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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년 특새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3(특새 14)


마0611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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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3년 1월 31일 목요일

본문 : 마태복음 6장 11절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살펴보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째 날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부분을, 그리고 둘째 날에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세 가지 기도제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도는 그 다음에서야 우리들의 필요를 구하는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기도에 관해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누구시며, 우리는 그 분을 어떤 분으로 믿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있어서 우선적인 관심사는 우리 자신의 필요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들의 필요란 그 다음에야 나올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순서는 마태복음 6장 25절 이하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너희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되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서 챙겨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이 있는 사람들, 그 믿음으로 살아가고 싶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한 것같지만 실은 딱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 코끝으로 드나드는 숨과 우리 입을 통해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음식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라도 일정기간 동안 공급되지 않으면 사람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인간에게는 아주 아주 절실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숨쉬는데 필요한 공기야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누구에게나 거저 주어지지만 양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식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양식만이 우리들의 가장 절실하고 예민한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민감한 문제에 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은 이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신,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구해도 된다고 말씀하신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는 이 ‘양식’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일용할 양식’ 그러니까 하루 하루 그 날 사용할 양식만을 구하라고 하신 것이고, 너희의 필요를 위한 기도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욕심도 많고 근심도 많은 우리들에게는 이것이 굉장히 충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겨우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실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생각해 보면 매일 매일의 양식, 그 날의 쓸 것만 있으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원래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하루 하루가 이어져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한꺼번에 육개월씩, 일년씩, 몇 년씩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다들 그렇게 믿습니다. 그것을 증명해 준 사람도 없는데 그냥 그렇게 확신하면서 그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필요한 것이 더 많고 그래서 더 많은 근심과 걱정, 그리고 욕심에 빠져 사는 그런 시대입니다. 요즘 결혼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로 경제적인 것입니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그 안을 채워야 하는 많은 것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진짜로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어려워서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결혼해서 이루어 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칸 삭월세 방에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래서는 결코 결혼하지 못합니다.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실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대부분의 필요없는 걱정과 욕심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그저 일용할 양식, 매일 매일의 쓸 것 뿐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없어도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며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10년치 양식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드리는 사람치고 욕심없는 사람이 없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만큼의 양식을 탐내는 사람에게 실은 하나님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진실로 자신은 하나님께서 하루치의 양식을 끊어버리면 큰 일이 나는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하루의 양식, 하루의 필요를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거나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됩니다.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겸손한 피조물의 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비참하거나 궁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하라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그렇게 구하면, 진짜로 그 은혜를 구하면 내가 그 은혜를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용할 양식, 하루 하루의 필요를 구하는 자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렇게 그의 삶을 채워주십니다. 이런 기도를 드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매일 매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로 40년을 살아갔듯이 이런 기도를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급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풍성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드리면 사는 사람은 오히려 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자신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려고 끙끙대며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허겁지겁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성도들에게는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고 그 세상에 묶여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신뢰하며,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며 사는 성도는 하루 하루의 필요를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 어떻든지 당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죽지 않고 여유만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대로 때로 공급이 끊어지면 그 날은 걱정할 수 있지만, 그의 삶은 결코 그런 걱정과 근심으로 함몰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근심과 걱정은 욕심과 불신앙이 만들어 내는 쓴 열매이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가장 약한 기도, 가장 빈궁한 자의 기도같아 보이는 이 기도는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지키는 방패가 되며, 실은 가장 넉넉하고 당당한 기도가 됩니다. 이 기도가 의심과 불안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고백이요, 연약함의 고백이 될 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이 기도를 통해 우리 삶을 넉넉하게 해 주실 것이고, 만족스럽고 능력있는 삶이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항상 이 작은 기도를 가장 큰 믿음으로 드리셔서 하루 하루를 주님의 공급하심 속에서 근심과 걱정없이, 그러나 겸손하게 살아가는 참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