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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15.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날짜 : 2011-04-16

본문 : 마가복음 14장 1-11절


도입 : 가치판단은 주관적이다

저희 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줄 때, 그냥 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하루에 꼭 해야할 일들을 몇 가지 정하고 표를 만들어서 밤마다 스스로 체크하게 합니다. 그리고 용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정산합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정해진 일을 할 때 결코 재미있어서, 하고 싶어서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억지로 억지로 합니다. 자기 손에 용돈이 쥐어지는 그 기쁨을 누리려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래도 꽤 열심히 합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주말에 받는 그 용돈, 비록 얼마 안되는 액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어렵게 손에 쥔 귀한 것입니까? 대개는 아이들이 이 귀한 돈을 자기 돼지 저금통에 모아놓지만, 가끔씩은 그 돈을 들고 그 동안 자기들이 사고 싶었던 것을 사겠다고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때로는 화가 나려고 합니다. 정말 조잡하기 그지 없는 장난감이나 딱지 같은 것이 들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 차라리 모아 놓았다가 나중에 진짜 사고 싶은 거, 가치있는 거 사지 그게 뭐냐?”라고 말해 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그 별건 아닌 것을 가지고 얼마나 기뻐하고 뿌듯해 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저도 어렸을 적에는 그 아이들과 같았을 것이 분명하지만, 저에게는 이미 그 옛날의 기억은 없고 그 대신 아이들이 좀 더 현명하고 가치를 아는 소비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만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가치는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어느 만큼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도 그 정도의 가치를 둘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치라는 것은 전혀 객관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물건에는 적절하다고 생각되어서 정해진 가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격이 매겨진 물건을 보면서 내리는 가치평가는 모두가 다릅니다. 아이들은 조잡하기 그지없는 천원짜리 장난감 하나를 손에 들고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런 표정을 짓지만 어른들은 세상에 어떻게 저런 것을 상품이라고 만들어서 천 원이나 받을 수 있는냐고 어이 없어 하기도 합니다.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

예수님을 향한 대제사장 무리의 음모는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들은 만나기만하면 예수님에게 어떤 누명을 어떻게 씌워서 죽일까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이 일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메시야를 가장 열심히 기다리고, 그래서 메시야가 왔을 때 그를 가장 정확하게 알아보고 가장 크게 환영하며 기뻐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누구여야 하겠습니까? 바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유대교와 성경에 대한 전문가 중에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동안 ‘메시야는 이런 모습으로 와서 이런 일을 할 것이다.’ 라고 성경에 미리 알려주신 그 모습 그대로 오셨고 바로 그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메시아를 알아보고 환영하기는 커녕 어떻게 하면 그 메시야를 죽일까만 궁리하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던 것은 그들이 기다렸던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메시야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내고 기대하는 메시야였고 이미 그 메시야만을 메시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식사를 하러 가셨습니다. 그가 이제는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고, 사람들도 예수님과 함께 그의 집으로 함께 갔던 것으로 보아서 시몬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미 치유해 주신, 나병이 완전히 나은 상태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한창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모두를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 곁으로 오더니 아주 값비싼 향유의 밀봉된 주둥이를 깨뜨리고는 그 향유를 전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 향유는 나드라는 이름의 아주 귀하고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진 향유의 그윽한 향기는 예수님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려 집안을 가득 채웠고 그렇게 창문을 통해서 집 바깥까지 번져나가며 온 동네를 향기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의 행동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

그런데 이 사건은 이 일을 지켜보던 어떤 사람들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여인의 이런 행동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고 어이 없는 낭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향유의 가치가 적어도 300데나리온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금액은 실제로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당시 한 사람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니까 이 금액은 거의 1년 동안 가난한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정도의 거액이었습니다. 이미 이런 계산을 끝낸 그들은 그 여인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낭비하냐고 말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너무 정당한 평가고 비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 번 씻는 일에 그 엄청난 거액을 사용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당시의 풍습대로 머리에 향유를 약간 발라주는 것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한 병을 통째로 붓는 일은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낭비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때는 유월절을 바로 앞두고 있었던 때인데, 당시에는 유월절에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이 유월절을 유월절 답게 지키는데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의 행동은  절기를 절기답게 지키는 일도, 또 이웃의 어려움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아주 어리석고 몰지각한 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

그러나, 이 사람들이 헤아리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여인에게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분명히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혼의 자유이건 혹은 죄의 용서나 불치병의 치료이건 간에 그 여인이 그 이전에는 그 누구로부터도,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었던 그런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이 여인의 영혼을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놓았을 것입니다. 영혼을 가득 채우고 밖으로 흘러넘칠 정도로 말입니다. 

회원 여러분, 그 여인에겐들 그 향유가 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여인은 그 향유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서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향유의 가치는 그 누구보다도 주인인 그 여인이 가장 잘 압니다. 실제로 그 향유는 그 여인을 비난한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300데나리온이 아니라 그 배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것은 여인의 소유 중에서 가장 값나가는 것이었을수도 있고, 어쩌면 거의 전 재산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향유의 가격이 얼마이건, 그것이 여인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든, 그래서 얼마나 소중한 것이든 이미 그런 것들은 그 여인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여인의 마음은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인해 그 분을 향한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 여인에게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 드리고 또 투자한다고 한들 그것은 더 이상  아깝거나 낭비스러운 일로 여겨질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 여인에게는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 값비싼 향유, 가장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향유는 그 여인에게 가장 값진 재물이었고, 예수님의 머리는 예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가장 귀한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가장 값진 것을 드린 그 여인의 진심이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정말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할 때, 항상 계산이 앞서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해 주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계산합니다. 또 그것을 그 사람에게 쓰는 것보다 더 값진 곳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랑하지 않는 대상에게 무언가를 주는 일은 항상 마음 한 켠에 아까운 마음과 낭비라는 생각을 심어 놓습니다. 그렇지만, 그 대상이 참으로 나를 꽉 채우고 흘러넘칠만한 기쁨과 만족을 주는 대상, 그래서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런 경우에는 이런 저런 계산이 들어설 틈이 전혀 없습니다. 그 때는 전혀 계산하지 않고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오히려 더 큰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줍니다. 이 여인은 자기 안에 있는 기쁨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그렇게 자기 힘을 다하여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 이전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평가

예수님은 그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그 누구도 그 여인의 헌신이 가진 가치를 몰랐지만 예수님만큼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물론 그 여인에게 있어서 그 행동은 이미 헌신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행동은 마음을 굳게 먹고 실천에 옮긴 행동도 아니었고, 뭔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희생을  감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그 영혼 속에 기쁨과 만족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그 기쁨과 만족을 주신 예수님께 그렇게 해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겨나서 그저 그 마음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의 행동에 가장 가치있고 영원한 의미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평가 1. 나의 장례를 준비해 준 것이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자신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준 것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 그 분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누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진심으로 관심갖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음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준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준비는 슬픈기만한 준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참된 가치에 가장 어울리는 행동이었고, 또 그래서 그 분을 가장 영광스럽게 해 드린 준비였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죄 때문에 저주받아 달리는 형틀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죽음으로써 죽음의 가장 강력한 권세를 꺾어버린 가장 위대한 승리의 전쟁터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시고 온 우주의 왕으로 세워지시는 보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장 귀한 향유을 부은 것은 유일하게 예수님을 죽음을 준비하는 단 하나의 향기로운 일이었던 동시에 예수님을 온 우주의 왕이요 메시아로 기름부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그 무엇보다도 귀하에  여기는 그 여인의 손을 빌어 그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평가 2.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함께 전해지고 함께 기념될 것이다. 

주님은 또 이 여인의 행동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장 향기롭고 영광스럽게 전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과 함께 기억되고 기념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복음이 들려지는 곳이며 어디서나 반복해서 들려지며 기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행동이 복음과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유, 복음과 함께 전해져야만 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여인의 행동은 이 세상의 모든 일 중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일이었기 때문에 복음과 그렇게 깊은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여인은 자신의 행동이 예수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몰랐지만,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죽음은 죄용서와 부활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여인의 행동이 이 죽음을 준비했다는 것, 그 죽음을 향기롭고 영광스러운 죽음이 되게하는 행동이었다는 점에서 복음을 영광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행동이 복음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두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여인의 행동은 실제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그 복음이 우리의 영혼과 삶으로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행동은 복음의 참된 능력은 무엇인가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그림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이야기는 항상 복음과 짝을 이루어 전해지고 또 기억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일으키는 가장 놀라운 변화

회원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그 복음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그 복음은 우리 안에서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합니까? 우리 안에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 냅니까? 그 변화는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삶이 변하는 것도,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이 되는 것도, 병이 낫는 것도, 복된 인생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히 이런 변화도 일으키고, 우리에게는 이런 변화들도 꼭 필요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이런 것들은 복음이 가져다 주는 부수적인 변화들이지, 복음이 우리 삶에 일어나게 하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사건과 변화는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 속으로 들어와 일으키는 가장 놀라운 사건과 변화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죽어있던 우리를 살리고 우리에게 새 새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얻게되는 새 생명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복음 이전에는 전혀 하나님께 반응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할 수도 없었고 알 수도 없었으며 믿고 신뢰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 했습니다. 도저히 그 분을 그 무엇보다 가치있는 분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오면 그 모든 것이 정반대가 됩니다. 이전에 하나님께 대해서 죽어있던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을 믿게 되고, 그 분을 이 세상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게 되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그 분을 가장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 예수님, 스스로 그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가장 귀하고 가치있는 분으로 여기며 사랑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우리 삶에 일으키시기를 원하시는 참된 변화요,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최고의 보물이 되게 하는 것 말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영적인 혁명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복음의 주인이시고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그를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에게 꽉 찬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복음이 선포되는 곳, 그리고 그 복음이 진실로 믿어지는 곳에서는 이 여인의 향기로운 헌신도 반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 다 드리고 더 드려도 결코 아깝게 여기지 않는, 모든 계산을 넘어서고 사람들의 평가를 넘어서는 가장 향기롭고 거룩한 낭비, 그래서 가장 가치있는 낭비가 일어나게 됩니다. 

회원 여러분,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그 어디서든지 전해지고 기억될만큼 향기롭고 가치있는 헌신을 했던 사람은 가장 신앙적이고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예수님께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도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틈만나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오히려 가장 향기롭고 가치있는 헌신을 한 사람은 이름 없는 여인, 누구나 함부로 비난하고 책망해도 괜챦다고 여길만큼 낮은 자리에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가치있게 여기며 그러한 기쁨과 감격 속에서 했던 작은 몸짓이 이 세상 그 어떤 희생과 봉사보다도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가장 가치있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 : 사랑이 헌신을 기쁘고 가치있게 한다

진짜 보물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충분한 가격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보물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가장 향기로운 헌신을 하는 사람,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헌신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을 그 어떤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참된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그 분께 진정으로 가치있는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 커서 두 분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 어떤 것도 큰 희생이나 낭비라고 여겨지 않는 사람이 바로 두 분을 가장 기쁘게 하며, 자신에게도 가장 행복한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전 제산을 팔아 가장 귀한 진주를 얻은 사람의 만족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복음이 일으키는 참된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두 분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모든 몸짓들이 주님께 가장 향기로운 몸짓이 되며, 우리의 삶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는 가장 행복한 몸짓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에게 그러셨듯이 우리에게도 이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사랑할 수 있는 복을 주셔서 그 사랑의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찬 인생이 되며, 주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그런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가치만큼 그 분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헌신을 가장 즐겁고 기쁜 일이 되게 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