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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설교 32.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

[사용법]


방문하시는 중에서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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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열왕기상 1장 28-39절



서론 : 새옹지마와 기독교 신앙

“인생사 새옹지마다”라는 격언이 있죠. 이 격언은 중국의 한 고사로 부터 유래한 격언입니다. 중국 변방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에게는 애지중지 키우던 자식과도 같고 또 전재산이기도 한 암말이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암말이 국경을 넘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집의 유일한 재산인 자식같은 암말이 국경을 넘어 도망치자 그 노인은 찾으러 갈 수도 없었고 그저 시름과 근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뜻 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 암말이 아주 튼튼한 종마를 데리고 돌아 온 것입니다. 화가 복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인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암말처럼 유일한 자식이자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암말이 데리고 온 종마를 보고 반해서 그 종마를 타다가 그만 낙마해서 이번에는 다리가 부러져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복이 화가 된 것이죠. 그런데 이 때 그 나라와 이웃한 국가와 전쟁이 터졌습니다. 마을의 장정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쟁에 동원됐고 거의 모두가 죽었고 많이 다쳐서 돌아왔지만 이 늙은이의 아들은 그렇게 상처를 입은 다리 덕분에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었고 목숨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화가 복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변방의 한 노인의 말”이라는 의미의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난 것입니다. 

인생은 확실히 새옹지마가 맞습니다.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선하기만 한 일도 없고 절대적으로 악하기만 한 일도 없습니다. 또 그 선과 악은 언제 어떻게 선이 악으로 또 악이 선으로 바뀔지 모릅니다. 새옹지마가 인생을 이야기하는 하나의 세속의 진리가 된 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인생이 그러한 선과 악이 어우러져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새옹지마라는 말만 마음에 새기고 자기 인생을 바라보는 틀로 삼을 수 있어도 사람들의 삶은 훨씬 더 여유로워 질 것이고, 또한 어려움을 당해 겪게되는 절망과 좋은 일이 찾아올 때 생겨나는 마음의 교만함을 훨씬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옹지마의 인생관에는 언제나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만약 그 세옹지마가 심각한 악으로 끝난다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 불행하기 그지 없는 결말로 마감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알 수 없는 미래란 그래서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꼭 같은 이유로 불안과 근심의 이유도 되는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가 사는 인생도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될 때고 있고, 나쁜 일이 나중에는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이유가 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성도의 인생도 세옹지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 속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고, 길게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언제가 가장 선한 결과만이 주어집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이야기에는 영원한 해피앤딩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가시고 섭리해 가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선하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그 선하신 뜻대로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에 대해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믿음입니다. 중간에는 이렇게 저렇게도 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라는 확신... 사도 바울처럼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기에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여길 수 있는 이 확신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흔들림 없는 인생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나라나 온 세상을 바라 볼 때도 마찬가지로 가져야 할 확신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은 세상과 역사에,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정말로 관심이 있으신가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고 너무 부했고 그래서 너무 소망이 없고... 이럴 때 우리가 가져야할 생각과 마음은 그저 자신을 위로하고 대충 넘어가기 위해서 가지는 새옹지마의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 분의 일하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다스려 나가시는 방법 그 대로 세상과 역사를 다스리고 섭리해 나가십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장 선하신 뜻대로 이루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도로서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가져야할 사고방식이고 또 확신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과 섭리하심이 전부라는 것 말입니다. 


본문설명 : 본문의 배경과 전말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한 사건의 시작과 결말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만 보면 조금 뜬금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원래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다윗의 나이가 무척 많아졌습니다. 요즘 나이로야 새발의 피겠지만 그의 나이가 70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건강도 그렇고 정신력도 그렇고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다윗 왕국에도 권력누수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왕이 되고 싶어하는 아들들이 저마다 기회를 노리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만해도 다윗은 자신의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정해놓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정치적인 혼란을 더욱 부추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암묵적으로는 모두들 다음 후계자는 솔로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솔로몬이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세워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윗의 아들들 중에서 권력욕이 센 왕자들은 어떻게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들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사람이 바로 오늘 사건의 주동자인 아도니야입니다. 1장 5절 이하를 보시면 아도니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학깃의 아들...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어디서 많이 보던 표현입니다. 바로 성경이 그의 형인 압살롬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사용했던 말들과 흡사합니다. 다윗은 아도니야가 죽은 압살롬의 동생이고 그와 많이 닮았기 때문에 압살롬을 생각하면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아버지를 언제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구요. 아도니야는 기회를 노려 자신을 지지하는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지원을 받으며 에느로겔 근방의 소헬렛 돌 곁에서 스스로를 왕으로 선언해 버립니다. 소위 아버지에 대한 왕위찬탈이 시작된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다윗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지자 나단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지혜를 발휘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고 다윗이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나단은 직접 자신이 왕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만약 이 반란이 성공한다면 왕위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생명마저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한 솔로몬의 어머니이며, 이전에 다윗에게 솔로몬이 왕위를 잊게 될 것이라는 맹세를 받았던 밧세바에게 먼저 알립니다. 그는 밧세바가 먼저 다윗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연이어 자신이 들어가서 재차 확인시켜주는 방식을 취하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그저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라고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전에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밧세바에게 했던 맹세를 기억하게 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일이 인간적인 정이나 생각으로 처리해야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고 객관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방법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사실을 전해받은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했던 맹세를 기억하고는 당장 그 맹세를 이행합니다.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나단 선지자 그리고 용병대장인 브나야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솔로몬을 왕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가서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을 삼고 다시 그를 따라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기혼에 도착한 사독은 성막에서 기름을 가지고 나와 솔로몬에게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거기 모인 모든 백성은 솔로몬 왕 만세를 외치며 솔로몬의 즉위에 동의하고 기뻐했습니다. 이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간략하게 살펴보면 그 소식을 듣고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된 아도니야는 반란을 철회하고 솔로몬에게 와서 용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사건의 본질 : 이것은 형제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요즘 텔레비젼에서는 동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습니다. 저도 한 두 번 쯤 보았는데요. 재미있게 잘 만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동이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가장 쉽게 그리고 간단하게 말하면 권력투쟁의 역사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여인들의 권력암투와 그를 둘러싼 세력들 간의 추하고도 격렬한 전쟁을 그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드라마로 아름답게 그려놓아서 그렇지 진짜 내용은 그렇습니다. 실제 역사를 보면 희빈 장씨 뿐만 아니라 동이 그러니까 숙빈 또한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궁녀들의 하녀였던 그녀가 그 격심한 암투와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아서 결국 자기 아들을 지켜내고 마지막에는 왕위에 앉게 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여인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스토리는 어느 나라, 어느 왕조의 역사 속에서든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왕이 될 수 있고 또 되고 싶어하는 왕자들... 또 자기 자식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적인 왕비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이권세력들. 이들이 만들어내는 암투들...  

저는 다윗 당시의 상황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만 보아도 두 왕자를 중심으로 한 두 세력이 등장합니다. 두 어머니는 열외로 하더라도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요압 파, 그리고 솔로몬을 지지했던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그리고 용병대장 브나야 파. 크게 보아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이 두 세력이 가장 큰 세력이었고, 분명히 서로 다른 길을 가며 각기 다른 왕을 원하고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그런 점에서 보면 왕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았던 두 왕자를 둘러싼 세력간의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 왕비까지 끼어들었고, 게다가 아직 두 왕자의 아버지인 다윗 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의 권력누수를 틈타 벌어진 아주 더럽고 눈쌀 찌푸리게 하는 이전투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결론은 아도니야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다윗에 의해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이 이야기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속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저 그 알량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반란과 그 반란의 해결과정만이 그려지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이야기의 어디에서 하나님을 보십니까? 그 어디에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주권적인 역사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까? 이 이야기 안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적어도 눈에 보이게 계시지는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며 그 탐욕이 만들어 내는 보기싫은 풍경 들 뿐입니다. 그러나, 누가 주인공인지 불분명한 이 이야기, 조연들만이 연기하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며 연출자가 되어 열심히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섭리자와 주관자로서의 역할을 하십니다. 결국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셨던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아도니야의 반란은 다윗에 대한 반란일 뿐만 아니라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 싶어하시고 그를 택하셨던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속수무책으로 그 일을 바라만 보고 계신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시내가 아니십니다. 그 분은 거대한 강의 흐름이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청난 속도로 모든 것을 싣고 움직여 가시는 해류이십니다. 겉으로 보면 이 사건은 권력욕에 눈이 먼 한 왕자로 인해 모든 것이 망가지고 부서질 위기가 극적으로 해결된 사건인 듯합니다. 적어도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려 하셨던 하나님과 왕이 되어야만 했던 솔로몬에게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었던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들 그 분의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셨다면 이 일은 역사 속에 우연히 그리고 억지로 끼어든 일일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일 자체는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더러운 역사이고 악한 역사의 기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던 하나님은 결국 이 일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효과적이고 요긴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이 이런 식으로 왕이 되지 않았다면 그가 왕위에 앉아 다스리는 일이 순탄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때가 될 때까지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공식적으로 세우지 않았던 것은 복잡하고 위험한 정치상황 속에서 솔로몬을 보호하기 위해서 였을지도 모릅니다. 미리 세워놓으면 오히려 목숨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최악의 사건을 사용하셔서 가장 적합한 시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솔로몬을 왕으로 그것도 아주 강력한 왕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오히려 솔로몬을 반대하고 지속적으로 괴롭힐 수 있었던 가장 큰 세력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고 솔로몬은 가장 평화롭고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이스라엘의 3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이며 또 악인들이 만들어 내는 악하기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만이 남고 그 결과만이 눈에 보일 뿐입니다. 아도니야의 반란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토막을 통해서 모든 세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내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내가 일하고 있다는 것을 진실로 믿느냐?” “너는 내가 없고 악인과 악한 일들만이 눈에 보일 때에도 결국 모든 일들은 가장 선한 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 “절망스러운 세상의 모습을 볼 때에도 결국 그 세상을 움직여 가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 여러분은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너무 지나치게 불안해 하며 근심합니다. 그러니 경제가 전부고 정치가 전부입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조금만 불안하다고 느껴지면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입만 열면 그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의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들과 부족하고 위험한 상황들을 걱정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부가 아닐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모두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개 정치나 경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치적인 성향이나 그저 이 부족함과 어려움을 빨리 해결해 달라고 하는 기도에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숙한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저마다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물론 원하는 것을,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지만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덧붙여져야 합니다.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지만 하나님의 올바른 뜻만이 성취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기도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이어져야 합니다. 경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물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저 아무렇게나 던져진 의미없는 걸림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이나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먹고 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고난들입니다. 그런데, 그저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데서만 그친다면 그건 무언가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되 이 어려움이 그냥 해결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고 사람들이 진짜로 알게 되고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깨닫게 해 달라는 기도가 덧붙여여야 하며 그 기도가 더 중요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려움은 그저 고통스러운 장애물에 불과한 불쾌하고 가치없는 것에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경제가 풀리지 않고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것을 통해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겠습니까? 

또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도 질문하십니다. “너는 네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내가 너를 버리고 너를 떠났으며,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그 때에도 여전히 나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의 인생을 결국 최고의 인생, 가장 선한 열매가 맺혀지는 인생이 되도록 인도해 갈 것이라는 믿고 나를 따라 올 수 있겠느냐?” “내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너는 여전히 나를 볼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것 같은 상황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그게 온 세상의 일이건, 우리나라의 일어건, 그리고 우리 가정과 나 개인의 일이건 모든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일이라도 하나님 손 밖에 있는 악한 일은 없기에 결국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열왕기의 맨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이 어둡고 냄새나는 사건을 통해 바로 그 밝고 견고한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모든 역사, 또 그 속에서 벌이지는 사건들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시고 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고 또 할 필요도 없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끼어든들, 혹은 무관심한 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리고 알든 모르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도움이 되거나 혹은 방해가 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역할

오늘 본문의 사건의 진짜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사람 나단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려 봅니다. 만약 나단이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았어도 결국 이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끝날 수 있었을까요?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솔로몬은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좀 걸렸겠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해야 합니다. 특별히 성도들은 성도로써 해야할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이 더 온전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을 하시지만, 우리가 그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일을 위해서 한 부분을 섬기는 역할을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을 즐거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에 우리를 끼워주셔서 그 안에서 역할을 맡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엄밀하게 말하면 없어도 그만인 역할을 맡겨주시고는 그 역할을 잘 해냈을 때에는 영원한 칭찬과 상급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영원히 덧입혀 주십니다. 

나단은 하나님에게 어쩌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고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섬기는 역할을 감당했을 때, 하나님의 일은 더욱 빨리 그리고 순적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이해해야할 자신의 역할이고 또 맡아서 행해야할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섬기는 자가 되는 것,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안되니까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아닙니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은 홀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그 과정 중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맡기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을 들고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원하시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며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상급이 더 많고 커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삶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결론 : 나는 하나님의 열왕기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열왕기는 열왕들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열왕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 살며,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섬기거나 방해하면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왕은 비록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편을 들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어떤 왕은 나서서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눈에 명확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숨어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뒤에서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이 그 분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성도란 바로 그렇게 숨어 계시는 하나님,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희미해진 그 순간에 하나님을 가장 명확히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살면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살 수 없게 됩니다. 보이지 않지만 또 계시지 않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사가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은 항상 그 뒤에서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그렇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눈을 크게 여십시오. 믿음의 눈을 크게 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너무 커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너무 넓어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십시오. 보이는 것이 어떻든, 경험되어지는 현실이 어떻든 믿음의 눈을 뜬다면 우리는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듯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것 되심을 확신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편을 들어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답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