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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1.04. 금요기도회 -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서(기도 7)


욘0202to09 -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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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나 2장 2-9절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기도는 요나의 기도입니다. 요나서는 소선지서 12권 중의 한 권인데요, 그런 점에서 성경은 분명히 요나를 선지자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선지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사역을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최고의 도시였던 니느웨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역사상 그 어떤 선지자가 일으켰던 회개보다 더 큰 회개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요나 자신을 보면 이 사람이 정말 선지자인지,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읽으면서 발견하는 요나의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인 모습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서를 읽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요나서를 읽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요나를 통해 비춰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요나의 별명이 바로 ‘요놈의 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함께 살펴볼 요나의 기도 속에는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우리 자신, 그리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 속에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기억하고 또 기도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들도 발견되지만 또한 기도자인 우리의 부족하기만한 모습과 또 기도자로서 피해야 할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요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요나는 지금 물고기 뱃속에 있습니다. 고집스런 불순종에 대한 징벌로 바다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1장 마지막 절인 17절은 그 물고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바다에 던져넣기 전에 그 배 밑에 큰 물고기를 대기시키셨습니다. 계속 그 배를 따라다니게 하신 것이죠. 요나의 고백대로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바다를 뒤흔드셨을 뿐아니라 그 바다 속의 물고기를 움직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물고기 덕분에 요나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 던져졌지만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요나는 지금 바로 그 물고기 속에서 기도드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일컬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이 짧은 구절은 아주 중요하고도 은혜로운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줍니다. 요나는 지금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가는 배를 탔고, 거기서도 태평하게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폭풍우치는 바다에 던져졌고 겨우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물고기 뱃속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하나님을 여전히 그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도적이고 악한 불순종, 그리고 그로 인한 징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요나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만 기억하면 우리는 기도할 용기를 낼 수 있고,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보내주시는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실 이 말은 우리 하나님께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해병대는 영원하지 않지만,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한 번 우리의 하나님은 영원한 우리의 하나님이시니까요. 성경이 ‘나의’라는 혹은 ‘우리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할 때는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나타낼 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심한 영적인 침체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자칫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한 어떤 이유에서건 심한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에게 무관심하시고 또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서, 물고기 배속같은 그 곳에서 다시 기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내 부르짖음에 경청하실 것입니다. 비록 내가 죄 중에 있더라도, 그 죄 때문에 징계를 당할 때에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심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죄 중에 은혜가 더 넘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목숨을 던져 반항한 요나였지만 막상 죽음이라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니 자신의 유일한 도움이신 하나님 여호와께 눈을 돌려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 기도는 이미 그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시작되었던 것같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그 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 들으셨나이다” 목숨을 바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정말 극단적인 불순종 속에서 드린 기도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도 들으셨습니다. 큰 물고기를 보내셔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가 기도도 하기 전에 그 물고기를 준비해 놓고 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커다란 불순종을 보이고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우리를 징계하실 때에라도 이미 우리를 건져주실 준비를 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듣고 그제서야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건져주실 준비을 해 놓으시고 그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이며 은혜입니다. 그것이 그 분의 인자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구원을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께, 이미 깊은 바다 속에 물고기를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런 기도는 응답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할 시험 밖에는 내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는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도 속에서도 여전히 청산되지 않는 요나의 위선을 보게 됩니다. 요나는 다시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3절을 보면 그는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나이다” 얼핏 보면 별 이상이 없는 내용같지만 지금 요나는 절반의 사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나를 그런 상황에 던져 넣으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원인제공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요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여기서 자기 이야기는 쏙 빼고 말합니다. 3절을 2절과 연결해서 보면 이렇게 됩니다. “제가 너무 힘들고 긴급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 자기 잘못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탓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모습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1장 10절에서는 분명히 그 어려움이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도망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자기 합리화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 때문에 같은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자기 잘못을 쏙 빼놓고 상대방의 잘못만 이야기하니 그렇게 되는 것이죠.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는 그것을 몰라서 낭패를 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말이죠. 그런데, 그것도 노하우라고 그래서 나중에는 양쪽 이야기 모두 듣지 않고서, 또 내가 직접 그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속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또 실수하고 오해하기가 쉬워지니까요. 


우리들의 이런 모습은 요나의 경우처럼 심지어는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도 그대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이지만 정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꼭 의도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버릇처럼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려고 할 때는 먼저 정직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직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그럴 듯하게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세울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사실 그러나 안 그러나 결과는 같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합리화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속으시는 것은 결코 아니고 그렇게 지킨 자존심이 의미있는 자존심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기도할 때는 무조건 정직해야 합니다. 내가 한 것은 했다, 못한 것은 못했다고 투명하게 내려놓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야 말로 정직이 최선의 정책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투명하게 내 놓아야 그 모습이 치료되고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징계를 당하게 만든 원인은 그대로 남겨두고 그 징계만 끝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상황이 좋지 않을 수록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또 하나님께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상황 속에서 건져질 뿐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들도 처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기도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참 다행이죠.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게 되면 됩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도 속에 위선도 섞일 수 있고, 자기 합리화도 섞일 수 있고, 불평이나 자기 의가 섞여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기도 속에 있는 불순물들이 줄어들고 없어지면 그러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요나는 말합니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성전은 언약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고 하셨던 그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요나는 바로 하나님의 그러한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상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고백해야 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에게 묶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원래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에게 묶인 끈을 풀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그렇게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그의 기도는 대단한 기도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거의 죽게된 상황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약속이 있는 성전을 기억했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요나를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요나의 구원을 준비해놓고 계셨지만 요나는 그렇게 자신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때로 너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상황, 특히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상황 속에서는 힘있게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현실의 무게와 죄책감이 우리를 짖누르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때도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곤경 가운데 내버려 두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건져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건져 주셨습니다. 미리 준비해 놓으신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구원 후에 요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부릅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것이 우리를 곤경해서 구해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듣기를 원하시는 고백입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바로 그 고백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평상시에는 아무래도 하나님이 우리와 멀게 느껴집니다. 또 심한 어려움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 중에 우리가 부르짖고 그 부르짖음을 통해 구원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저 멀리 계신 나와 상관없는 하늘의 신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현실 속에서도 나를 생각하시고 또 붙들고 계시는 든든한 의지가 되시는 분이심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실로 “나의 하나님 주 여호와여!”라고 주님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과 징계의 유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려움이, 그리고 징계가 가치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데려다 놓고,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주는 것 말입니다. 


요나의 마지막 고백은 이렇습니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갚겠나이다 구원은 주께 있나이다” 이것이 요나가 드린 기도의 결론이었습니다. 거짓되고 헛된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결코 자기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작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어려움과 힘든 일을 당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 집니다. 요나는 바른 방향으로 갔습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가까이 경험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더 온전한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께 드린 약속에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이야기 하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돌아가겠다고 고백합니다. 무엇보다도 요나는 이 경험을 통해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처음에 그러셨던 것처럼 물고기에게 명령하셔서 요나를 땅에 토해놓게 하셨습니다. 이제 요나의 구원은 완전해 진 것입니다. 


상황은 그 상황이 어떻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고 떠나셨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분의 구원을 기대하고 또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를 기대하시면서 우리에게 어려움도 주시고 징계도 주십니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의 구원을 통해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 속에 우리의 위선과 불평이 섞여 있더라도 우리는 기도를 드려야 하며, 그 기도를 통해서 오히려 그런 불순물을 제거하고,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주님을 진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완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나의 부족한 기도는 우리의 기도를 위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기도가 점점 더 온전한 기도로 변하는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진실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는 복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