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435to41 -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마가22).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4장 35-40절
우리 장로님 이야기는 아닌데요. 어느 장로님이 산행을 하다가 갑자기 미끄러져서 낭떠러지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미끄러지다가 손을 뻗어서 나무뿌리 하나를 잡았답니다. 이제 살았다 싶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는데, 아무리 소리를 쳐도 이상하게도 아무도 오지 않더랍니다. 이제 정말 큰 일입니다.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고 나무뿌리를 잡은 손은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을 찾았답니다. 살려달라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그 잡은 손을 놓아라. 그러면 내가 살려줄 것이다.” 세상에! 살려달라고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생명줄을 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참 실랑이를 벌였답니다. 놓아라 살려준다, 안된다 못 놓는다, 놓아라 살려준다, 안된다 절대로 못 놓는다... 그러는 사이에 손에 힘이 다 빠져서 그만 나무뿌리를 놓치고 말았답니다. “으아악~!” 하고 눈을 떠보니 꿈이더랍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하나님께 죄송스러운지 그 장로님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했답니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자신이 참 믿음이 꽤 좋은 줄 알았는데 자기 속에는 손을 놓아도 하나님께서 살게 해 주신다는 믿음, 그렇게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 종일 배 위에서 복음을 가르치신 후에 날이 저물자 갑자기 갈릴리 호수 건너편의 거라사 지방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큰 일이 났습니다. 이미 어두워진 호수 한 가운데서 커다란 돌풍을 만난 것입니다. 배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었던 제자들도 타고 있었지만, 그들까지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배는 통제불능 상태에 빠졌고 배에는 물이 쳐 들어와서 거의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물을 퍼낸다, 배를 바로 잡는다 여념이 없는데 그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배의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세상모르고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잠을 자고 계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면서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이렇게 죽게 되었는데 우리를 돌봐주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잠만 주무실 수가 있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귀찮게 구는 통에 마지 못해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스윽 일어셔서서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요동치는 호수를 향해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정말 놀라운 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타고 있던 배를 집어삼킬 듯이 으르렁 대던 바람과 물결이 일순간에 마치 언제 그랬냐고 시치미를 떼듯이 잦아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돌아 서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에서 누가 정상입니까? 배가 가라앉아 죽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입니까? 아니면 그런 상황에서도 태평하게 잠만 주무시는 예수님이십니까? 이 지경이 되도록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제자들입니까? 제자들이 그랬다고 제자들을 나무라는 예수님이십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보다는 제자들 쪽으로 기울기가 쉽습니다. 그게 우리들의 모습과 가깝고, 그게 보통 사람들의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니까요. 그렇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그런 상식적인 상황판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이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가 됩니다.
우선 본문은 이 여행을 예수님께서 주도하셨으며, 또 계속해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날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마련하신 현장실습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그 저녁에 이미 해가 지고 난 후에 제자들을 이끌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피곤하신 몸을 이끌고 말입니다. 상황만 본다면 그 날을 거기서 쉬고 아침 일찍 호수를 건너가도 상관이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미 해가 졌기 때문에 중간에서 밤을 맞게 될 것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풍랑이 일 것을 예측하지 못하셨을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무리해서 그것도 제자들과 함께 한 배에 타시고 호수를 건너신 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바다, 그 바다 위의 결코 크지 않은 배, 그리고 몰아치는 감당할 수 없는 풍랑... 이 모든 것들은 실은 우리 주님이 이미 계획하신 것이고 또 알고 계셨던 상황이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제자들을 위한 학교로, 몸으로 경험하는 잊을 수 없는 비유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리 저리 힘써보다가 곤히 잠자고 계신 야속하기만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잘 한 것일까요? 잘 못한 것일까요? 잘 한 것입니다. 깨운 것 자체는 아주 잘 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 놓고 제자들에 예수님에 대해서 했던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니나이까?” 다급해서 나온 말이기는 했지만 이것은 원망과 비난이 섞인 말이었고, 주님을 향한 불신에서 비롯된 말이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닥칩니다. 그 일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너무 너무 힘들고 마음과 영혼은 커다란 고통과 고민에 빠집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주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아얘 나의 상황에 무관심하신 것 같고, 심지어는 자리를 비우신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들도 잠들어 있는 주님을 깨웁니다. 자리를 비우신 것같은 예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의 우리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라 원망과 불평의 기도가 될 때가 많습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왜 잠만 주무시냐고? 왜 나의 상황에는 관심을 가져 주시지 않고, 지금까지 자리를 비우시고 어디 계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우리 주님은 나의 상황에 관심이 없으셔서 내가 죽을 고생을 할 때도 잠만 주무시고, 꼭 필요할 때는 살짝 자리를 비우시는 그런 분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여행은 누가 주도하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여행의 중간 중간에 생겨나는 일들에 대해서 주님이 모르고 계신 것이 있을까요? 주님이 어쩔 수 없는 주님 조차도 손 쓸 수 없는 일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다 알고 계시고, 그 모든 상황을 다 움직이시고 그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과 손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렇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나는 이렇게 어려운데, 왜 주님은 잠만 주무시고 계실까요? 정말 위험한데, 구해주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신앙이 파선하고 인생이 완전히 망가질 수 밖에 없는데도, 상황이 정말 이런데도 주님은 왜 잠만 주무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만약 주님이 정말 잠을 자고 계신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같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 보시기에는 그 상황이 그렇게 하셔도 괜찮을만한 그런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주님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13절 말씀인데요.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묵상하면 정말 많이 유익하고 능력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이 아니면 주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시험이 닥쳐오면 피할 길을 내십니다. 항상 그렇게 해 주십니다. 배에 물이 쳐들어 옵니다. 물이 잠겨 옵니다. 당장 빠져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잠만 주무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 시험이 우리가 감당할만하다고, 그래서 아직은 주님이 나서지 않으셔도 괜찮은 시험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잠들어 계신 것 같은 주님을 찾아 도움을 청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힘들 때, 주님을 찾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거기까지는 누구나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주님, 이제 움직여 주십시오. 이 상황을 책임져 주십시오. 나를 구해주십시오. 그런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잘 깨워놓고 “왜 나에게 관심이 없으십니까? 왜 잠만 주무십니까?”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분명히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구해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에라도 이 상황이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감당할만하다고 여기셔서 나에게 주신 상황이라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나를 그만큼 믿으시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주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는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 때, 그런 믿음이 얼마나 큰 능력을 가져다 주는지 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배에 타고 있던 똑같은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정말 같은 사람들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로 공회가 베드로와 제자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는 흠씬 두들겨서 협박을 하면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 배에 타고 있었던 똑같은 제자들이 그 때 보인 반응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 사이에 제자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주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 때문에, 예수의 이름 때문에 매를 맞는 일은 더 이상 예수님이 계시지 않거나 혹은 주무시고 계신다는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럴만한 사람들로 인정해 주신다는 인증서이고 훈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실컷 두들겨 맞고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납니다. 사람을 이렇게 달라지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삶이 힘드십니까? 주님이 나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 화가 나십니까? 나 몰라라 내버려 두시는 것같아 야속하십니까? 솔직히 저도 문득 문득 순간적으로는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 그런 느낌에 사로잡히면 안됩니다. 빨리 생각을 바꿔서 참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그만큼 나를 믿으신다고, 신뢰하신다고, 나를 이 만큼 인정해서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견딜 수 없게 되면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시고 구해주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깨웠을 때, 우리 예수님이 유쾌하셨을까요? 아니죠. 별로 기분이 좋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와주시면서도 별로 기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깨우더라도 기분좋게 깨워드려야 합니다. 의심과 원망의 고백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을 드려서 예수님을 기분 좋게 깨워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기분좋게 도와주시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꼭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시고 명령하셔서 잠재워 버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진짜로 이런 일을 행하셨다고 믿으십니까? 정말 우리 주님이 이런 엄청난 일을 행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어떠십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 삶에 대해서도 똑같은 일을 행하실 수 있으시다고 믿으십니까? 아무리 거센 삶의 폭풍도,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것 같은 높은 삶의 파도라도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일시에 잠재워 버릴 수 있으심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 마음 속의 바람과 풍랑은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과 걱정, 근심과 두려움도 그렇게 잠재워 버리실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갈릴리 호수의 돌풍과 파도에 비하면 우리 인생의 풍랑이나 우리 마음 속의 폭풍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 한 마디로 미친듯이 부는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셨다면, 우리 인생의 풍랑, 우리 마음의 파도는 더 쉽게 잠재우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불안함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그 분의 입에서 나온, 약속의 말씀들을 붙들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건 그것을 믿고, 그것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능력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가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고 믿어야 할 것, 그리고 우리의 삶을 묶어 놓아야 할 기둥같은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배에 예수님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 여행은 예수님께서 계획하시고 주도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대대로라면 이런 배에 풍랑이 덮쳐오고 물이 쳐 들어와 위기에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배가 위기에 빠졌습니다. 절체 절명의 어려움에 처해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과 어려움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때로는 믿기 때문에 더욱 그렇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일에는 무슨 유익이 무엇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하다는 것, 그것이 예수믿는 일의 진짜 유익입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는 우리만 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한, 주님은 항상 우리 인생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시고 그 여행을 주도해 가십니다. 가끔씩은 무관심하게 주무시고 계시는 것같이 느껴져서 그렇지 그 자리를 비우시는 때는 없습니다. 세상의 파도가 아무리 크고 세상의 바람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작은 배에 함께 타고 계신 예수님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이 그 바람과 파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담고 있는 온 세상을, 온 우주를 그 입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우리 인생의 배에 우리 주님이 타고 계신 한, 그리고 우리가 그 주님을 신뢰하는 한,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안전할 수 있습니다. 더 작은 것, 비교할 수도 없이 작은 것들이 만유의 주님이시고 만유보다 크신 우리 주님을 집어 삼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의 어마 어마한 유익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인생, 주님을 신뢰하며 사는 인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아직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님 보시기에 이제는 믿을 때가 되었는데, 믿음을 가질 때가 되었는데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다고 혼이 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들의 마음, 인간의 문제에 대한 귀중한 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두려움은 믿음이 없거나 있더라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문제는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마치 좋아하지는 않지만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친구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누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지만 이기적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두려움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하고 제 경험에 의하면 적어도 거의 의식되지 않고 지장을 주지 정도로는 충분히 해결가능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 두려움 때문에 가치있는 인생, 자유로운 인생,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 두려움이 계속해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면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면 두려움을 없애고 이겨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답은 너무나 당연하고 단순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믿음을 키워가면 됩니다. 그 믿음이 두려움을 없애버릴 때까지 말입니다. 실제로 답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만약 건강의 문제가 나를 두렵게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과연 얼마나 건강하면 건강문제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질까요? 또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나 나머지 모든 문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낙천적인 성격이냐 비관적인 성격이냐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두려움은 있게 마련입니다. 실제로 두려움은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게 되는 감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미래는 우리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미래는 어찌되었든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그래서 지금의 상태와 두려움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왜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왜 진짜로 예수님을 신뢰하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될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제자들에 던진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말씀 한마디로 성난 바람과 요동치는 바다도 잠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그저 예수님께 이런 능력이 있는 것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38절에서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우리가 죽게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십니까? 돌보시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돌보십니다. 이제 이 두 가지를 합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를 돌보십니까? 어떤 예수님이 우리를 돌보십니까?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예수님, 그 말씀으로 미친듯이 불어대는 바람과 삼킬듯이 달려드는 파도를 잠재우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우리들을 돌보십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의 미래를 돌보실까요, 돌보시지 않으실까요? 돌보십니다. 미래도 그 분이 돌보십니다. 그 미래에 속한 아무리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도 다 그 분이 돌보십니다. 바람도 있고 파도도 있을 수 있지만, 모두 다 주님의 손 안에 있고 또 그것을 돌보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배에 타고 계신 주님이 나의 인생의 항로를 인도하고 계시며, 그 항로에서 만나는 바람과 파도도 다 그 분의 손 안에 있음을 믿는 것, 그래서 나는 안전할 수 있고, 그래서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말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믿기 힘든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믿으면서도 이 사실은 잘 믿지 못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결국에는 여러분을 하늘나라로 인도해 가실 줄 믿습니까? 여러분의 죄와 부족함, 또 수많은 어려움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을 너끈히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이 일이 더 어려운 일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우리를 인생의 높고 거친 풍랑으로부터 지키시고 돌보시는 일이 더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일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우리 주님에게 우리를 현실의 바람과 파도로 부터 돌보시고 지켜주실 능력이 없다면, 그 분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해 가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우리 영혼의 구세주로 믿으면서 우리 현실의 주님으로 믿지 못하는 일은 사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영혼의 구원자임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그 분이 내 현실의 구원자이심을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영혼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 현실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고난과 시련을 면제시켜주시지는 않으시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넉넉한 방패와 산성, 그리고 능력있게 돌보시는 목자와 구원자가 되어 주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이 믿음이 없다면, 이 믿음을 달라고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영혼의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 이제는 주님을 나의 현실의 구원자로 믿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믿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 믿음을 갖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믿음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두려움이 없는 삶,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삶, 그래서 자유롭고 가치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현실때문에 벌벌 떠는 삶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반드시 가지셔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두려움의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모든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우리 인생의 배에 타고 계신 우리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분이 함께 계시며, 눈동자처럼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항상 현실의 주인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얼마나 복된 고백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삶입니까? 성도 여러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살게 해 주는 능력이 믿음에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고, 이 믿음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 꼭 이 믿음, 영혼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현실의 구원자로 믿는 믿음을 소유하셔서 두려움을 넘어서고 결코 넘어지지 않고 망하지 않는 든든한 삶,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