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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12. 여호와가 우리를 기뻐하시면




     성경본문 : 민수기 14장 1-10절

도입 : 신앙의 고민...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쉽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럴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 일이 신앙의 전부라면 예수를 믿는 일이 쉽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실 예수를 믿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진실되고 진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하는 것이 쉽지 않고 어려운 일이 되는 이유는 항상 ‘신앙’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우리들의 현실에 대해서 아주 풍성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성경은 굉징히 현실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현실과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이 제시하는 해법을 보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때로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건 뭐 우리더러 살라는 거야? 죽으라는 거야?”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성경에는 전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듯한 말씀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또 읽으면서도 “그건 성경이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지. 하나님이니까 그렇게 말씀하시지. 설마 말 그대로 그렇게 하라고 하실까?”라고 생각하면서 현실과 성경의 중간 어딘가에 머물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도 전혀 유익한 일이 아닙니다. 회원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과 지금 당장의 눈앞의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간격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의 과정은, 그리고 신앙이 성장해 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좁혀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왜 현실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그런 간격을 두시며, 우리는 그런 간격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통곡하는 이스라엘, 원망하는 이스라엘

가데스 바네아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를 지르며 밤을 새워 목놓아 울었습니다. 밤새 춤을 추며 파티를 벌여도 시원치 않을텐데, 약속의 땅을 눈앞에 놓고 밤을 세워 그야말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차라리 이집트에서 주는 밥 먹으며 종살이 하다가 늙어죽는 편이 낫지 않았겠어? 아니면 저기 광야에서 뺑뺑이 돌다가 죽든지 말야. 하나님은 우리를 죽일 방법이 그렇게 없으셨나? 왜 ‘이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끌어들여서 우리를 저 사람들의 칼에 죽게 하시는 거지? 저기 들어갔다가는 우리 식구들이 사로잡힐 게 뻔한데, 차라리 모세와 아론 대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굉장한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백성들을 속이고 죽이는 사악한 분으로 모함하고 있으며, 그래서 약속의 땅을 자신들의 무덤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너무나 명백한 지도자를 죽이고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루 밤 사이에 이 지경이 되어버린 것은 가나안 땅으로 보냈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3장 27절 이하에 나오는 정탐들의 보고는 이랬습니다. 자기들이 가서 직접 보니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말 풍성한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사람이 살만한 곳에는 도저히 싸워이기지 못할 사람들이 성을 짓고 살아가고 있었고, 거인족들까지 진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술렁거렸습니다. 그리고, 갈렙이 사태를 안정시키려고 보고에 대해서 한 마디를 덧붙이자 10명의 정탐꾼들은 말을 완전히 바꿔서 “그 땅은 거기 거하는 사람을 삼켜버리는 척박한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 사는 거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 같았다고, 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대성통곡을 시작했고, 그것은 밤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며 엄청난 불신앙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 여호수와와 갈렙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더 이상 어찌해 볼 방법을 찾지 못했던 모세와 아론은 그냥 그들 앞에서 엎드려 버립니다. 모든 처분과 처리를 하나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그 때 두 사람이 자신의 옷을 찟으며 분노에 가득 찬 회중 앞에 당당하게 섰습니다. 그들이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군중들은 오히려 돌을 집어들고 그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10:2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12명의 정탐꾼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보내 40일 동안이나 가나안 땅을 면밀히 살피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열 두명이 경험한 것은 완전히 같았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거인족속들을 보았습니다. 여기 저기 살기좋은 땅에 자리잡고 사는 가나안의 원주민들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이 얼마나 비옥한 땅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포도송이를 하나 따 가지고 왔습니다. 본 것이 같으니 12명의 보고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정보를 가지고 도달한 결론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고가 끝난 후에 그들은 10대 2로 갈라져서 마치 전혀 다른 땅을 보고 온 것 처럼 다른 의견을 보였습니다. 한쪽은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면서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했습니다. 손 한 번 휘두르면 후두둑 떨어질 미미한 존재, 발로 밟으면 완전히 찌그러져 버릴 나약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처럼 자신을 메뚜기로 여기는 이스라엘 회중들과 함께 밤새도록 울며 불며 절망과 두려움에 난리를 쳤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심각한 오해와 불신앙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도 거인족속을 보았습니다. 강대한 민족들과 성채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재료는 꼭 같았지만 양쪽은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10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러나 2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10명은 우리는 가나안의 거인에 비하면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좌절합니다. 그런데 2명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밥이니 많으면 많을수록, 크면 클수록 배부를 것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리려고 목숨까지 걸고 말입니다. 정말 똑같은 것을 보고온 사람들 이 맞나싶을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탐을 명령하신 이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앞으로 인도하신 후에 굳이 정탐을 보내신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유익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제껏 “내가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땅의 문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에 정탐을 보내라고 하신 이유는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직접 확인하게 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철썩같이 믿게 해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집안의 빈 방으로 아들을 데리고 간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이번 생일에는 이 작은 방을 네가 좋아하는 장난감으로 가득 채워줄께.” 그렇지만 아이는 아버지의 약속이 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반신반의합니다. “뭐 아빠가 말씀이야 그렇게 하시지만 그저 다른 때보다 조금 많이 주시겠지 뭐. 난 그 정도로도 좋아.” 아빠의 그런 엄청난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아이를 그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눈을 감겨 거기까지 데리고간 아버지는 “이제 눈을 떠봐라” 아이의 눈에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방에는 사방 벽을 따라 빈 진열장들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어리둥절하는 아이의 손에 아버지는 종이 한 장을 쥐어줍니다. 그것은 아이가 좋아하는 장남감들의 주문서 였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아빠 말을 믿을 수 있겠니? 이제는 장난감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단다.” 그제서야 아이는 아버지의 약속을 실감하고 깡충 깡충 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문 앞까지 인도해 오시기 위해서 행하신 일들은 실로 경이로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 천하의 애굽이 완전히 항복하게 하셨고, 그들이 나올 때는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셔서 온갖 폐물과 보물들을 선물로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둘로 쩍 갈라버리시고 바닥을 말려 길을 만들어 주셨으며, 거기서 무적불패의 이집트 전차부대가 전멸하는 것을 지켜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행하는 내내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가 부족하지 않도록 먹이셨습니다. 물론 물까지 넉넉하게 주시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스라엘에게 그 약속의 실물인 가나안 땅을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봐라, 얘들아 나 정말 약속을 지키는 네 하나님 아니니? 내가 저 땅을 너에게 겠다고 한 그 약속도 내가 꼭 지키지 않겠니? 너 나 믿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깡총깡총 뛰어 올라야 할 이스라엘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을 비하하며 울고 불고 난리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갈아치울려고 합니다. 진열장으로 채워진 빈 방까지 보여주었는데, 손에 장난감 주문서까지 쥐어 주었는데도 여전히 아버지의 약속을 전혀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그 땅에서 만난 원주민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사는 자신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사람들, 또 엄청나게 거대한 거인족들... 어떻게 그들을 다 정복하고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거처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메뚜기 한 마리가 사람을 잡아 먹겠다고 덤벼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울고 불고 난리를 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은 메뚜기에 불과합니다.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 현실을 현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그걸 부인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까지 하면서 자신을 속이라고 하신 적은 없으십니다. 가나안 족속들 앞의 이스라엘 민족은 사람 앞에 메뚜기입니다. 손만 한 번 휘두르면 납작해질 수 밖에 없는 메뚜기 말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의 경험하고 있는 객관적인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 앞에서도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집트를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바다에 길을 만드셨으며, 광야에서 샘이 터지게 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며, 바로 그 하나님이 그 땅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은 그 모든 일들을 통해 약속을 지켜오신 하나님께서 그 분의 신실하심을 가장 강하게 증거하는 가나안 땅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거기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더 깊고 돌이킬 수 없는 불신앙으로 나아가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의 복이 아니라 광야의 징계를 받는 자리로 가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에게서 배우는 진리 :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해야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모세와 아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정탐을 보내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정탐을 통해서 얻어야 할 올바른 결론을 얻었으며 그래서 더 큰 믿음을 향해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믿음의 선언을 통해서 신앙에 관한 보석같은 진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이 본 것이 나머지 열 사람과 같았다는 것은 이미 살펴보았으니 생략하고 나머지 말들만 살펴 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거나 혹은 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단어가 있다면 바로 “언약”이라는 단어입니다. 따라해 볼까요? “언약!” 네. 항상 이 단어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우리의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세우시고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 때문에, 그 언약을 지키시느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그렇게 신실하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구원의 언약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복에 대한 언약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들은 ‘우리들’과 맺은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약속이 요구하는 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는 그 분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십니다. 그 요구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뻐하실 때만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참된 복, 흔쾌히 부어주시는 풍성하고 특별한 복은 더욱 그렇습니다. 가나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도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이스라엘에게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때 주십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복된 신앙생활을 원하신다면 반드시 이 원리를 기억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사모한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이 원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언제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인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외우실 수 있으신 분은 함께 외우셔도 좋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까? 그 무엇도 아닌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자신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는 믿음”. 성경은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것, 심지어 그것이 우리의 구원일지라도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에는 처음부터 아무런 조건도 붙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지, 그 땅이 비어 있는 땅이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약한 사람들이면, 그 땅에 거인족들이 살지 않으면 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 앞까지는 내가 인도할테니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그러니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땅은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고, 그들은 그 선물을 그저 믿음으로 ‘받기만’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 실제로 그들을 인도하시려고 하셨던 목표지점은 바로 그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것을 철썩같이 믿는 믿음,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믿음.’ 그거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이고, 그러면 그 땅을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은 복을 주실 때 그냥 주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참된 복은 우리 속에 그 분을 기쁘시게 할만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믿음이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만이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래서 우리가 그 분만 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고 더욱 그 분만을 의지하게 하며, 그래서 믿음만이 그 분을 진정으로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을 약속하실 때는 항상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을 보이고 증명해 낼 수 있는 일종의 ‘기회’를 주십니다. 물론 그 기회라는 것이 우리 쪽에서 보면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 기회란 것이 다름 아닌 ‘눈에 보이는 것을 거스르고 보이지 않는 약속을 붙들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의 삶을 결단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 이론 중에서 “환경 결정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환경이 전부라는 그래서 환경이 모든 것을 규정하고 결정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도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이 이론에 따라서, 이 이론의 지배를 받으며 신앙생활도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도 현실이 안 그렇다고,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냥 그렇게 현실에서 주저앉아 버립니다. 현실이 신앙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물론 현실을 엄청납니다. 우리가 메뚜기라면 현실은 그 메뚜기를 밟으려 드는 사람같이 거대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혼자입니까? 우리가 혼자 힘에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천애고아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늘상 고백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시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만드시고 움직여 가시는 우리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아버지께서 주신 변하지 않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메뚜기라도 우리 아버지께서 만유의 주인이시라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도데체 우리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엎드린 모세와 아론, 그리고 옷을 찟은 여호수아와 갈렙. 군중들은 그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손이 하늘로 치켜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백성들 앞에서 가장 환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을 구하고 그들을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또 우리는 이 일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열 명의 정탐을 포함한 출애굽 1세대들은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그 약속의 땅의 문전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으로 현실을 바라보았으며, 그렇게 더 큰 믿음을 증명해 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또 그렇게 영광스러운 복을 누리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결론 : 현실이 아니라 언약을 따라 가라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다가 만나는 거인족들, 거대한 성채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수많은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포기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낙심하게 하시려고 허락하신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려고, 우리 스스로 믿음을 드러낼 기회를 주시려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라고 주신 특별히 주신 기회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그 기뻐하심 속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실제로 성도들이 현실이 아니라 믿음과 양심에 따라 살아가기에 얼마나 어려운지 구체적으로 속속들이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목회라고 안 그럴까요? 목회는 믿음과 양심을 따라 하기가 쉬운 일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회는 더 그렇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이러한 현실, 이 쉽지 않은 현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그 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보이는 현실 너머에 있는 참된 현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고 만져지는 현실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현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현실에 너의 생각과 마음을 고정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랜즈를 통해 바라본다면 이 세상의 현실은 결코 거인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난공불락의 성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한 번 해 볼만하게 여겨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신다면 우리에게 ‘밥’으로 주실 것입니다. 땅의 밥이 아니면, 하늘의 영원한 진수성찬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그런가를 확인하려면 그 길을 진짜로 가 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약속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을 살아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위험해 보이는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열 명이 주장하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두 명의 믿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부디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애쓰고 힘쓰시며 발버둥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현실론에, 교회 안의 현실론에 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실에 겁먹지 마시고 오히려 그 현실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실 때,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언약을 지키셨던 신실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서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믿음으로 언약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현실이 아닌 언약을 붙드는 믿음을 보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된 복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