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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3장 20-30절
이제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날이 다가옵니다. 아마 타지에 가서 살고 있는 가족들은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들과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흐뭇한 마음이 되어있을 것이고, 올해는 또 무엇을 선물할까 행복한 고민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우리들 중에는 굉장히 힘들어 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바로 가족 중에서 혼자만 혹은 자기 직계가족만 예수를 믿는 성도들입니다. 제가 서울에 있다가 대구에 와서 깜짝 놀란 일 중 하나가 성도들 중에 이 문제로 무척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이고 유교적인 가정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를 믿었지만 그 가정만 그렇지 다른 형제의 가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심지어는 형이 제사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동생이 칼을 들고 행패를 부리는 가정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형제나 가족과의 심각한 갈등 속에 있는 가정은 정말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이번 명절에는 또 어떻게 하나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실 줄로 압니다.
우리가 적당히 줄 것 다 주면서, 맞춰줄 것 다 맞춰주면서 예수를 믿을 때는 이런 갈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그래서 더 이상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며 선을 긋기 시작하면, 죄와 타협하는 일을 그만두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반대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는 우리들의 선택과 행동이 자신들의 이익이나 가치관과 부딛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는 가족도 또 친구나 회사 동료들도 우리들의 행동에 대해 민감해지고 또 노골적인 반대를 표시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의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식사시간까지 반납하시면서 사람들을 돌보시고 또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 또 너무 너무 좋은 것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과 점점 더 멀어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과 오늘 본문의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예수님이 귀신에 들렸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강제로 잡아가기 위해서 고향에서부터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까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바알세불, 그러니까 귀신의 왕에게 사로잡혀서 그 능력으로 귀신들을 내쫓는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보아왔던, 어찌보면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또 이해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서기관들은 성경의 달인으로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보아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고 또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친척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행동과 사역으로 인해서 외부적인 압박과 비난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의 기준으로는 분명 예수님께서 당시의 관행들을 깨뜨리고 있었으니까요. 마치 망나니 아들을 둔 부모와 같은 처지였을지도 모릅니다.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행동들 때문에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렸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말로만 가르쳤는데, 예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과 능력으로 증명해 보이시면서 사역하셨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예수님께로 쏠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체면이 생명이고, 권력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생명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행동이 이런 것들과 상관이 없을 때에는 무엇을 해도 괜챦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건드릴 때는 행동을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가족이라도 말입니다. 사실 가족이기 때문에, 이상하게도 가족이기 때문에 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제 후배의 아버지께서 사업을 크게 하시다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망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서울 강남의 현대아파트를 두 채씩 가지고 계시다가, 하루 아침에 큰 아들 고등학교 가는데 가방 사 줄 돈조차 없을 정도로 몰락했습니다. 제 후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때 너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장 사납게 밤이고 낮이고 찾아와 빚을 갚으라고 한 사람들이 남들이 아니라 친척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들은 괜챦다고 천천히 갚으라고 하고 기다려 주기도 했지만 친척들은 피도 눈물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빨리 갚으라고 할 소리 못 할 소리 다 해가며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이 가족이지만 또 정반대로 가장 몰인정하고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것 또한 가족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또한 옳은 길을 가다가, 바른 선택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 그러니까 나를 가장 잘 알아주어야 할 사람들로부터 말도 안되는 반대를 당하게 될 때, 그것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보면 그게 바로 인간이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익에 민감합니다. 그게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비상시에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이익이 되거나 혹은 그들의 기준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면 언젠가는 나도 예수님처럼 큰 반대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두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올 명절에도 그렇게 생각해 두시기 바랍니다. 안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그런 일을 당할 때, 그저 올 것이 왔구나 하고 큰 마음을 품고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친척들과 서기관들은 다른 것으로는 예수님을 책 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시는 말씀도 전혀 틀림이 없었고, 하시는 일들도 다 선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귀신이었습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이 귀신들려 미쳤다고 주장했고, 서기관들은 사람들이 어쩌지 못하는 악한 영들을 내어쫓는 것을 보니 더 강한 귀신, 그러니까 귀신의 우두머리인 바알세불에 사로잡혀 그 능력으로 저런 일을 한다고 몰아부쳤습니다. 그것 밖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과 자신들의 반대를 하나로 엮을 구실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예수를 믿다가 “예수를 믿어도 곱게 믿어라, 미쳐도 곱게 미쳐라”라는 비난을 들어보신 분들이 계신가요? 앞으로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더라도 크게 신경쓰지 마십시오. 너무 상심해 하지 마십시오. 그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해하려고 할 때, 무언가 책 잡으려고 하는데 책 잡을 것이 없을 때 하는 말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십시오. 예수님도 그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귀신 들렸다고, 미쳤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을 지키려고 하다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길을 가려고 하다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건 아주 기분 나쁘지만 여러분을 향한 최고의 칭찬입니다.
예수님의 친적들은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지만 서기관들은 이미 사람들 틈에 섞여서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는 근거없는 낭설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가까이로 부르셨습니다. 정말 멋지죠. 우리 주님은 결코 피해가지 않습니다. 거리낄 것도 오해받을 것도 없었으니까요. 우리도 때로 이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혀 잘못이 없고 당당하기만 하다면 매사에 부딛히려고만 해서도 안되겠지만 때가 되면 정면돌파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거칠게 공격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지만 따져 물으시거나 맞받아 치신 것이 아니라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정면돌파라고 해서 항상 감정적이고 직접적인 정면돌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생각을 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과연 왜 그러는지, 그러는 것이 정당한지 생각하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의 믿음과 올바른 선택에 대해서 반대를 표시할 때, 사람들은 결코 이성적으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삼단논법을 사용해서, 논문을 써들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뒤에서 수근거리거나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게 마련이죠. 그럴 때 똑같은 방법으로 상대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차분하게 응대하고, 또 될 수 있으면 한 번 쯤 그렇게 하는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가 있겠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분쟁하면 설 수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나 당연한,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의 원리였습니다.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자명한 원리였죠. 나라건 집이건 내부에서 부터 분열이 생기면 그건 끝입니다. 이런 집이나 이런 나라를 뭐라고 부르죠? 네. 콩가루라고 부릅니다. 콩가루는 불면 날아가기나하지 서로 뭉치려는 성격이 전혀 없습니다. 어느 집단이건 내부에서 문제가 생기면 구심력이 없어지고 그래서 결국은 흩어지고 무너집니다. 만약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그것은 사탄이 자기 손으로 일 잘 하고 있는 자기 부하들을 제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왕국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그런 일을 할리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손에 넣고 자기 맘대로 해야하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그 머리 좋은 사탄이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내쫓고 있다는 말은 그야 말로 말도 안되는 주장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묵묵부답, 유구무언인 서기관들을 향해서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것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집에 주인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그 집 물건을 빼앗아 오려면 적어도 그 집 주인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집 주인보다 더 강해야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꾸로 당하고 맙니다. 망신만 당하고 쫓겨나고 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서 악한 영들을 내어쫓았다면, 적어도 예수님은 그런 악한 영보다는 강한 분이십니다. 사탄을 결박하고 사탄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빼앗아 오셨다면 사탄보다 훨씬 강한 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아닌, 귀신의 우두머리가 아닌 그 사탄보다 훨씬 강하신 분.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질문 섞인 비유를 통해 증명해 보이신 예수님 자신의 정체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사탄이 아니면서, 귀신의 우두머리가 아니면서 그들보다 훨씬 더 강한 존재가 있다면 누구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기가 막힌 반전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결국 자신을 향해 귀신의 우두머리라고 비난하는 그 말도 안되는 비난을 이용해서 오히려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완벽하게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거부한다면, 무식해서라고 핑계댈 수가 없습니다. 실수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고의적인 불신앙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한가지 우리에게 꼭 필요한 확신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대처럼 오늘날도 예수님을 폄하하고 모독하는 수많은 주장들이 존재합니다. 시덥쟎은 소설들까지 등장하여 스스로를 마치 사실인듯 가장하며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 휘둘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을 향한 모든 반대와 폄하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시도들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그 모든 말도 안되는 말들을 정반대로 뒤집고, 그들의 주장을 증거로 사용하셔서 온 천하에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한 말 때문에 가장 큰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편에 서 있는 이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혹은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 대해서, 사람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에 대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에는 그들이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폄하하며, 그 분 편에 서 있는 우리를 무시했던 그들이 마지막 날에는 가장 부끄러운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능력도 지혜도 모두 세상이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우리 주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당하십시오. 기죽지 마시고 당당하게 주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최후의 승자는 우리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불신앙의 세계와 당당히 맞서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여자분이신데 꽤 크게 출판 유통업을 하시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이 분도 정직하지 않게 사업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거듭나고 보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때부터 정직하게 사업하시겠다고 각오를 하시고 그 마음에 순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출판유통업은 실제로 가장 비리가 심한 업종 중의 하나입니다. 편법과 불법이 상식처럼 되어있는 곳이죠. 이런 곳에서 법을 지켜가며 편법을 빼고 사업을 하려고 하니 너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 그리고 남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이지만 법이 그렇고 양심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지 않게 되자 주변에서 말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망한다, 왜 그러냐, 너만 잘나고 너만 깨끗하냐 하고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이 분은 사업방법도 그렇게 바꿨지만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처우와 복지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죠. 너무 잘해주니까 재무담당 직원이 집사님에게 찾아와서 “사장님, 이렇게 하는 회사 없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라고까지 이야기하며 말리는 일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죠. 어떻게 하면 더 받을까 고민해야 할 직원이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다른 업체들은 문을 닫고 힘겨워하는데, 집사님의 기업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더 잘 되는 것입니다. 다른 업체들은 찾아가서 로비를 해도 따내기 힘든 거래를, 오히려 그 거래처들이 찾아와서 맡아달라고 하는 일이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집사님께서는 그런 거래라고 덥썩 덥썩 물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안에 불법적이거나 편법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되면 굉장히 오래동안 고민을 하셨고, 보류하시거나 아얘 포기하기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직원들 조차도 집사님의 사업방식에 불만이 많았고,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직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뭔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정말 있나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회사에 2년 정도 월요일 아침마다 설교를 하러 갔었는데, 예수도 믿지 않고 교회도 다니지 않는 직원들이 얼마나 설교에 집중하는지 오히려 교회보다 낫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또 제가 설교사역을 하러 다니는 중간 중간에도 그 기업에서는 정말 기적같은 거래들이 성사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저도 놀라고 직원들도 놀랐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모든 일이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반대자들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잠재우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비난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귀신들을 내쫓으신 그 일은 예수님께서 말도 안되는 비난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또 반대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면 사람들의 오해와 반대는 오히려 예상해야만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이 세상이 특별히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우리의 선하고 바른 선택이 그들의 이익과 바르지 않은 기준을 건드리게 될 때가 많으니까요. 저는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주일 본문에 나오는 ‘권능’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권위와 능력을 주신 진짜 이유를 하나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권능은 사람들을 살리고 회복시키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권능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딛히게 될 때,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의 능력을 증거하는 증거가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말은 믿지 않고, 거부할 수 있어도 눈 앞에 보이는 증거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저는 오늘날도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그 옛날과 동일하게 역사하신다고 믿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님은 주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신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악한 영과 죄를 몰아내고 사람들을 살리게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 보면 오늘날 주님이 우리를 통해 주님의 권능을 가장 크게 드러내시는 방법은 우리가 이 세상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의 말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순종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인 것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가장 통하지 않을 것같은 영역에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바로 거기서 주님은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반대자들의 입을 닫으시는 것입니다.
예전의 전도는 거의가 능력전도였습니다. 그저 외치거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사람들을 믿게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전도의 전략이 바뀌었습니다. 관계전도가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는 기적 한 두 번 경험하는 것으로는 예수를 믿지 않을만큼 단단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 삶이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들에게 보여지는 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믿고 얼마나 달라졌는지, 그래서 얼마나 다른 선택을 하며, 다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런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역사하고 계신지, 우리의 삶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입술을 통해 복음이 선포될 때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기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삶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가장 명확한 증거로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어떤 모양으로든 믿음 때문에 반대와 오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가 사는 세상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들을 대하는 적절한 지혜가 필요하고, 우리는 이 지혜를 간구해야만 합니다. 성령님께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지혜있는 말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통해 보여주시는 권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권위와 능력을 구해야만 합니다. 내 삶이 하나님과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되고, 그래서 그들의 입이 다물어 지도록,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게 하는 이유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권능을 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으니 우리가 기꺼이 주님 편에 서고, 또 그 권능을 간구한다면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 권능을 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신앙이 의미있고 능력있는 것이 되게하려면 언젠가 한 번은 반드시 주님 편에 서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권능을 더해 주실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권능을 간구하면서 기꺼이 주님 편에 섭시다. 주님이 도와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라도 우리 삶에 반드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살아있고 능력있는 증거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