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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26.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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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 8장 18-30절


서론 : 참된 소망의 특징

사람들은 소망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바라고 소망하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일에 대한 이런 저런 성공담이 회자되기도 하고 또 책으로 발간되어서 또 다른 사람에게 꿈을 전염시키기도 합니다. 꿈은 사람에게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하고, 또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나 원동력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과 모양으로 살아가게 하기도 할만큼 꿈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렇지만 이 꿈, 그러니까 사람들의 소망에는 커다란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소망이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확실한 것도 아니며, 또 보장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소망으로 붙들기 위해서 자기 췌면을 걸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전혀 가망없는 일인데도 그저 된다고, 할 수 있다고, 꼭 이루어진다고 믿어버리면서 말입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소망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그 소망의 출처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소망은 그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애석하게도 변하기 쉽고 흔들리기 쉬운 마음과 생각을 가진 존재입니다. 소망이 이런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니 똑같이 불안하고 불확실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소망은 그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어찌 확실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런 소망들은 설사 그것이 그대로 성취된다고 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상태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것이 사람의 소망이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세번째 이유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망이 이런 한계와 연약함을 가질 수 밖에 없지만, 유일하게 단 한가지 소망만큼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 소망이라고 부르고 있는 소망입니다. 회원 여러분, 만약 어떤 소망이 결코 좌절되거나 실패되지 않고 확실한 보장이 있는 참된 소망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본다면, 첫째로 그 소망의 출처가 변함없고 흔들리지 않은 존재여야 하며, 동시에 미래에 대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미래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는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다. 이런 존재는 세상에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망이 참되고 확실한 소망이 되려면 그 소망은 반드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이어야만 합니다. 또한 참된 소망은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영원히 그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 번 이루어진 후에는 영원히 안전하고 견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소망의 성취는 우리를 더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소망이 가져야만 하는 두번째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소망이어서는 안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변하고 없어지고 움직이며 그래서 불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소망이 되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되고 견고한 소망, 결코 좌절되거나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는 소망은 하나님의 소망이어야 하며, 또 땅이 아닌 하늘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일시적인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소망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은 참된 소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것은 소망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붙들기 위한 대원칙 :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우리는 이제 성도에게 소망이라고 부릴 자격이 있으려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또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영원히 변함없이 영광이 되고 유익이 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소망이고 무엇이 결코 실패하거나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소망입니까? 답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의 완성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바로 그런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양자될 것’과 ‘몸의 구속’이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위에서 말씀드린 참된 소망의 자격요건을 모두 만족시킵니다. 비록 이 소망은 우리가 품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으로 나온,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무엇보다도 이 소망에 대한 믿음을 계속 간직하고 그 소망의 성취를 보려면 이 사실을 알고 그것에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려고 하고 내가 소망을 붙들고 이루어 가려고 하면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실패하거나 좌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의 수고를 감당해야 하며 또 소망의 성취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소망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을 이루시는 것은 우리 안에 그 소망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열심과 성실하심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려고 할 때,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의심일 것입니다. 참된 소망이 되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의심과 불안, 그리고 그 소망이 가짜일지도 모르고 또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의심에 빠지게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신앙과 생활의 커다란 어려움이나 고통이라도 찾아오게 되면 우리의 소망은 희미해 지기 시작하고 믿음은 밑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전에 더 이상 소망이 될 수 없다고 버리고 떠난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믿음의 순결함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이 자라나는 가장 비옥한 토양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믿음의 고난을 저버림으로써 하늘의 영광마저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내는 중간에 좌절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의심과 불신앙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중요하고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런 영적인 비극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되돌아 보십시오. 우리 자신의 결심이나 의지, 열심에 의지한 신앙적인 노력들이 얼마나 우리를 견고하게 해 주었습니까? 홀로 기울인 그런 노력들은 우리를 계속해서 실망시켜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반복되는 실패 때문에 오히려 영적으로는 더 무감각해지고 무기력해져 지지 않았습니까? 배는 자신의 닻을 자신을 붙들어줄 만한 바닥까지 내렸을 때,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견고한 지반에 깊이 내렸을 때에만 폭풍우와 강풍에도 비로소 안전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스스로 믿음을 붙들려고 하고, 소망을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에게 의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내 결심과 내 열심만으로 소망을 붙들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닻없는 배가 폭풍우를 이겨내려는 것이나 뿌리없는 나무가 거센 바름을 이겨내려는 것과 같아서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시도입니다. 그 대신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아니라 그 소망을 붙들고 또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에 소망의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보충 : 탄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성도에게는 탄식이 있습니다. 탄식은 우리가 허무한데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몸, 썩어짐의 종노릇할 수 밖에 없는 몸을 가지고 아직은 그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연하고도 당연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고통과 고난을 너무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면 자꾸 피해다니려고 하게만 되고, 그것들을 두려워하게 되며, 결국은 그것 때문에 소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또 그것 때문에 마땅히 해야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우리가 구속받지 못한 몸을 가지고 아직은 허무한데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어찌보면 당연한 현실이라고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만큼 고통과 고난으로 우리를 묶으려는 사탄의 계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그 고통과 고난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더 좋은 환경으로 생각하며, 하늘의 영광을 위해서 투자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여기게 됩니다. 


소망을 위한 첫번째 안전장치 :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성령의 탄식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이런 몸, 탄식을 만들어 내는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소망 가운데 견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고통과 고난, 우리의 소망을 뒤흔들려는 어려움들을 만났을 때 제일 처음 해야하는 일은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믿는 일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너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짐을 너홀로 지고 가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과 고통도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우리를 더욱 더 힘겹게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약해지게 되며 우리는 점점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며 소망을 붙들고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일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지만, 사탄의 이야기는 전부 거짓입니다. 낭설 중의 낭설입니다. 우리는 성도로 사는 그 어떤 순간에도 결코 혼자가 아니며, 또 혼자일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고통과 고난 앞에서 탄식합니다. 그러나, 우리만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탄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깊은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고통이 심하면 정말 기도조차 나오질 않습니다. 무어라고 기도해야할지조차 생각나질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기도조차 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가장 깊은 탄식,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말에 다 담을 수 없는 탄식으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이 때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 두 분 간의 가장 진지한 대화가 됩니다. 우리를 가장 적절하고 강력하게 돕기 위한 두 분의 협력작업이 됩니다. 우리가 소망을 붙드는 싸움을 싸우다가 힘들고 지칠 때, 게다가 귀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는 사탄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우리는 얼른 이러한 은혜의 진리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왜 성령님의 탄식이 왜 실패할 수 없는 기도가 되는가? 

성령님의 그러한 기도, 두 분 사이의 그러한 대화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고통과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우리 영혼의 힘겨움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은 또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아주 완전하게 아십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영이시니 그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꼭같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니 성령님이 하나님의 뜻을 놓치실리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생각이 성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님과 성령님 사이의 완전한 교통이 됩니다. 꼭 같은 뜻, 꼭 같은 마음, 꼭 같은 생각 속에서 나누시는 완전한 교통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부족하고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며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또 우리의 기도 속에는 우리의 죄성이 개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지함 없이 건성으로 기도하기도 하고,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독이 되고 해가 되는 줄도 모르고 달라고 조를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기도가 모두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 삶은 오히려 그 기도의 응답 때문에 심각하게 망가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며 드리시는 기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원의 표시이며, 그 분의 생각과 일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님의 기도를 모두 들으시고 모두 그 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고 또 그대로 행하시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기도입니다. 우리 속에서 기도하시는 성령님의 기도가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가장 강력하고 완전한 능력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행하시는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이루는 기도이고 그래서 실패할 수도, 좌절될 수도, 포기될 수도 없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님의 기도와 언제나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은 견고하고 안전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위한 두번째 안전장치 :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룸

성도들이 너무 사랑하는 말씀인 28절은 성령님의 기도의 결과,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탄식을 들으신 결과 우리 삶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너무 아름답고 든든한 약속입니다. 그 풍성함에 한계가 없는 무한히 복된 약속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나 “선택된 것”, “특별한 것”이나 “특정한 일부분”이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입니다. 거기에는 즐거움도 있지만 슬픔도 있습니다. 건강함도 있지만 질병도 있습니다. 성공도 있지만 실패도 있습니다. 부유함도 있지만 가난함도 있습니다. 나의 장점도 있지만 나의 단점과 부족함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있지만 몰이해도 있습니다. 칭찬도 있지만 모함도 있습니다.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으면 미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안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것들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사용해서 성도의 삶에 최고로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성도의 삶을 최고로 유익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성도들에게는 이런 복이 이미 허락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지만, 애석하지만 본문은 이런 복을 아무나 누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러니까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만 누릴 수 있다고 분명한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부르신 사람들만이 이 복을 누립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까? 우리에게 누가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인가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진실로 구원얻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간접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가를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만족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만족을 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은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연인을 귀하게 여기고 배우자를 귀하게 여기며 자녀를 귀하게 여기고 부모를 귀하게 여깁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귀하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대상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자기 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부모님에게 그렇게 하며 선생님에게 그렇게 합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참된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기뻐하는 일을 기뻐하면서 행하게 됩니다. 더 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 영혼과 삶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은 사람을 사랑할 때와는 달리 그 사랑이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도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으면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마음이 달라지게 되어 있으며, 그 분을 위해서, 그 분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게 됩니다. 기뻐하고 만족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래서 자신의 삶 속에서 이런 일들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그 엄청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또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이 약속을 진실로 신뢰하게 됩니다. 그저 이 약속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 엄청난 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소망을 위한 세번째 안전장치 :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오늘 성경은 여전히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또 하나의 믿음을 위한 안전장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안전장치는 바로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입니다.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맡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 그러니까 아들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득채우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범죄하는 바람에 그 계획이 약간의 차질을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차질이지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변경하시거나 철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 계획을 바꾸거나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러실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이 땅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 그 분의 자녀들로 가득 차게하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30절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통해 얻게 되는 모든 영적인 복들을 이미 과거의 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거기에는 우리의 영화롭게됨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영화롭게 되는 일은 나중에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과거의 일로 말합니다. 이것은 이 일이 그만큼 확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늘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끝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는 시작이 곧 끝입니다. 계획이 곧 그 계획의 성취입니다. 말씀은 결코 헛되이 되돌아 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미리 아신 자들은 이미 영화롭게 된 자들입니다. 우리의 경험 안에서는 이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 몸의 구속과 구원의 완성이라는 소망, 하나님의 형상대로 온전해 진다는 소망이 결코 좌절되거나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영혼의 평안과 견고함을 얻게 됩니다. 


결론 : 소망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신다

우리의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은 썩어져 가는 일의 종노릇하며, 허무한데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이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성도에게 당연한 영적인 고민과 고통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소망을 위한 여정의 첫번째 걸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탄식이 깊어져 우리의 소망을 흔들며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마저 흐리게 만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좌절하거나 포기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 소망이 비록 우리가 품고 있는 것이기는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소망이고 그래서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이 소망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속의 성령님으로 하여금 탄식하며 기도하게 하신다는 것과 그 기도를 들으시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는 이 견고한 약속, 강력하고 변함없는 영원한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약속이 현실로 경험되어지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로 인생을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마십시외 그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시며, 소망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 소망의 확고함을 믿고 묵상하며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이 진리에 의지하여 살므로 최후의 승리를, 그 벅찬 소망의 성취를 보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