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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12.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시편 132편입니다. 

     기억은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해야 한다. 그 쌍방통행이 신앙의 근간이다. 우리의 믿음은 기억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달려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기초하여 그러한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베풀어 질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만약 과거의 은혜를 잊는다면, 그래서 그 은혜를 미래로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실패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 때 우리의 무엇을 기억하실까? 그 하나의 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소서”(1절) 

하나님은 우리가 근심한 것을 기억하신다. 우리 말 성경이 ‘근심’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실은 ‘곤경’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그의 곤경은 어떤 것을 향한 근심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처럼 번역해도 큰 문제는 없다. 하나님이 근심을 기억하신다? 우리가 알기로 근심은 불신앙의 열매인데, 그 분이 우리의 근심을 기억하신다는 것, 그 근심 때문에 기울인 노력을 기억하신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그러나, 모든 근심과 그 근심의 해결을 위한 노력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내 눈으로 잠들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 까지 하리라”(3-5절)

이것은 다윗이 성막을 찾아다닐 때 스스로 했던 약속과 서원이다.(역사적으로는 다윗이 성막의 위치를 몰라 찾아다녔다는 기록이 없지만 본 시편을 근거로 해서 추론해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막을 찾은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성막을 찾고자 하는 그의 바램 만큼이나 성막을 찾는 일은 어려웠고 그러니 그가 성막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그렇게 좋아서 덩실 덩실 춤을 추지 않았을까?) 그의 근심은 그리고 그 근심을 해결하기 위한 애씀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막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그만큼 하나님과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모든 근심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 근심의 해결을 위한 모든 노력들이 다 불신앙적인 것은 아니다. 그 근심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시고 싶고, 그 분의 임재를 더 충만히 누리고 싶은 갈망에서 나왔다면,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애타하며 힘쓰고 있다면 그것만큼 선한 근심이 없고 그것만큼 가치있으며 또 그것만큼 신앙적인 근심도 없다. 아니 그것만이 신앙적인 근심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심과 애씀이 하나님과 그 분의 임재를 향해 있을 때 그것을 가치있게 여기시고 그것을 기억하신다.(이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나님이 최고이 가치이시고 그 가치있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근심과 열심이니까 말이다. 하나님도 우리고 최고의 것을 추구할 때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런데 최고의 존재는 단 하나 하나님 자신 밖에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러한 근심과 노력을 기억하신다고 해서 그 반대쪽에 있는 근심과 노력을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다 하신다. 단지 귀하게 여기시지 않고 심할 경우 불신앙으로 기억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들이 근심하고 또 얻으려고 노력하는 그것으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근심하며 또 무엇을 위해 애쓰면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가는가? 한 번 곰곰히 그리고 정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11절)

다윗의 근심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것은 그 분의 약속이었다. 이것은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니 그 약속은 절대로 깨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그 분의 임재를 갈망할 때, 그 분은 우리에게 그것과 더불어 그 분의 변함없는 약속을 허락하신다. 그 약속에 당신 자신과 우리들을 묶으시고 그 안에서 견고한 관계를 맺으신다.  그러나 그 약속이 다윗을 넘어서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려면 그 세대 사람들도 다윗과 같아져야 한다. ‘다윗의 길’에 서 있어야 한다.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에 앉으리라”(12절)

하나님의 언약은 항상 쌍방통행이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으면 우리가 할 일도 있게 마련이다. 물론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길을 불완전하게 걸어갈 때에라도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들을 주신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복주심은 언제나 그저 일방적이기만 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이 턱없는 부족함으로, 그 부족함이 전무함으로, 그 전무함이 의도적인 불순종으로 이어질 때, 그 때 하나님의 복주심은 어느 시점에선가 반대편의 언약에 의거하여 우리를 향한 심각한 징계로, 그 다음에는 벌주심으로 바뀔 수 있다. 이것이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라는 구절의 의미이다. 

13절부터 이어지는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처를 삼으신 후, 그 성에 어떤 복을 주실지 스스로 약속해 주신 내용을 담고 있다. 풍요로움, 만족, 구원, 즐거움, 뿔 그리고 면류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거처로 삼으시고 거기 쉬실 때, 그 때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복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 이렇게 예루살렘에 거처를 삼으시고 편히 쉬실 수 있으실까? 이에 대한 설명과 답은 12절이 이미 던져주고 있다.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실 것이다. 그 언약대로 복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넉넉하게 부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 언약에 포함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켜야 한다. 최소한 그 길 위에서 살아가야 한다. 여호와와 여호와의 임재때문에, 그 임재가 일어나고 또 유지되게 하기위해 근심하며 애쓰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근심을 기억하시고 그 기억대로 우리를 평하시고 복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다윗의 근심과 다윗의 힘씀을 허락하소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그 교훈대로 살기 위해 헌신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