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04to11 -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한87).pdf
본문 : 요한복음 13장 4-1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다 마치신 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식사를 하다 말고 일어나셔서 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식사 중에 주인이 돌아오면 식사를 하다말고 일어나 주인의 발을 씻기고 주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식탁시중을 들었던 당시의 노예들이 보였던 ‘전형적인’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스승이 종이 된다, 주인이 종이 된다. 그것도 가장 낮은 종이 된다. 이것은 어제 말씀드린 대로 당시의 사람들로서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도, 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시지 못하도록 극구 말렸습니다.
베드로가 첫번째 말렸을 때, 주님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것을 당장 이해하리라고 기대하셨거나, 그 일로부터 당장 무언가를 배울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행하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일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가르쳐 주셔야만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그냥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의미를 알고 아는 것을 믿고, 또 거기 의지해서 살아갈 정도가 되려면 결코 사람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반드시 성령님께서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깨닫는 것과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깨달음을 얻지만 우리의 삶과 신앙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그러한 깨달음이 굉장한 것 같아도 거기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신 일들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또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며 그렇게 귀하게 얻은 진리들이 우리 삶에 의미있는 변화를 일으키게 하려면 언제나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하신 그 말씀조차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 일이 나중에 아주 아주 큰 의미와 능력이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번에는 더 완강하게 만류했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그것이 잘못한 것이나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 만류가 너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강한 말씀을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우리 말로는 “네가 계속 그러면 나와 너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이지만 유대에서 이 말은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하면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상속받을 재산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 상관이라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유산, 약속의 땅, 그리고 나아가서는 하늘나라의 분깃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어마어마한 말씀이었습니다. 갑자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베드로는 태도를 180도 바꿉니다. “주여 내 발 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싯어 주옵소서” 그 말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십자가를 보여주시고 알려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주님과 제자들을 어떻게 연결시키 주는지, 그리고 그 십자가가 앞으로 어떻게 제자들에게 복이 되고 능력이 되어줄지를 알려주는 가장 좋은 그림이 되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첫번째 내용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을 얻을 수도 없고, 하늘나라에서 분깃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모두 다 놓쳐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와 우리 주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복일까요? 위로일까요? 천국의 소망일까요? 아닙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죄용서의 은혜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셨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 죄를 씻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와 주님이 연결된 것이고, 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이나 위로나 능력이나 심지어는 하늘나라까지도 모두가 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들의 죄를 씻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복 중의 최고의 복은 죄용서의 복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되고, 이 감격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려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두어야 합니다. 항상 우리와 주님 사이에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가책이나 미안함을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큰 주님의 사랑과 섬김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고 그 감사, 그 감격, 그 행복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해 주신 두 번째 말씀도 주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주님께서 다른 곳이 아니라 발을 씻어주신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발이 가장 더럽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주님이 인간의 가장 더러운 곳의 더러움을 제거해 주지 않으시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로 다 씻어주시지 않으시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둘째로 발은 계속해서 더럽혀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보혈로 온 몸을 씻었다고 해서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다시 더럽히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다시 씻고 또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죄를 씻지 못합니다. 이미 더러워진 부분도 그렇고, 또 그것 때문에 생겨난 결과들도 원래 상태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 필요합니다. 주님이 다시 씻어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주님께 우리의 더러워진 발을 내밀어야 하며, 그 분이 다시 씻어주시도록 다시 우리의 발을 내맡겨야 합니다.
주님과의 처음 관계도 그렇지만 주님의 은혜로 온 몸이 깨끗해지고 난 후의 나중의 관계도 바로 이러한 씻어주심을 통해 계속 유지됩니다. 왜냐하면 새로 생겨나서 우리의 발을 더럽히는 죄들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흐릿해 지게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원래 우리의 온 몸을 뒤덥고 있던 죄악들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듭 거듭 우리의 더러워진 발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서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시는 그 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씻겨주시고 다시 받아주시며 기뻐하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거듭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벽에 주님 앞에 나오시는 성도 여러분, 이 두 가지 복을 잊지마시고 또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새벽만큼은 온 몸을 깨끗하게 해 주셨던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항상 여러분의 더러워진 발을 주님 앞에 내놓는 일을 거듭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고백하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는 일은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주님께 다시 받아들여지는 은혜를 경험하는 일이고, 그 분 안있는 모든 하늘의 복들을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도 중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더러워진 발을 씻어주시며 환하게 웃으시는 얼굴을 보는 그 행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