 예수 안에서 참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반응해서 주님을 사랑하라고 그렇게 바보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가 버린 것,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 속에는 그 사랑의 빛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어둠을 더 사랑하여 어둠을 택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크고 특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배반하고 돈 몇 푼에 팔아먹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으면, 그 자리는 반드시 다른 것이 들어와 채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 다른 것 때문에 크게 또 작게 우리 주님과 우리 믿음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이 세상 곳곳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생명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영접해 들이지 못하며, 그것을 얻고 지키기 위해 예수 믿는 믿음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다른 것을 바꾸지 않는, 아니 바꿀 수가 없는 믿음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예수 믿는 귀한 믿음 꼭 지켜내시고 그 사랑의 빛 안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를 보시면서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중에는 나를 팔 자가 하나도 없구나”라고 말씀하시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믿음은 사랑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혹시 내 안에 예수 대신에,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고 더 큰 믿음을 주시고, 더 깊은 사랑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 사랑은 빛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늘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기도합시다. 늘 예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살면서 어둠을 이기게 하소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