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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년 매일성경 설교 6.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본문 : 마태복음 13장 1-17절



예수님께서 천국의 복음을 가르치시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서 그 천국을 증명해 보이시는 일이 계속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둘로 확실히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편에서는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알아보고 더 깊이있게 주님을 따르고 그 분께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반면에 다른 한 편에서는 예수님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점점 더 심하게 예수님을 거부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극에 달하자 예수님은 이제 사역의 장소를 집 안이나 회당 안이 아닌 바닷가와 같은 곳으로 바꾸셨습니다. 거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적어도 거기까지 자신을 찾아와 자신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로 사역의 대상을 한정하시기 위한 의도도 있었습니다. 반대자의 반대 때문에 하셔야 할 일들이 방해받도록 내버려 두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생각은 그 분의 가르침에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이 때부터는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시는 비율이 훨씬 더 많아지셨습니다. 그건 비유가 가지는 한가지 특별한 특징이 있었기 때문인데, 비유란 관심을 가지고 찾는 자에게는 알려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진짜 의미가 감추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써서 가르치심으로써 계속해서 진리를 드러내시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반대자들에게는 그 진리를 감추심으로써 하셔야 할 사역,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평이하지만 그 진짜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만 보더라도 슬쩍 들어도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립니다. 씨의 일부는 길 가에 떨어집니다. 옳타꾸나 하고 새가 먹어버립니다. 또 얼마는 흙이 얕게 깔린 바위 위에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싹이 나지만 더 이상 뿌리를 내릴 수 없어서 말라버리고 맙니다. 또 얼마는 가시떨기의 씨앗이 숨어있는 땅에 떨어집니다. 처음에는 같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지만 가시떨기와의 생존경쟁에서 지고 맙니다. 그렇지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도 있습니다. 이 씨앗들은 무럭 무럭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30배, 60배, 100배...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게 뭡니까? 이걸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까? 무슨 농사법 강의도 아니고, 매일 매일 주변에서 보아왔던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오는 사람들은, 이렇게 겉만 보는 사람은 아무 것도 듣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평범함이 주는 실망감 때문에 오히려 듣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시간낭비가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기대치가 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 이 비유의 진짜 의미를 알려면 여기서 더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질문을 더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생각하고 고민하며 묻고 따라가야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무슨 뜻으로 이런 밋밋한 이야기를 하셨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알 때까지 고민하고 물어야 합니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평범한 예수님의 비유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렇게 하려고 투자하는 사람들에게만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 식으로 꼭 정체를 드러내야 할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감추어야 할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꽁꽁 감추는 것, 그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왜 무리들에게는 비유로 가르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언가를 드러내러 오신 분이십니다. 천국을 드러내고, 그 나라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늘나라로 이끌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비유의 진짜 뜻을 모르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청중을 핑계로 넌지시 그 뜻을 물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 비유의 진짜 뜻을 말씀해 주신 것이고 말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대답은 이랬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천국을 만천하에 드러내러 오신 분이 이제는 천국을 비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저희들 그러니까 온 무리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여기서 “너희”와 “저희”를 나누고 계십니다. “제자들”과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만 하는 “무리들”을 구분하십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사람들을 그렇게 나누시지 않으셨습니다.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충분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그들을 둘을 나누어서 어떤 의미에서 둘을 ‘차별대우’하실 때가 왔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 동안 충분히 기회를 주었고, 모두가 그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는 살린 사람에게는 복이 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저주가 되었습니다. 한 쪽은 점점 주님과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한 쪽은 점점 더 주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제는 그 기회의 문을 닫으실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문을 열어놓는 일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여기셨고, 문을 닫지 않는 것이 오히려 “너희”가 아닌 “저희”에게는 더 큰 형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더 이상 천국복음은 없는 자들을 위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있는 자들에게만 주어져서 그들을 더 풍성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없는 자는 지금 있다고 여기는 그것까지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더 받아 더 풍성해 질 것이지만, “저희”는 점점 더 가난해 지고 궁핍해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의도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부터 이쪽과 저쪽에 “너희”와 “저희”에게 뿌려진 씨앗이 달랐던 것은 아닙니다. 씨앗은 똑같았습니다. 게다가 그 씨앗은 땅을 가리지 않고 뿌려졌습니다. 누구나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었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농부는 그렇게 모든 땅에 기회를 주었습니다. 문제는 씨앗이 아닌 땅에 있었습니다. 그 씨앗을 받아들여서 열매를 맺어야 할 땅들말입니다. 땅들이 씨앗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부하다 보니 이제는 씨앗에는 관심조차 없는, 결코 씨앗을 받아들일 수 없는 땅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저희들”, 더 이상 씨앗이 소용없는 땅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상황을 이사야의 예언에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지금 “저희”에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주인공이 되어도 이런 식으로 되는 건 곤란합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들의 귀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집니다. 그들에게도 하늘나라의 증거가 보여집니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무엇을 보여주는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귀는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알아듣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완악함에 있습니다. 천국의 씨앗, 그 복된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겸손과 부드러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 누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고 단단한 마음이 되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리고 “저희들”은 그런 마음이 되었습니다. 도데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요? 왜 그들은 원치 않았으면서도 그런 완악한 마음이 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이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저희”는 귀가 먹었고 눈이 멀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귀를 닫았고 자기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려오는 말씀은 공기를 울리는 파장에 불과했고, 보이는 증거들은 단지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시각적인 자극에 불과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은 그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했다고 말씀하십니까? 바로 깨닫고 나면 바로잡아지고 고쳐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금 예수님 앞의 “저희”는 결코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그 옛날 이사야를 거부했던 “그 조상의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두려운 것이 참 많다지만,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그 분이 자신을 온전하게 고칠 것을 두려워한다니, 그 두려움이 너무 커서 복음을 거부하고, 스스로 천국의 문을 닫아버린다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의 진짜 정체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이 모습 이 대로 예수를 믿는 것 아닙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지금 익숙해져 있는 것은 그대로 둔 채로 그냥 예수를 믿는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을 떠나고 버리라는 요구를 받지 않은 채로 이대로 죽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 신앙 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 두려움이 우리 마음을 단단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진리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천국의 문도 스스로 닫아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 두려움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결코 우리의 귀가 제대로 열리고, 눈에 제대로 떠지지 못한다는 뜻이고, 그러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볼 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완악해져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제 장모님이 집에 다녀가셨습니다. 김장을 핑계로 딸래미와 손자들 얼굴 한 번 보시러 오신 것입니다. 5일 정도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셨는데 나중에 집사람이 작은 처남과 통화를 하는데, 처남이 그러더랍니다. “어머니한테 너 잘 지내냐고 물어보니까 가진 건 없어도 재미나게 잘 살고 있다고 하시더라. 너 행복하냐?” “가진 건 없어도 재미나게 잘 살고 있다”... 이 말씀을 하신 장모님은 10년 반전에 저를 앞에 앉혀놓고 중죄인 대하듯 따지시면서 “지영이하고 결혼하는 건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된다”고 하셨던 분이십니다. 그  죄로 결혼하고 1년 반 동안 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셨지만 말입니다. 장모님은 제가 사역하던 교회의 권사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딸이 목회자 아내가 되어서 이런 저런 고생하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되셨던 분이시고, 자신이 생각하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분이셨던 것같습니다. 그만큼 그런 조건들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두려움도 강하셨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위로 들어가면서 그 생각과 신념이 깨진 것입니다. 이제는 아내에게 “너 장서방하고 결혼하길 잘 했다.”고 하실 정도로 생각이 변하신 것입니다. 결혼하기 까지 저나 제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모님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압박을 가하셨습니다. 예배 때마다 양심을 괴롭게 하셔서 말입니다. 다행인 것은 장모님께서 그 압박을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 항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행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물론 그렇게 해서 제가 아내하고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장모님은 자신의 신앙양심을 버리지 않으실 수 있었고, 그만큼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일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이 완악해 지는 것을 막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행복이건, 아니면 가족들의 행복이건 어떤 객관적인 조건이 갖추어 져야만 비로소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그 기준을 거의 깨뜨려 보거나 거부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기준들이 너무 강해져서 나중에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을 닫아버리고 진리를 향해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리는 이유가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받아들이면 생겨날지도 모르는 내 삶의 패턴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말입니다. 


주님의 비유에는 네 가지 땅이 등장합니다. 길 가라고 표현된 땅은 뿌려지는 씨앗과 전혀 상관이 없으니 아얘 재껴놓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두번째와 세번째 땅 그러니까 돌밭과 가시덤불을 살펴보면 이 땅들은 그래도 씨앗을 받아들이는 일에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싹도 틔우고 자라나기도 했습니다. 매우 훌륭해 보입니다. 훨씬 나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땅들도 결국은 열매와는 상관없는 땅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나름대로 깨달음에도 이르고 다름대로는 신앙이 성장하기도 하는 것 같았지만, 중도하차해 버리고 맙니다. 두 땅 모두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길가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길 가 보다는 돌밭이, 돌밭보다는 가시덤불이 더 나아보이고 그래서 정상참작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농부가 기대하는 것은 열매이기 때문에 농부에게는 두 땅 모두 길 가와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는 마지막 땅, 좋은 땅에서만 맺혀집니다. 알아듣고 깨달으며 그 깨달은 진리에 헌신하는 그런 마음 밭을 가진 사람, 그렇게 씨앗이 땅을 바꾸도록 허락하는 사람에게서만 맺혀집니다. 

세 땅은 처음 받았던 것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말라죽고 맙니다. 그러나, 네번째 땅은 처음 받은 것에서 더 많이 받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느 땅이 복된 땅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열매맺는 땅이 되기로 결단을 내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나의 손해와 고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원 여러분, 이 열매는 과연 하나님만 기쁘게 하는 열매일까요? 하나님만 이익보시고 우리에게는 손해와 고통만 안겨주는 그런 열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삶에 대한 오해입니다. 물론 좋은 땅이 되어서 들려오는 진리, 보여지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달으며 열매로 맺혀지기까지 인내하고 힘쓰는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불편할 수도 있고, 약간의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장담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궁핍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씨앗을 받아들이고 열매를 향해 가는 과정은 인내가 필요하지만, 가장 보람있고 만족스러운 과정이며, 그 열매들은 그 무엇보다도 그 사람의 삶을 풍성하고 당당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영광 중에서 자기 삶의 열매를 하나님 앞에 보이고 칭찬받는 일보다 더 큰 만족과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확신보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더 당당하게 하는 확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은 먼저 등장한 세 땅은 꼭같이 쓸모 없는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땅같은 사람들은 ‘너희’가 아니라 ‘저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부자가 아니라 외부자이고, 천국시민이 아니라 국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저주가 아닙니다. 땅을 그렇게 나누어, 영원히 규정지어 버리고 앞의 세 가지 땅은 지금 당장 폐기처분 하시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 말씀을 지금 내가 나의 상태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 주셨습니다. 그 거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바라 볼 눈만 감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는 정직한 용기만 있다면 우리에게 주님의 이 비유는 저주가 아니라 복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네 가지 땅은 영원히 고정된 땅이 아닙니다. 그 땅은 언제든지 이 땅에서 저 땅으로, 또 저 땅에서 이 땅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갈아엎어진다면, 충분한 토양이 덮여진다면, 가시떨기 씨앗들만 제거된다면 그 밭도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좋은 땅도 영원히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땅도 스스로 단단해진다면 언제 씨앗을 튕겨내는 길가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이신 하나님이 그 분을 닮은 인격인 우리들에게 던지시는 씨앗입니다. 그 분도 인격이시고 우리도 인격이라는 점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인격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얼마든지 변경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이신 그 분은 우리가 변화된다면 우리를 달리 대우하실 것입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고 ‘저희’를 ‘너희’로 불러 주실 것입니다. 다시 그 분의 우리 안으로 넣어주시고, 그 분의 그물 안으로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의 그 귀한 씨앗을 더 풍성히 뿌려 주실 것입니다. 지금 내가 나를 좋은 땅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좋은 땅에 대해서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지금 좋은 땅이라면, 그리고 계속 좋은 땅으로 남아있다면 열매는 분명히 맺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매의 양은 다 다릅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심 배, 이 십배, 열 배, 다섯 배, 두 배, 한 배, 반 배...” 땅마다 맺는 결실의 양이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열매맺는 땅이라면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땅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열매야 생명을 가진 씨앗이 책임질 것이니 우리는 그 씨앗의 토양인 내 마음, 내 영혼, 내 생각만 책임지려고 하면 됩니다. 그 귀한 씨앗, 복음과 천국의 씨앗을 품었으니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소출을 낼 수 있는 더 비옥한 땅이 되려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갈아 엎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마음을 단단하게도 하고 부드럽게도 하며, 비옥하게도 하고 척박하게도 하는 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새로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두려움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과 믿음은 언제든지 다른 땅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말입니다. 그 두려움을 제대로 처리하려면 먼저 우리는 나에게도 그런 두려움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야 길 가를 갈아엎을 수 있으며, 더 두터운 토양을 쌓아올릴 수 있고, 가시떨기의 씨앗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 속의 근심과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은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결코 믿음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이고 또 진실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분 앞에서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첫걸음이고 그러겠다는 순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는 두려움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싸움에서 너무 쉽게 패배하는 것입니다. 진짜 불신앙이 있다면 그렇게 두려움과 싸워보지도 않고 양보하며, 적당히 화해하며 살아가려는 태도일 것입니다. 


아프고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한국 기독교는 지금 너무 나약해져 있습니다. 더 이상 욕심과 싸우려 들지 않습니다. 그 욕심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과 싸우려 들지는 않고 그 욕심을 달래고 만족시켜서 두려움을 가리려고 하고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는 그렇게 드물고 보기 힘든지도 모릅니다. 열매는 땅에 달려있는데, 그 땅을 망가뜨리는 두려움을 처리하는 그 두려움과 싸우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 두려움과 싸우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욕심을 넘어서는 능력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을 넘어서고 욕심을 이겨내려는 믿음의 도전만이 우리를 그 두 가지로 부터 벗어나 좋은 땅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싸우고 이겨내야 한다고 해서, 한 번에 모두 버리고 떠나고 완전히 두려움이 없어지는 상태를 바라지는 마십시오. 설혹 그런 경우가 있지만 그건 아주 가끔씩만, 이미 그런 것들과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하고 드문 은혜입니다. 차례가 있습니다. 먼저 내 속에 있는 두려움들을 찬찬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얼 두려워하는지 말입니다. 목록을 만들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그리고는 그 중에서 정말 두려워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씩 지워보십시오. 아마 우리의 두려움이 얼마나 부풀려져 있는지 알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스운 것을 두려워하느라고 기도 펴지 못하고 살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남은 것들과 차분히 싸워가십시오. 1미터씩 갈아 엎으시고 10센티씩 흙을 쌓아올리시고, 가시떨기의 씨앗을 하나씩 골라내십시오. 그 두려움들에게 결코 쉽게 지지는 않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두려움에 직면해 보시고 때로는 과감하게 도전장도 내밀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 속의 옥토를 넓혀가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주는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그것도 사탄처럼 대적하고 달려들면 물러가고 없어질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고 아직 열매도 없었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려지고 충분히 해석된 말씀들을 듣고 보고 있으니, 이미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으니 우리 귀와 우리 눈은 참으로 복된 눈과 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귀한 복을 사용하고 누리는 일에 결코 게을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갈아엎어 주신 좋은 땅이 가시떨기밭이 되고 돌밭이 되며 사람들에게 밟히고 밟혀 다시 길가처럼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 삶을 다시 그런 저주받은 땅들이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님은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저주가 아닌 주님의 소원이 담긴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더 받아 더 넉넉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수많은 말씀을 두시고 보고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들려 올 때에 그것을 받아 더 가지기 위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고민하며 소화하시기 바랍니다. 모르겠다면 물어보시고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소화가 안된다면 소화가 될 때까지 씹고 또 씹어 보십시오. 되새김질을 해 보십시오. 진리는 비밀입니다. 진짜 깊은 진리는 비밀입니다. 알려고 하고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속깊은 비밀입니다. 그 보물을 캐내는 일에 투자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 보물을 손에 쥘 수 없습니다. 


또 지금 내가 어떤 땅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좋지 않은 땅이어도 좋습니다. 길 가라도  좋고 돌밭이라도 그리고, 가시떨기 밭이라도 좋습니다. 내가 그렇다는 것만 알고, 그것만 정직하게 인정하면 됩니다. 거기서 출발하고 그 땅을 바꾸어 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는 있으면서 없는 척, 있는 것이 당연한 듯 두려움을 얼버무리지 마시고 그 두려움과 대면하여 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속의 두려움을 이겨낸 만큼 우리 마음은 더 좋은 땅으로 변해 갈 것이며, 우리 삶은 더 많은 열매로 풍성해 지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저희”가 아니라 “너희”로 부르시는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열린 눈과 열린 귀의 축복을 놓치지 않고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의 두려움과 힘써 싸워 이겨냄으로써 더 받아 더 넉넉해 지는 우리들, 삽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참 좋은 땅, 더 좋은 땅으로 계속해서 변화되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