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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13.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본문 : 마가복음 10장 01-12절


도입 : 십계명은 최대한의 요구인가? 최소한의 요구인가? 

회원 여러분, 만약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굉장히 잘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충분히 의로운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냥 기본적으로 의롭다고 해 줄만한 사람에 불과할까요? 아마 대개는 그 사람을 굉장히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람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원 여러분, 그렇다면 이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대한의 법일까요? 아니면 최소한의 법일까요? 십계명은 최대한의 법이 아니라 최소한의 법이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것만 지켜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라면,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지키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셔서 주신 최소한의 요구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충분히 의로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저 그래도 의롭다고 여겨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십계명을 모두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실제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십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겨우 인간답게 사는 삶의 커트라인만을 통과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입장과 자신의 상태를 기준으로 삼아 모든 것을 생각하고 평가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가 없고 또 자기 경험이 가져다 준 전제가 없이는 어떤 생각도, 그리고 어떤 평가와 판단도 내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논쟁이라는 것이 생기고 의견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모두들 자신은 객관적이라고 믿고 말하지만 때로는 꼭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완전히 반대가 되는 판단과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도 생겨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도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장소를 유대지역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옮기셨습니다. 거기서도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했고,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어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지역으로 옮겨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하자 마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로부터 아주 뜬금없는 질문 하나를 받으셨습니다. 그 질문은 “사람이 자기의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날에는 이혼을 거의 대등한 남녀 두 사람 사이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남자와 여자는 결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여자는 거의 남자의 소유물처럼 여겨져서 인구조사를 할 때도 계수를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상태에서 부부가 헤어지는 것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이혼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거의 일방적으로 내버리는 것’에 가까왔습니다. 여자가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적어도 유대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수많은 문제를 놓아두고 굳이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온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도착하신 곳은 유대지역 요단강 건너편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그 당시 헤롯 안티파스가 관할하는 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척 부도덕한 사람인지라 자기 동생과 이혼한 헤로디아, 그러니까 제수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죠. 이전에 세례 요한은 바로 이 문제를 비난했다가 헤로디아의 계략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유대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두 명의 유명한 랍비의 주장을 중심으로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혼에 대한 성경의 기록 중 기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명기 24장 1-2절에 나오는 “사람이 아내를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라는 구절인데, 한쪽에서는 이 구절에 나오는 “수치되는 일”을 “간음”에 국한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남편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모든 일을 거기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이 그저 이혼증서만 써 주면 남자 마음대로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혼의 문제, 그들의 표현대로 한다면 ‘아내를 내보내는 문제’는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기에 가장 적합한 이슈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에 쉽게 당하실리가 없습니다. 질문은 받은 예수님께서는 다시 질문으로 돌려주십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당당하게 이야기 합니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이것이 이들이 이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혼증서만 써 주면 마음대로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모세가 허락한 것, 그러니까 율법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모세의 가르침, 그러니까 율법이 제시하는 기준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렇다면 왜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내보내는 일을 허락했겠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말처럼 이혼은 그저 ‘허용’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대답 속에 이미 그 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하지 않았고, 또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을 남자의 권리로 생각하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용하심’의 의미

그 대답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맨처음 가르쳐 주신 것은 이혼이 허락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당시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이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확대시켜주는 그런 구절과 그 구절의 해석에 대해서 반기를 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허락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사용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허락’은 단지 ‘허용’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이런 상황이 자주 연출됩니다. 마음 같아서는 절대로 허락하고 싶지 않습니다. 단 것을 먹는 것, 텔레비젼을 보는 것,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 이런 것들 대신에 공부만 시키고 싶고, 몸에는 좋지만 무지 맛없는 간식만 먹이고 싶고, 재미있는 게임대신에 세계명작만 읽히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이가 원하는 것을 원천봉쇄 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그대신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며, 그럴 바에야 차리라 적당한 선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게 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런 식으로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하다가 나중에 자신이 마음대로 할 나이가 되었을 때가 되면, 아얘 절제하지 못하고 중독에 빠져 버리기가 더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보다는 조금씩 허용하고 허락하면서 아이 스스로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는 편이 실제로 덜 위험하고 부작용이 적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도 이런 허락이었습니다. 그 허락은 아얘 이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신다면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잘 아셨기 때문에 하신 ‘허용’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혼을 완전히 금해놓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성이 남성의 소유로 여겨지고, 그래서 법적인 보호도 전혀 받을 수 없었던 당시의 문화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분명히 여성은 아주 심각한 남성의 폭력과 학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전혀 완악하지 않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도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또 이전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혹 아주 아주 드물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큰 비극과 죄를 막기 위해서, 그리고 집에서 쫓겨난 여인이 최소한의 보호를 받고, 다시 결혼을 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이혼증서를 써 주고 내보내도 좋다’고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셔서가 아니라 인간이 죄인이고, 또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들’, 그리고 ‘허용된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것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도 좋다’,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라고 우리의 자유에 맡겨놓으신 것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허락된 것들이라고 여겨지면 그것을 거의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하거나 선택하곤 합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의 권리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액면대로만 본다면 그런 것들을 선택하고 또 행하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신앙적으로 볼 때 죄를 짓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죠.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특히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기준점에 놓고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법적인 문제가 없는 것들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도 아니며, 또 그런 것들을 행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권리도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성경이 죄라고 규정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윤리적으로 부도덕하고, 실정법에 위배되는 것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들은 모두가 죄입니다. 그런데, 이에 덧붙여서 성경은 그런 악을 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남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데도 이기심이나 욕심 때문에 그 일을 행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 또한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도 높은 기준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허용하신 것이라고 해서 그것을 모두 다 내 자유와 권리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더 선한 것, 다른 사람들에게 더 유익하고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그것을 선택하고 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원칙을 지킨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이 아닌가 합니다. 다윗은 아무 죄없이 십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사울에게 쫓겨다녔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완벽한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왕’을 죽이고 싶어하는 마음을 품고, 칼까지 치켜 들었다는 사실에 하나님 앞에서 마음 아파하며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일이니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고 해도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악을 행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더 선한 것인지를 생각했고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비록 그 선택이 얼마나 더 계속될지 모를 도망자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나에게 허용된 것들을 내 권리로 주장하는 것이 무척 수준높고 당연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척 낮은 수준의 것입니다. 더 높은 수준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선한 것을 위해서 그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위해서 기꺼이 ‘해도 되고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헌법과 실정법 : 허용과 원칙

가끔씩 텔레비젼이나 신문을 보면 헌법 재판소의 결정이라고 해서 어떤 법에 대해서 ‘위헌’결정이 보도되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 동안은 모든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잘 지켜지던 법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이 법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것이 어떤 어떤 것을 규정하는 헌법에 위배되지 않느냐고  위헌소송을 냅니다. 그러면 헌법 재판소에서는 그 소송건에 대해서 법적인 해석을 하고 헌법 재판관들의 논의를 거쳐서 적법과 위법 여부를 판단하고 선고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형법 제 몇조 몇항은 헌법의 몇조 몇항에 위배됨을 선고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대다수의 남자들은 이혼에 대한 모세의 가르침만을 기준으로 내세웠습니다. 물론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감히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모세도 하나님의 종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기준만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의 이혼에 대한 허락에 대한 율법의 규정은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위배되므로 위헌임. 단지 현실적인 예외규정으로 덧붙여진 것이므로 예외적인 경우에만 특별히 허용되는 것임.”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과 그 원리가 헌법이라면 이혼에 대한 모세의 가르침은 하위법입니다. 그래서, 결코 모세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원리를 거스르면 안되었습니다. 실제로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가르침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원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원리에 위배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예외규정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이었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는 애초에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그렇게 디자인하셨기 때문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은 바로 그 섭리를 구체적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이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인간이 나눌 수 없습니다. 이것이 결혼과 이혼에 관한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한 몸을 나누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일단은 하나님께서 그 한 몸이 깨어지는 것을 금하고 계시며, 그 일을 결코 좋은 일로 보고 계시지는 않는다는 곳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는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시고 그 원칙 때문에 더 큰 악과 불행이 생겨나는 것을 막으시기 위해 예외규정을 두셨습니다. 인간들이 더 망가지는 것을 막아주시기 위해서, 은혜로 허락해 주신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제책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원리와 원칙을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현실로 옮기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이 애초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기 때문일 때도 있지만, 현실이 생각보다 아주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복잡함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 마음에 완악함이 없다면 원칙과 현실 사이에 이런 균열이 생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균열은 필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 때문에, 또 이런 균열 때문에 원칙을 원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원칙이 깨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되고, 그 원칙을 깨뜨리는 것을 나의 권리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결론 : 율법이 아니라 마음, 예외가 아니라 원칙이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무엇을 판단하고 선택할 때, 율법을 기준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것은 아직 아버지 하나님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할만큼 어린 신앙일 때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리새인들처럼 됩니다. 죄 때문에 허용된 예외규정을 자기권리로 여기게 됩니다. 율법이 허용한다면, 상식이 괜챦다고 하면 자기 아내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리는 완악한 마음으로 변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시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아니라 그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허락하셨던 하나님의 마음과 본뜻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고 허락하실 수 밖에 없으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때로는 그렇게 깨달은 그 분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 행동하며 살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원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덧붙여 놓으신 예외규정을 따라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에 익숙해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현실 때문에 원칙을 무시하고 그 원칙 앞에 현실을 앞세우는데 까지는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의 완악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참뜻을 찾고 순종하려는 겸손한 노력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세의 명령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와 본뜻을 따르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그 안에서 선을 행하며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향기로운 삶을 살며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겸손함과 진지함, 그리고 정직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염소굴의 다윗의 마음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선한 것들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며 살아가는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우리에게 허용된 것들을 겸손하게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참된 뜻을 이루시고 우리 마음을 온전히 지켜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