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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28. 새벽예배 -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요한복음 63)

   

요0924to34 -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pdf


20121128D (#1).mp3.zip



    

   본문 : 요한복음 9장 24-34절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종종 성도들로 부터 상담요청을 받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말 어떤 일이 궁금하거나, 혹은 결정을 내리기 힘든 일을 위한 분별을 얻기 위해서 상담을 요청하시지만 어떤 경우에는 전혀 상담이 필요없는 분이 상담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이 상담을 요청하시는 이유는 답을 찾기 위한 의견이나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목회자의 입에서 듣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미 결정은 내려져 있습니다. 대답은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질문을 합니다. 이런 경우 100이면 100 다들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합니다. 분명히 대답해 드렸는데도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줄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절대로 듣고싶어하는 답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때로는 화를 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도 저는 끝까지 그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 분이 원하는 답을 드리면 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되고, 그 분은 저를 이용해서 자신을 옳지 않은 방법으로 합리화하는 죄까지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도 똑같았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무엇을 조사하고 알아보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미 정해진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론이란 바로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의 치료가 예수님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이나 아니면 이 이적 자체가 꾸며진 거짓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사를 하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판결문을 작성해 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원하는 결론, 이미 정해놓은 결론을 얻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은 치료받은 맹인의 부모들을 취조했습니다. 겉으로는 질문이었지만 이것은 협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은 출교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이후였기 때문에 부모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관련된 그 어떤 긍정적인 증언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정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내 아들이 앞을 보지 못하다가 이제는 보는 것, 그것 하나만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할 뿐 더 이상의 이야기를 피했습니다. 출교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의 첫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사자를 불러서 윽박지르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그들을 자신들의 본색이 드러내고 맙니다. 자신들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말하고 맙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이 ‘죄를 고백하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던 일종의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제 네가 너의 치유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이실직고하라’는 명령이자 협박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이렇게 점잖고 그럴 듯한 말로도 사람을 협박할 수 있는 악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더 악한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선한 것을 악하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보다 힘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가지고 있는 힘만큼 하나님 앞에서는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으로부터 듣고 싶어했던 정해진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힘있는 우리, 전문가인 우리의 결론이 이것이니 너도 여기에 동의해라, 예수가 선지자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말하라. 그러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점잖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빛으로 나온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더 자세하게 꼬치 꼬치 캐묻습니다. 압박을 가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의견에 대해서 더 분명해져 갑니다. 우리가 25절과 30절 이하를 보면 이 사람의 말이 더욱더 분명해지고 논리적이 되며, 분명해 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죄인인줄 내가 알지 못하나...” 처음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할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이 죄인인지 아닌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예수님은 결코 죄인이 될 수 없다는, 처음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선지자일 수 밖에 없다는 너무 단순하고 분명한 이유를 찾아내게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낸 분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이 아니라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시는 분이라는 것과 둘째는 더러 더러 중간에 시력을 잃은 사람을 고치는 선지자들은 있었어도 나면서 부터 앞을 못보는 사람을 고치는 선지자는 창세 이후로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두 가지를 종합하여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 사람의 논리에 억지가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모르던 새로운 이론이 있습니까?  꾸며댄 거짓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내용은 바리새인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또 가르치던 내용이었습니다. 나면서 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도 훤히 알고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이런 단순하고 명확한 판단기준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결론을 내려놓고서 그것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침을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 너무 이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다 이야기한 것을 또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게다가 자기처럼 무식한 사람도 다 알고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성경적인 기준을 성경의 전문가요 권위자라는 바리새인들은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이야기의 주도권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바리새인들은 아주 당당하고 점잖게 시작했습니다. 지식과 권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뒤로 가면 갈수록 이들은 이성을 잃고 흥분합니다. 밀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한다는 말이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라는 것이었고, 자신들의 힘을 사용해서 그 사람을 출교시키고 맙니다. 힘 밖에 없는 사람이 힘을 쓰면 그것이 겉으로는 이긴 것 같지만 실은 스스로 패배를 가장 명확하게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졌는데 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니, 이제 남은 폭력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에 폭력을 쓰는 것이니까요. 


사실 바리새인들이 고침받은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정말 재미있는 말입니다.  연극으로 치면 코메디의 마지막 반전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났다.’ 그 당시 사고방식으로는 이 말은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들에게 당연히 적용될 수 있던 말이었고 그래서 아무런 이상이 없는 말 같지만, 재미있게도 이 말은 조금전까지의 자신들이 주장을 스스로 완전히 뒤집어 엎는 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조금전까지 그 맹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거짓말을 고백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났다’고 그 사람을 정죄합니다. 이 말은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금 바리새인들 앞에 눈을 뜨고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의 주장대로 나면서 부터 맹인이었지만 지금은 이 사람의 증언대로 고침을 받았는데, 바리새인들은 그 동안은 그것을 알면서도 줄곧 부인하고 믿지 않다가 여기에 와서 자신들도 모르게 그 억지를 전부 다 드러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마 고침받은 사람은 어의가 없어서 헛웃음을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추방당하는 입장이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요즘 계속해서 빛에 있다는 것과 어둠에 속해 있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전체가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다루는 것치고는 꽤 긴 내용이죠. 본문은 특별히 어둠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내용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바로 계속해서 진리를 믿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위한 치료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신 새 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점에 있어서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생각, 그리고 감정을 100으로 본다면, 어떤 사람은 그 중에서 50만 빛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70만 빛 가운데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30만 빛 가운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여전히 어둠 가운데, 혹은 희미한 가운데 있는 것이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100퍼센트 빛에 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는 그저 빛으로 나와라, 그래서 빛에 거해라라고만 말해주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는 빛에 속해있고 또 어느 부분에서는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정밀한 시금석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런 이야기들이 이렇게 길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 또한 우리가 큰 틀에서는 빛 가운데 있으면서도 어느 부분에서 여전히 어둠 속에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자기입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주장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항상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아무리 큰 권위를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굉장히 우습고 유치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 이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고, 이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알고, 이 사람들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 입장이라는 어둠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막 눈을 뜬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었고, 정말 웃기는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수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정죄를 받는 심각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내 속에 바리새인같은 모습, 아직도 어둠에 속한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내놓으시고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시며 버리겠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고 간절하게 빛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빛 가운데 거하는 밝은 삶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