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0101to05 -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4(사도행전4).pdf
본문 : 사도행전 1장 1-5절
“떡 줄 놈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치국 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런 식이 된다면 그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생각도 없는데, 나 혼자 그렇게 믿고 신나서 기대하고 기뻐한다면 실제로 우리의 신앙만큼 불확실하고 그래서 불안하고 허망한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신앙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을 그저 열심이나 정성을 기울이고, 확신을 갖기만 하면 되는 일로 생각하면서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좋은 것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앙은 원래 우리의 열심이나 열정,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져 있는 건축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기초가 먼저 있고 나서 그 위에 그 약속을 믿고, 또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더해질 때, 비로소 신앙은 열매가 맺혀지고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실제로 이런 사실을 잘 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확신이 없이 불확실한 가운데 살아가고 신앙 안에서 어떤 복을 누릴 수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에 곡괭이를 들고 큰 산을 파헤치면서 산에 숨겨진 보물 하나를찾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람들 중에서 누가 그 보물을 가져가게 될까요? 그렇습니다. 보물은 보물이 어디 묻혀있는지 아는 사람이 가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서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어디에 보물이 묻혀있는지 알고서 땅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에 확신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보물이 나올까요, 나오지 않을까요? 분명히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그 약속을 믿고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항상 활력과 기쁨과 기대가 넘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도 모르고, 알아도 거기에 믿음을 더하면서 신앙생활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확신도 없고 활력도 부족하며 보물같은 은혜들도 얻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우리 신앙 안에는 정말 수많은 복된 약속들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마치 여기 저기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거대한 산을 탐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신앙에 속한 모든 약속들 중에서 최고로 중요한 약속, 복들 중의 최고의 복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우리 쪽에서도 그렇고 하나님 편에서 보아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은 우리 예수님께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셨던 약속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구약성경에서부터 계속 약속되어져 온 것입니다. 우선 에스겔서 36장 26절에서 28절까지를 보면 이런 약속이 있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 약속은 에스겔서 11장에서도 똑같이 반복되는데요. 여기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새로 창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성령님은 행동이나 생각이 아니라 아얘 마음을 새롭게 바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요엘서 2장 28, 29절에서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약속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영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율법이 실패한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이루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정말 중요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충만해야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아담처럼 실패하지 않고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 어떤 복보다 더욱 더 필요한 복입니다.
그래서, 1장 4절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1장 4절은 바로 그 약속, 그 오래되고 위대한 약속이 드디어 이루어질 때가 코 앞에 다가왔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해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1장 4절과 8절을 사도행전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신약의 중심이고 나아가서는 감히 성경 전체의 중심이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믿는 사람들이 성령충만해 지는 때, 그 때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꿈과 약속은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능력있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정말 정말 복된 시대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계획과 약속, 가장 복된 약속이 이미 성취된 시대, 그래서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부어지시는 그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복을 받는 시기는 사람마다, 교회마다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대를 이어가며 더해지고 있고, 또 계속해서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촛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왔다가 이제는 아프리카로 옮겨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열정이나 믿는 자들이 더해지는 숫자를 보면 하나님의 촛대가 그렇게 옮겨가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의 책임일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그렇게 하고 계실까요?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결코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촛대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아시아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부흥을 기대하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침체된 나라에도 불같이 뜨거운 교회는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냉냉한 교회에도 은혜로 뜨거운 성도는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든,교회든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버리시고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하나님은 그런 중에서도 성령충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그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기다리며 기도하는 성도를 찾으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분명히 약속하신 대로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면 됩니다. 내가 성령충만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붙들면 됩니다. 하나님의 그 오래된 소원, 그 영광스런 약속이 우리 교회에, 나를 통해 이루어 질 것을 믿고 소망하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비록 그 상태로는 오합지졸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고 그래서 그 약속의 성취를 맛보는 주인공,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회의 시대를 열어간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약속과 명령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일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집니다. 그 약속과 명령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고, 주님께서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또한 그 때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명령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제자들에게 이 명령은 지키기가 결코 쉽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는 제자들의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생의 기반이 모두 다 갈릴리에 있는데 거기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 분명합니다. 이제 예수님도 없는 마당에 그것은 그저 예수님의 약속만 붙들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기다리는 일에 가장 큰 우선순위를 둘 것을 요구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요구하신 것은 성령충만을 기다리는 것이 주님보시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제자들 자신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도 그랬겠지만 사실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성령충만함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성령충만함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 문제이고 또 우선적인 문제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항상 성도는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성령충만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참된 하나님의 백성,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니까 말입니다. 사실 성령충만의 참된 중요성은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렇지 않아서 절실하게 힘들어 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충만함의 중요성을 알든 모르든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우리 삶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절실하게 그리고 긴급하게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계속 머무는 것이 힘들었던 두 번째 이유, 그리고 그 일이 굉장히 힘들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은 절망과 낙심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시던 유월절에 정말 말 그대로 청운의 꿈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얼마나 부푼 꿈을 꾸고 있었던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도 한껏 들떠서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서로 티격태격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은 산산히 부서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왕좌는 헤롯 왕궁의 보좌가 아니라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고난당하시며 또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주님을 배신하고 뿔뿔히 도망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의 도성이 아니라 배반과 실패의 땅이며, 좌절과 억울한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낸 부끄러움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루살렘은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어둡고 아픈 곳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곳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 곳을 제자들에게 성령충만을 주실 가장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장소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깊은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연약함과 실패의 기억으로부터 도망다니는 사람들, 피해의식과 죄책감에 젖은 사람들로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만 보면, 예루살렘에만 오면 힘겨워하는 그런 사람들로 남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그런 아프고 실망스러우며 어둡기만한 그 자리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음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정말 제자다운 제자, 거리낄 것이 없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 자리를 지키며 성령충만함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충만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모든 아픔들이 한꺼번에 치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령충만함이 그런 치료와 회복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 다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과거의 상처나 아픈 기억으로부터 온전한 치료를 경험하려면 반드시 한 번은 피하거나 도망차지 말고 그 아픔과 상처를 직면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저 자신의 경험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아도 이 일에는 예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때부터 참된 치료가 일어나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제서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정직해 지며, 간절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니까요. 예루살렘은 제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어하는 도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충만을 덧입을 때까지 결코 떠나서는 안되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실패와 좌절을 거기서 경험했기 때문에, 그 상처 또한 거기서 치료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픔의 자리, 그 부끄러움의 자리, 그 절망의 자리에서 성령충만함을 덧입어야 비로소 온전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거기서, 그것을 붙들고 성령님을 갈망하며 기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예루살렘은 지금 내가 떠나고 싶어하는 삶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아닌 척 묻어둔 과거의 상처가 될 수도 있고 인정하기 싫고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실패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기 싫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일 수도 있고, 더 크게 보면 살기 힘든 이 사회나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 나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외면하고 싶어하고 또 내가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면 그것이 장소이든, 사람이든, 기억이든, 상처든, 일이나 심지어는 나의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무엇, 그 어디, 그 누구라도 우리의 예루살렘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바로 거기서, 그 자리를 지키며,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것들을 직면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거기서 기도해서 성령충만함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그 모든 것들이 치료되고 회복되며, 그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며, 다시는 똑같은 시험에 넘어지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신앙을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성령충만의 은혜를 꼭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함을 삶의 제 1 우선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성령세례를 받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자리, 우리의 예루살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떠나고 싶고 버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아픔과 좌절이 무엇이든 그것을 붙들고 거기서 부터 기도하며 성령충만함을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우리의 성령충만은 그 누구보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을 첫번째 자리에 놓고 우리의 예루살렘에서 성령님을 갈망하며 기도하기 시작할 때, 주님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충만함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에 대한 갈망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몇 날이 못되어 성령충만을 주시겠다는 이 약속을 믿고 기도하고자 하는 열정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루살렘이,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역사를 허락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