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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0 매일성경 설교 2.복이 있나니



본문 : 마태복음 51-12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본문은 산상수훈의 첫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미리 닦아 준 왕의 길에 서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말씀으로 그 분의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선언은 이제 새로운 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번 나팔소리였고, 그 부르심은 그 나라의 백성들을 모으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산에 올라 앉으셨습니다. 그 옛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말씀을 전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직접 당신의 입을 열어서 그 동안 진짜 들려주시고 싶으셨던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늘나라 복의 선언이었으며 새로운 백성들과 맺은 새 언약이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악함 때문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옛 언약대신에 이제 결코 실패하지 않을 새 언약을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우리는 복을 참 좋아합니다. 복은 받는 복이든 먹는 복이든 다 좋아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을 수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고 무슨 비결이든 따라하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받았다고 하는 그 복을 나도 받으려고 합니다. 복은 일복만 빼면 무조건 좋다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같은 말씀들은 그런 우리의 생각에 찬물을 확 끼얹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사람들의 모습이 전혀 우리가 생각하는 복된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복이 있다고 하시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많이 양보해도 온유한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정도가 그래도 복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 밖에는 정말 그게 뭐가 복된 사람의 모습인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회원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의 생각과 아무리 달라도 주님의 이 말씀은 복 중의 복, 진짜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게 왜 그런지만 알고, 딱 하나의 조건만 만족시킬 수 있다면, 읽고 묵상할 때마다 우리를 부끄럽게하고 혹은 피하고 싶게 만드는 이 말씀이야 말로 진짜 복된 모습에 대한 말씀이고, 그래서 우리가 소망하고 추구해야할 복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말씀들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모두가 이 참된 복을 소망하며 또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오늘 말씀의 짜임새를 살펴보면 하나 하나의 복의 선언은, 앞에서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복되다고 인정해 주시고 나서 뒤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복된 이유는 그런 마음과 모습으로 살기 때문이 아니라 뒤에서 이야기되는 복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말씀하시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가난함이 무엇입니까? 가난함은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도와 주어야만 살 수 있는 상태가 가난입니다. 풍요로운 시대에 사는 우리는 가난을 너무 넓게 생각합니다. 그저 조금 부족한 상태도 가난입니다. 남지 않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힘으로는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복되다고 하시는 사람은 심령, 그러니까 영혼이 이렇게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완전히 비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힘으로는 그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하나님께만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것을 주십니다. 지금 하늘나라를 그에게 주십니다. 그 하늘나라로 그를 부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두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애통이라는 것은 크게 슬퍼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사람이 심하게 슬퍼하는 경우는 크게 보면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큰 고통을 당했을 때입니다. 무언가를 잃거나 빼앗기고 혹은 다른 사람의 괴롭힘을 받을 때,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커지면 크게 슬퍼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사람이 자신의 죄를 보게 될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크게 회개할 때 우리가 생전 흘려보지 못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울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의 죄와 그 죄들이 남긴 상처와 악한 열매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위로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눈물을 닦아주고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바로 그 위로를 줍니다. 그 날에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그러면, 더 이상 그들에게는 슬픔이 없을 것입니다. 애통함도 없을 것입니다. 완전한 기쁨만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세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온유한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그저 부드럽고 친절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말 성경이 "온유한 자"라고 번역하고 있는 말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살고 또 다른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자신을 일컬어 온유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고 친절합니다.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심한 요구를 하는 대신에 그들의 짐을 나누어 져 주려고 애씁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이 약속됩니다.이건 땅부자가 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땅은 약속의 땅을 말하고, 그래서 하늘나라를 말합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아주 긴 안목에서의 형통을 말합니다. 시편 379-11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짧게 보면 악인이 땅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법과 양심을 어기고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금새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 그러니까 자기 중심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땅을 차지합니다. 풍성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단지 현재의 삶에만 한정 짓는다면 이 약속은 현실성이 없는 약속이 됩니다. 현실속에서는 오히려 악인들이 더 오랜 세월을 대를 이어 떵떵거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말씀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들었습니다. 그 땅을 빼앗기지 않고 평안을 누리며 사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불완전한 모델이었던 가나안은 없습니다. 그 대신 더 밝히 드러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모델의 실체인 천국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악인의 하늘과 땅이 아닙니다. 거기서 자기만 알고 살았던 악인들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온유한 자들의 땅입니다.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았고,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살았고 애썼던 사람들의 땅입니다. 거기는 그런 사람들만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넘쳐 흐르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면서 영원히 거기서 살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네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주리는 것과 목마른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의 배고픔과 목마름이 찾아오면 그것을 채우고, 그 다음에 찾아오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또 채우고... 그렇게 부족함을 느끼고 그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도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장 주리고 목마르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양식이 아니라 바로 ""입니다. 참된 제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 면에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게 됩니다. 우리쪽에서 볼 때, 의란 하나님의 올바름과 그 올바름에 대한 순종을 말합니다. 원래 우리의 삶은, 그리고 세상은 그 올바름에 순종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목적에 맞게 아름답고 정상적인 모습일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이 하나님의 올바름인지 알고, 그 올바름에 순종하는 인생,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잘 압니다. 그런 시각으로 자신과 사람들의 삶,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니 안타까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자신의 삶과 세상에 하나님의 뜻이, 그 분의 올바름이 가득차기를 갈망하며 자신이라도 그 정상적인 길을 가기 위해서, 의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또 애씁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코 그런 것으로는 자신도, 또한 세상도 온전히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자신의 의, 세상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가 하늘로 부터 덧입혀 지기를 소원하고 또 소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의 바로 그런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직접 그 분의 의가 온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여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덧입혀 주셔그 그 주림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지금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다섯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긍휼이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하지만 여기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그저 감정적으로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부족한 자들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서 애쓰는 행동까지를 의미합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긍휼히 여기는 이유는 자신도 실상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없으면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왜 많이 가진 사람들 보다는 오히려 부족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돕는 일에 더 열심을 내게 될까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자신도 부족하고, 그래서 그 부족함의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으로 느끼는 힘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너무 커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몰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고 실제적으로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바램대로, 그의 필요대로 그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한 그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그의 마음을 만져 주십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큰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마지막 심판대 앞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없다면 완전히 소멸해 버리고 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용납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땅에서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바로 이런 긍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섯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화평케 하는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평강의 왕"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해결해 주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또 사람들과 사람들을 화해시키러 오셨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 분은 사셨고, 또 자신을 화목제물로 내어놓기까지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일을 그대로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화해의 매개체가 되고,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화평의 중개자가 되어 화목케 하는 자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니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의 그 찬란한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일곱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여기서 청결하다는 말은 깨끗하다는 의미보다는 순전하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성경의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바라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옮기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두 마음을 품거나 온전치 못한 동기가 끼어들 자리가 없고, 그래서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한 마음, 순전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니 하나님도 그에 맞는 복을 준비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복"입니다. 그 위대한 모세 조차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얼굴의 영광의 광체가 너무 강해서 죄인이 그 앞에 서면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 앞에서 그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그것만을 위해서 살았으니,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애썼으니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덟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의를 위하여 살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미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뜻이나 영광과는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과 같아질 것을 요구합니다. 대중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말들, 눈에 보여지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을 통해 자신을 닮아가라고, 그렇게 너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며, 그것을 통해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과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욕하고 불이익을 주어서 심하게 괴롭히고 없는 말을 지어내어서 모함합니다. 그렇게 무능한 자로 만들려고 하고 바보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의를 위해서 살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당장은 아니라도 어느 순간엔가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살면, 진리에 따라 살면 사람들이 칭찬하고 인정해 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은 괜찮을지 몰라도 어느 순간엔가는 세상의 심각한 반대를 당할 때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그 천국에서 이미 상이 크기 때문에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상의 크기와 영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런 손해와 고통 중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덟가지 모습과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복있는 자라고 인정해 주시고 선언해 주시며,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실 정작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최고로 생각하며 삽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애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살고, 그것을 위해서 나보다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하며 삽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항상 가난합니다.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불의한 세상과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 상처를 받고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느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살아보려고 애쓰지만 찾아오는 것은 오해와 핍박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사자는 그게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는 사람이 경험해야 할 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상처가 되고 더 힘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런 너희야 말로, 그렇게 살며 고민하며 애쓰는 너희야 말로 진짜로 복된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인정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왜 그들이 복된 자들인지를 조목 조목 설명해 주십니다.


여덟가지가 이야기되고 있다고 해서 그 여덟가지 모습과 태도를 가진 사람이 모두 다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덟가지 삶의 모습과 태도는 사실은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의 이유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확실치 않지만,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들을 보면 맨 앞과 맨 뒤의 복은 이미 누리고 있는 현재의 복으로 되어 있고, 그 중간에 나오는 모든 복들은 모두 미래에 누리게 될 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앞과 맨 뒤의 복은 꼭같은 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의 현재의 복이 앞 뒤에서 나머지 여섯가지 미래의 복을 담는 그릇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배부를 것이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며,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이 모든 복을 약속 받고 또 누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심령이 말할 수 없이 가난하다면, 그리고 그가 그의 삶에서 의와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오해와 핍박을 받는다면 그는 이미 하늘나라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아직 온전히 그 나라에 있지는 못합니다. 그 나라에 온전히 가기까지는 하늘나라를 주시겠다는 영원한 언약을 붙들고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받으며, 그 분의 인정해 주심을 소망하며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의를 위해서 사느라고 여러가지 어려움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과 그런 그렇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은혜를 공급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에게 이미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고, 그 나라에 자신을 위해서 준비된 풍성한 상이 준비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복된 사람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가 이미 하늘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약속들과 복들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위에서 결코 복되다고 보여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모두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 복된 말씀들이 확신과 기쁨을 주기 보다는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본문이 말하는 삶을 살고 있지도 않고, 또 그런 삶을 추구하지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우리에게는 과정을 복되다고 생각하는 눈이 없습니다. 복이란 항상 그저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을 위해서 지금 치러야할 어떤 댓가가 있다면, 그것은 복이라고 여기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화평케 하기 위해서 대가를 치르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 이렇게 결코 복되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하신 이유는 그들의 그런 모습이 최종적인 모습이 아니라 참된 복의 약속을 받고, 그 성취와 완성을 향해 가는 필수적인 과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복을 향해 가는 길에 들어서 있기 때문에 복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두번째는 주님이 진짜 복이라고 하시는 것을 참되고 가장 큰 복이라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그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 그것을 온전히 약속받는 것을 최고의 복이라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가 왜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해야 하고, 그 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그러기 위해 왜 대가를 치르며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단지 그런 삶이 고상하고 고결하며 가치있는 삶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 땅 위에서의 또 다른 복을 보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진짜 이유는 바로 천국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여기 이 곳이 아닌 하늘이 있고, 그 나라의 약속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오해받고 괴롭힘 당하며 모함을 받을 때, 주님은 오히려 가장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심령의 가난을 느끼면서도, 죄와 그 결과로 애통해 하면서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화평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치르면서도, 그 의 때문에, 그 분이 원하시는 바른 것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더 기뻐하고 가장 즐거워할 수 있을 때는 언제입니까? 바로 천국이, 그리고 그 나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상이 나에게 그럴 수 있을만큼 크고 중요해 질 때입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영광과 복도 하늘의 빛나는 복에 비하면 태양 앞의 호롱불 같음을 진실로 깨닫게 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느라고 겉으로 보기에는 결코 복되지 않은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복되다고 여기며 그 누구보다도 기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으려면 딱 한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삶과 신앙에 있어서 너무 작아져 버려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천국의 제 크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성도들이 천국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국 때문에 오셨고, 그 천국을 우리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 죽으셨는데도 막상 그 분을 믿고 그 분을 따라야 할 우리는 그 천국을 잊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우리는 항상 부족하기만 하며, 주님의 말씀에서 멀기만한 우리 자신의 삶을 보면서 자책감에 빠지고 힘들어 하면서도 막상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조차 모릅니다. 또 무엇을 하려고 하다가도 항상 현실이라는 장애물 앞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우리의 현실을 걸고서라도 추구해야만 하고 꼭 얻어야 할만큼 중요하고 큰, 다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원 여러분, 성도의 가장 큰 복이 천국이고, 가장 큰 상이 그 나라의 영광인데 만약 우리가 그 두 가지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이 힘든 경주를 참고 계속해야 합니까? 그건 마치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달려기 위해서 달리는 그런 맹목적인 모습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항상 즐겁고 기쁜, 소망으로 인한 힘이 넘치는 경주가 아니라 억지춘향이 되어 버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주님은 회개할 것을 요구하실 때 천국 때문에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그 분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해야 하는 이유도 천국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천국이 빠지면, 우리의 신앙에서 천국이 잊혀지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결한 삶과 헌신은 이 땅의 또다른 복을 얻기 위한 투자입니까? 그렇게 또 썩어버리고 또 사라져 버리며, 더 큰 아쉬움과 집착만을 남기는 그런 것을 얻기 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세상에 속한 것으로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봐야 세상에 속한, 세상보다 작고 힘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과 현실을 넘는 능력있는 신앙이 되려면 하늘이 필요하고 하늘의 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 복의 크기를 온전히 깨닫고 소망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제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천국을 회복하십시오. 그 나라에 대한 소망과 그 영광의 참된 크기를 알 수 있는 그 감각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번 한 해, 그리고 평생을 두고 기도할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아끼는 제 마음을 이해하신다면 잊지마시고 이 권면만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땅이 아니라 천국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며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그 나라와 그 상급이 제 크기가 찾아지도록, 그 나라 때문에 기뻐서 견딜 수 없어지고, 그 약속이 눈물겹도록 감사해 질 때까지 기도하고 기도하십시오. 나는 지금 그것 때문에 살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그 만큼 그 나라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커질 때까지 그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전혀 찾지 못하고 회복하지 못하면 신앙은 결코 여러분을 위한 참된 능력도, 참된 복도 되어주지 못하고 언제나 현실 앞에서 주저앉는 약한 신앙으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삶은 결코 이 땅의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삶이기에 항상 배고프고 목마를 것입니다. 갈급하고 애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영원히 그리고 참으로 복되게 해 줄 것입니다. 참으로 능력있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를 날아오르지 못하게 옭아메었던 그 현실을 넘어서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참으로 복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어떤 축복보다도 더 큰 복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복된 말씀이 우리들에게도 가장 복된 소식으로 들려지는 날, 그 순간이 속히 오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