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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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 14장 1-12절
서론 : 사랑은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 그렇지만 사랑만큼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미 생겨난 사랑, 이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랑은 억누를 수가 없고 없애기는 더더욱 힘듭니다. 정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없는 사랑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전혀 사랑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나 사랑스러운 구석이 없는 사람, 못되고 거슬리는 짓만 골라가면서 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아마도 사랑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도 어렵지만 사랑을 만들어 내야 하는 일, 그리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일은 몇 배나 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랑의 문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별반 문제될 것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도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좋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사랑해야 한다는 명령, 미워하면 안된다는 명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냥 마음 가는대로 살아도 됩니다. 그저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나치게 미워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고 있으며, 사랑을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매이며 성도의 성도됨을 증명하는 증거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일, 그렇게 아무리 마음 먹고 결심해도 잘 안되는 일, 내 마음대로 하기에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 명령으로 주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명령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진퇴양란입니다. 게다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사랑이 불가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게 더 큰 딜렘마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사 속에는 정말 그렇게 원수를 사랑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만 보아도 됩니다. 그 분은 자식을, 그것도 둘 씩이나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니 그저 불가능하다고 하며 핑계댈 수 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이래저래 거의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아킬레스 건처럼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 것같습니다.
로마교회의 문제 : 신앙적 수준 차이로 인한 멸시와 비판
우리는 초대교회라면 무조건 이상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초대교회도 인간들이 모인 곳이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대부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랑하고 하나되는 문제는 지금처럼 그 때도 무척 어려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문화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며, 인종도 다른 사람들이 그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한 곳에 모여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도 있고 이방인들도 있습니다. 자유인도 있고 노예도 있으며, 종도 있고 그 종의 주인도 있습니다. 귀족도 있고 천민도 있습니다. 당시로써는 결코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경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 곳에 왜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하나되는 일이 어떻게 쉽기만 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교회에도 그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갈등했던 것은 특별히 서로 신앙의 수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될까 싶지만 실은 이것만큼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도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절대자를 믿고 절대적인 진리를 믿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은 자기 자신이 해석하는 성경말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에 대한 생각들까지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신앙 성숙도의 정도와 상관없이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같은 일에 대한 다른 생각들.... 그냥 생각할 때는 잘 조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각자가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길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신앙적으로 거의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면 이런 다른 생각과 의견이 만들어 내는 문제 조차 없을 것이고, 혹 문제가 생겨난다고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우리들 모두는 거의가 다 중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인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고 또 이런 문제들로 몸살을 앓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가 겪었던 문제는 고기를 먹는 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주장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한 쪽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고, 한 쪽은 절대로 그런 고기를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채소만 먹었습니다. 한쪽은 어떤 날들을 특별한 의미를 두고 지키려고 했고, 다른 쪽 사람들은 날들을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론적으로 보면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날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날들이고 그런 점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어떤 날짜 자체를 거룩하게 여겨서 그 날을 특별하게 지키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실은 이것이 복음이 주는 놀랄운 자유입니다. 그런데, 같은 복음을 받아들여도 다 똑같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주는 풍성하고 당당한 자유를 알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옛날의 습관이나 생각에 매여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차이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해치거나 교회의 교회됨을 망가뜨릴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도 그저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각자가 행하는데서 그쳤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 의견을 서로에게 주장하고 강요하기 시작했고, 서로를 향한 멸시와 정죄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로마교회에게는 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교회가 조각나 버릴 정도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다름의 문제, 거기서 오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대답이 바로 오늘 본문에 실려 있습니다.
우선 말씀드리는 것이 오늘 함께 살펴볼 해답들이 인간적인 대답이 아니고 성경적이고 신앙적인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우리가 반복되어 일어나는 문제들에 반복해서 빠지게 되고 또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허우적 대는가 하고 말입니다. 제 생각에 그 이유는 그 문제들이 대답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미워하지 말라고 하면 나 스스로 마음을 바꾸려고 합니다. 사랑하라고 하면 억지로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싸우지 말고 다투지 말라고 하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다가 지칩니다. 안되니까 포기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반복되고 그 문제가 만들어 내는 어려움과 상처들도 반복되는 것입니다. 답은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마음, 우리의 성품과 노력 안에 있지 않습니다.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 안에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그저 우리 스스로 해 보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성경의 해답에 우리의 믿음을 더하고 순종하려고 할 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첫번째 해답 : 받으라
바울이 주는 첫번째 해답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과 신앙이 초보적인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큰 의무를 짊어지고 있을까요? 신앙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가 더 많이 알고, 그 만큼 거기에 익숙해져 있고, 그래서 영적으로는 더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면서 먼저 믿음이 강한 사람, 성숙한 사람들을 권면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만이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 일에 대한 더 큰 의무를 가지고 있고, 또 아무래도 성숙한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순종하기도 훨씬 더 쉽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권면은 다시 이렇게 바뀝니다. 3절입니다. “먹는 자는 먹는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여기 사용된 업신여긴다는 말과 판단한다는 말은 무척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업신여긴다는 말은 수준이하로 보고 가치없다고 여긴다는 것이고, 판단한다는 말은 죄인으로 낙인 찍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서로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를 평가하고 비판할 때 생겨나는 악한 일입니다. 그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에서 그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판단들은 곧바로 상대방의 존재와 가치 자체에 대한 평가가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그것도 못한다고 멸시합니다.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을 심각하게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성도를 멸시하거나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성도는 다른 성도를 받아들일 의무 밖에 없습니다. 그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첫번째 계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성도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반드시 도달해야할 목표이지만 결코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목표는 아닙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사랑하는 일에도, 특히 사랑스럽지 않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일에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일,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용납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첫번째 단계입니다. 우리가 주의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이해하라”고 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라”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지금 나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틀렸는데 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그 사람의 행동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데 어떻게 그를 이해합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해하라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은 이해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 일 보다 근본적이고 앞서는 일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를 이해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 죄를 이해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악행을 이해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 분은 여전히 우리 죄와 악을 미워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분은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그 분의 원수일 때에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결점과 연약함, 틀린 사고방식, 말도 안되는 행동, 일그러진 양심까지 다 아셨고 지금도 아시지만 그저 받으셨고 다시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고, 그 의를 통해 우리를 보심으로써 우리를 받으셨습니다. 통째로 용납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특히 교회 안의 성도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를 받으셨듯이, 네가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거나 정죄하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으니 너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전히 받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여전히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지극한 교만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반항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맘에 안드는 사람, 가치 없다고 여겨지거나 혹은 신앙이 엉망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을 발견하거든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해답 : 그 사람은 네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다
바울이 주는 두번째 해답은 미워지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너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내 기준,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합니까? 내 마음대로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멸시하고 정죄하게 됩니까? 그것은 다 그 사람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지배욕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숨겨진 속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네 종이 아니라 내 종이다. 그가 서 있든 쓰러져 있든 내 소관이지 네 소관이 아니다.” 그러면서 결정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비록 지금은 그 사람이 넘어져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도 설 것이다. 나에게는 그 사람을 세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가 서 있고, 내가 판단하는 사람이 넘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고 싶고, 바로잡아 주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 일조차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또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사람도 나와 꼭 같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바로잡아 오셨고, 또 바로 세워오셨다면 그 사람도 그렇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도 분명히 바로 잡고 바로 세우실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렇게 하시고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이 잘못되어 있고, 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 사람을 다시 세울 능력이 있으시고, 또 바로 세우실 것이라는 그 사실에 우리의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그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해 보려고 하고, 내 능력으로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조급함입니다. 먼저 그 사람을 세우실 능력이 충분하신 하나님과 그 능력으로 반드시 그를 다시 서게 하실 하나님께 믿음을 두십시오. 그리고 그 눈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십시오.
세번째 해답 : 모두가 다 주의 것이다
세번째 해답은 “성도는 모두가 다 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에서 파생된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다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는 일도, 먹지 않는 일도, 어떤 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일도, 다 같은 날로 여기는 일도,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살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일들이 바로 그런 목적 때문에 이루어진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산 자든지 죽은 자든지,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그 어떤 일이든지 모든 사람과 모든 일들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하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 자신과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위한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 아주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알려 줍니다. 우리의 인생과 생명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아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복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도 받아야 합니다. 기도응답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잃어버린 인생도 되찾아야 합니다. 성령충만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나를 위해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나의 만족을 위해서”가 된다면 그것은 전혀 신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답은 “주를 위해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바른 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는 뭐가 되냐구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그 모든 것은 더해지기 마련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은 나를 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믿고 이 방법으로 사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일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한다는 말이 되지만, 그 방법은 모든 일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놓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 성도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왜 오해하고 다투며 경멸과 정죄에 빠집니까?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다른 사람들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중심에 놓고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상대방 중심으로 생각하라는 틀에 박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고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우리 모두의, 모든 일의, 모든 것의 목적이 되시는 주님이 중심이십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주님 중심이 된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원하는 것이나 바라는 모습 중심이 아니라 주님은 내가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하기를 원하실까를 생각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행동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해답 : 모두가 다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라
마지막 해답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자기 입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하나님께 말씀드릴 것이며, 그 분이 그 모든 일의 가장 정확한 판단자와 심판자가 되어주실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 말씀은 우선 내가 다른 사람의 심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나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기준을 세우며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그것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고 정죄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은 그가 아직도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재판관이 아니라 피고라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나는 재판관이 아니라 피고입니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재판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말씀드려야 하는, 그리고 나서 그 분의 평가와 판단을 받아야 하는 피고입니다. 물론 믿는 우리에게는 그 일이 우리를 멸망당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그 때 꾸중을 듣던지 아니면 칭찬을 받든지, 영광을 받든지 아니면 부끄러움을 얻든지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다른 이들에게 대한 섣부른 판단과 정죄가 생겨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입니다. 그나 나나 꼭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그러니 모든 것을 그 분께 맡기라”는 의미도 됩니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말 그대로 세상에 뒤집혀 있는 듯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잘 되어야 할 사람은 잘 되지 않습니다. 망해야 할 사람은 반대로 승승장구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정작 인정 받아야 할 사람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인정을 받는 것 같을 때도 많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지나친 분노나 미움을 품게 만들기도 합니다.
회원 여러분, 마지막 날은 왜 필요합니까? 마지막 심판은 왜 필요합니까? 바로 이런 일들 때문에 필요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잡아지는 날이 그 날이며, 이런 모든 사람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는 날이 그 날이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세상은 부조리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고 아구가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바램과 생각과는 영 딴판으로 흘러갑니다. 그런 모습은 교회 속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걱정 마십시오. 그래서 마지막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제 자리로 돌리고, 그 속에서 살아간 모든 사람들에게 정당한 판단과 상을 주시기 위해서 오실 것이며, 분명하고도 완벽하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이 땅에서 바르고 온전하게 살아가려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로와 평안의 이유가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날이 없다면, 그 날이 모든 것을 바로 잡고, 또 가장 완전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며 평가받게 할 날이 아니라면 성도가 이 땅에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고생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땅만 보면 답이 보이질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면 위로도 없고 소망도 없습니다. 우리가 성도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전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주변의 사람들, 심지어는 성도들조차도 바른 길에 서서, 성도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더라도 너무 노여워하거나 힘들어 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그 모든 것이 바로잡아지고 또 그 모든 것이 온전히 평가받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판단과 평가의 효력은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것이고, 하나님께는 가장 큰 영광이 될 입니다. 그 때 그 분이 행하실 심판의 완전함과 충분함을 신뢰하며 미리 만족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재판관과 집행관이 되고자 하는 시험들을 이길 수 있고, 그 사람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론 : 우리가 어쨋든 사랑해야 한다면...
회원 여러분, 어쨋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바깥의 사람들도 사랑해야만 하지만, 그들을 향한 사랑의 의무보다도 교회 안에 있는 같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의무가 더 크고 우선적입니다. 성경이 곳곳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잘못된 길을 가는 사람들, 나와는 심각하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이나 우리의 영성, 우리의 결단에 있지 않습니다. 해답은 바깥에 있습니다. 성경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서로 서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옆에 있는 그 사람, 이해할 수 없고 미워서 견딜 수 없는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이미 받으신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그 사람이 나의 종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종이 아니니 내 소관이 아닙니다. 내 기준을 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없습니다. 바로 잡아도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실 것이고, 또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나를 바로잡으시고 일으키시며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동일한 능력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모든 일을 주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재판관이 되고 집행관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마지막 날에 아주 정확하고 완전하게 행하실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나도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피고’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전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모두가 성경적인 방법들이고 그래서 믿음과 관계된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손쉽게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비결을 원하지만 그런 비결은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풀 때, 가장 부작용이 적고 근본적인 해결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해주는 네 가지 말씀에 대해 우리는 믿음으로 아멘해야 하고, 그 말씀들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신앙적인 사고방식의 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받아들여만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행동만으로는 우리의 행동을 고칠 수 없습니다. 행위만으로는 행위를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순종하려고 해야 하며, 그럴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해야만 합니다. 미운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행하실 일들을 신뢰하며 만족할 때 우리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을 행할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보게 하셔서 서로 받고 사랑하게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