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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20.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장 39절부터 56절까지입니다. 

      두 사람의 ‘복의 통로’가 서로 만났다. 한 사람은 약속된 메시야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그 메시야가 오실 준비를 할 ‘엘리야’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만남이 복되고 감격적이었듯이 이 둘의 만남도 참으로 복되고 감격적이다. 거기에는 축복과 찬양이 흘러 넘치며 하나님의 뜻이 더욱 견고해 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43절)

이것이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가운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건넨 첫번째 이야기였다. 성령님께서는 엘리사벳을 통해 마리아에게 두 가지 말씀을 들려주신다. 첫째는 마리아와 마리아의 태중의 아이가 복되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기에 어떠하든지 간에 온 세상을 위한 가장 큰 복이 되는 일과 그 복이 세상에 오도록 통로가 되어주는 일은 복되다.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일과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되고 그 일을 하는 것 자체는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복되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게 될 때가 많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과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로 하여금 성령충만한 엘리사벳을 통해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라는 이야기를 듣게 하신다.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메시야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된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마리아 자신과 처녀임신이라는 사건을 보게 하신다. 혼자서는 하나님의 참된 뜻을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확신하였어도 흔쾌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럴 때 성령충만한 공동체는 그에게 큰 도움과 확신을 위한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미 확신하고 흔쾌히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큰 위로를 주며 복을 빌어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렇게 해서 마리아를 통한 메시야의 나심은 이중의 증거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는 자기 자신 속에서, 그리고 둘째는 성령충만한 엘리사벳을 통해서... 그렇게 해서 그 증거는 한 없는 기쁨과 축복 가운데서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45절)

원래 이 구절은 “말씀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여자는 복되다”라는 뜻이다. 누가 복있는 자인가? 하나님의 말씀, 그 분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이다. 그 사람만이 그 언약 안에 담겨져 있는 모든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메시아의 모친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그래서, 그 약속이 이야기하는 모든 복을 받아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이 복주심의 통로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래서 언제나 믿음을 견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그 분의 언약에 대해 ‘믿음’이라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 믿음이 복으로 성취될 것이니까 말이다. 

엘리사벳의 축복을 듣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가 누군가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주심에 대해 듣게 될 때,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복을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50절)

복주심에 대한 반응이 일차적으로 찬양으로 이어질 때, 하나님을 향한 기쁨을 이어질 때  우리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마리아는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온전한 확신과 기쁨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능하신 이...,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이것은 마리아가 하나님을 부르는 언어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언어는 구약에서 항상 구원자요 구속자이신, 백성들을 대신하여 싸워이기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고 고백되는 언어들이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구약성경이 누누히 이야기해 온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완성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긍휼하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다. 이 또한 언약의 성취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바로 그 은혜가 ‘대대로’ 베풀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증거해 주는 사건이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은혜가 자신을 통해서 세상에 베풀어지게 될 것을 보고 있다. 그러니 그의 찬양은 그야 말로 기쁨에 넘치는 감사와 영광에 넘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삶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액면 그대로만 본다면 별 것 아니게 보여지고 때로는 큰 장애나 난관으로 보여질 때도 있다.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하는 일들도 많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그 분의 계획 안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역으로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히 여기심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하나님의 속 뜻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분을 향한 의심과 원망을 넘어서서 기쁨과 찬양, 그리고 더 확고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51절 이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어떤 방식으로 행해지게 될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모두 요약하면 한 마디로 ‘upside down’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것 같은 앞과 뒤, 그리고 아래와 위를 뒤바꾸심으로써 이루어 진다. 그것이 구약성경이 누누히 보여주며 증거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진실이다. 사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별로 기대할 것이 못되는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질서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완전한 하나님의 질서로 재편하는 일이 없다면 어찌 그곳이 천국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 될 수 있겠는가? 천국은 높은 곳은 낮아지고 낮은 곳은 높여져서 평탄한 곳이 되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소망이 되는 그런 곳이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이런 ‘하늘나라’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나님, 우리에게는 거룩한 공동체, 성령충만한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어, 그러한 통로로 사는 일에는 그 공동체를 통한 확인과 위로와 축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공동체, 그런 사람들을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육안’으로만 보지 않게 해 주소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의 일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고, 그래서 보이는 것이 아닌 그것이 ‘실재’임을 알고 믿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합니다. 높은 곳을 낮추시고 낮은 곳을 높이셔서 그 높낮이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 하며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일이 없는 그런 나라를 기대합니다.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