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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4.05.금요기도회 -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3(사도행전 7)


행0106to11 -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3(사도행전7).pdf


20130405D (#1).mp3.zip



* 이번 설교는 꼭 좀 한 번 들어봐 주세요. 선물이 들어 있습니다. ^^


본문 : 사도행전 1장 6-11절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쓸데 없이 그런데 관심가지지 말고 한 가지만 믿으라고, 한 가지 약속만 붙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너희가 너희 힘으로 그런 증인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성령님께서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너희의 소명을 가슴에 품고 성령충만함만을 기다리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에 대한 사도행전의 기록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셨지만 막상 제자들이 그것을 쳐다보려고 하니까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워서 보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의 구절도 이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더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흰 옷 입은 두 사람, 그러니까 천사 둘이 나타나 제자들을 나무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보이는 데서 승천하셨는데, 구름과 천사들이 보지 못하게 했다? 보여주려고 하기도 했고 보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성경은 예수님의 승천이 제자들에게 그런 사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시면서 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려고 그러셨을까요?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우리는 예수님의 성령충만에 대한 약속과 재림에 대한 약속이라는 맥락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소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제대로 해 내려면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이 땅을 자기 힘으로 하늘나라로 만들려는 노력과 또 정반대로 하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현실감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는 이 양극단을 오갔던 적이 많습니다. 어떤 종파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 하늘나라를 건설하려고 들었습니다. 또 어떤 종파들에서는 오로지 영혼구원과 저 너머에 있는 이 땅과는 전혀 상관없는 하늘나라에만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한 쪽은 하늘이 없고 나머지 한 쪽은 땅이 없습니다. 양쪽 다 결코 건강하고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루어 가야할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땅끝까지 가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영광스럽게 승천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삶이 무책임해 집니다. 비현실적이 됩니다. 그래서 천사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워진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대로 오시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이 가지고 있는 진짜 의미였습니다. 승천은 그렇게 올라가셨으니 반드시 그렇게 오실 것을 믿게 해 주시려고 보여주신 재림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그런 고난과 삶이 없는 영광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처음 오셨을 때처럼 오시지 않습니다. 그 때는 구속자가 아니라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오시기는 분명히 오시지만 그 심판을 통해 온 우주를 완전한 하늘나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크고 든든한 소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굉장한 두려움과 긴장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을 때에만 성도의 삶은 거룩하고 책임있는 삶이 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을 영광스럽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영광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영광은 이 땅에서 주님이 주신 증인으로서의 소명에 순종하며, 거룩하고 책임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힘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사는 이유도 또 모양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하늘의 영광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거룩한 삶을 향해 부르신 소명에 대한 열정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주님의 영원한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영광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승천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천사들이 제자들을 부를 때, 조금은 어색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사람들아!”라는 호칭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가 그들의 고향이었고,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의 어부들이었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그렇게 가난한 곳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좋지 않은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는 나다나엘도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을 때 대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갈릴리 지역에 속한 나사렛에서 대단한 인물이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갈릴리 지역은 굉장히 세속화되어 있었고 또 그만큼 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그들을 다른 좋은 말 다 놓아두고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갈릴리는 결코 대단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서는 대대로 선지자는 커녕 선지자의 조수 한 사람도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지역도 사람들도 별 볼일 없었고, 그렇기는 지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 온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역사상 그 어떤 훌륭한 지역, 훌륭한 가문 출신의 위인들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것은 장점이 아닙니다. 특권도 아니고 자랑거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한계이며 그 동안 그들을 묶어놓고 있었던 올가미였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도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온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증인인 갈릴리 사람들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하는 위대한 갈릴리 사람들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곧 그들은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하심 가운데 그 권능으로 살며 일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충만과 온 세상을 위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어마어마한 약속을 받은 직후에 “갈릴리 사람들아!”라는 부름을 듣게 되었습니다. 땅끝까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히 대조되는 두 가지입니다. 제자들이 그 약속을 듣고 자신들을 갈릴리 사람들로 부르는 천사들의 음성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느라고 잠시 잊었던 자신들의 원래 처지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 그래 우리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지? 우리 고향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라 저 촌구석 갈리리였지?”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래, 그런데 그런 우리가 땅끝, 그러니까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라고? 그것이 가능할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저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갈릴리 사람들아!”라는 부름이 저를 향한 부름이며 또 질문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부임하면서 우리 교회가 진짜 영적인 부흥을 경험하였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이 교회에 보내신 것은 제가 흐지부지 목회하다가 그만두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목회자도 그렇게 보내시는 법이 없으시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우리 교회의 영적인 부흥을 위한 매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저에게 맡겨진 소명인 것 또한 분명합니다. 저는 언제나 저를 향해 “유진아!”라고 부르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 부름은 하나님이 저를 부르시는 부르심이기도 하고 제가 저를 부르는 부름이기도 합니다. 


“장유진!” 이 이름 속에는 저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의 모든 과거, 그 과거 속에서의 실수와 실패, 아픔과 고통, 저의 단점과 부족함, 저의 성품... 그래서 저는 저의 이름을 들을 때, 과히 영광스러운 느낌이 아닙니다. 제게 어떤 과거가 있고, 또 지금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저를 부르십니다. “유진아!” 이 부르심은 분명히 주님의 일꾼으로의 소명입니다. 그런 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증인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저도 저를 부릅니다. “유진아!”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름은 질문입니다. “유진아! 그런데, 너로 되겠니? 네가 정말 그런 일을 위한 일꾼이 될 수 있겠니? 그런 존재와 그런 성품, 그런 단점을 가진 네가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라고 묻는 질문입니다. 실제로 이 두 가지 부름은 그래서 제 속에서 심하게 갈등을 일으킵니다. 제가 아침에 기도드릴 때 이 두 가지 부름은 제 속에서 계속해서 싸움을 벌입니다. “되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저 자신의 질문이 싸웁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저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의 질문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쪽으로 다가 섭니다. 물론 얼마나 부족한 줄 압니다. 얼마나 형편없는 줄 압니다. 객관적으로는 지금 상태만 본다면 우리교회를 영적으로 충만하게 회복시키는 도우미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저는 저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리고는 그 일을 저에게 맡겨달라고 감히 말씀드리곤 합니다. 


갈릴리의 어부들,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은 결코 땅끝까지 가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퍼뜨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아상도 좋지 않구요. 기질도 좋지 않습니다. 능력도 없구요. 그렇다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죠. 특별히 똑똑한 것도 아니구요. 그러나, 그들을 향해 “갈릴리 어부들아!”라고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래. 너희들은 갈릴리의 어부들이다. 보잘 것 없고, 거칠고 겁많고 비겁하기까지 한 그런 사람들이다. 지금은 네 자신에게까지 완전히 실망해 있겠지. 그러나 내가 너희를 부른다. 내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 낚는 어부로 너희를 부른다.”

 

제가 “갈릴리 사람들아!”라고 부르는 부름을 들을 때, 그 위로 제 이름과 더불어 또 하나의 이름이 겹쳐서 들려왔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우리교회의 이름이었습니다.  “광현교회 사람들아!” 그 부르심 안에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도 들어 있었습니다. “광현교회 사람들아!”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의 이 이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렇게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때, 여러분은 이 부름을 어떻게 들으십니까? 물론 우리 교회는 작습니다. 우리 권사님들의 표현대로 약한 교회입니다. 아직은 달라져야 할 부분도 많고 회복되어져야 할 부분도 많은 어찌보면 갈릴리 사람들같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광현교회 사람들아!”하고 부르십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우리들은 이 부르심 속에서 우리의 두 가지 이름을 듣게 됩니다. 우리의 과거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이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우리의 이름 말입니다. 그 둘 중에 어떤 이름에 귀를 기울이고 어떤 부름에 응답할 것인가는 우리가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이름 속에는 이미 세상을 복음으로 뒤흔들 열 두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광현교회라는 우리의 이름 속에는 그렇게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우리 모두의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는 갈릴리 사람들이 아닌 성령충만한 갈릴리 사람들, 과거나 현재의 우리가 아닌 성령충만한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제자들을,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내가 불러온 나의 이름, 우리가 불러온 우리의 이름에 갇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머리 속에 있는 나의 이름, 우리 머리 속에 있는 광현교회라는 우리의 이름을 지우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대로의 이름을 다시 새겨넣어야 합니다.성령충만한 장유진, 성령충만한 성우경, 성령충만한 노태훈, 성령충만한 한태자, 성령충만한 성순원, 성령충만한 김인석, 성령충만한 김운이, 성령충만한 김효순,  성령충만한 서옥희, 성령충만한 하정순, 성령충만한 정연옥, 성령충만한 공두련, 성령충만한 정태자, 성령충만한 조해숙, 성령충만한 김현우, 성령충만한 하신영, 성령충만한 정대로, 성령충만한 이옥순, 성령충만한 김지영,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한 우리 광현교회... 옛 이름을 지우고 이 이름을 다시 새겨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이름에만 대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대로 우리를 만들어 주실 것을 믿으면서 그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지금의 너희는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그 달라진 너희를 보고서 너희를 부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고, 우리 힘으로 일하며, 우리 힘으로 교회를 가꿔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합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나의 예루살렘, 나의 유다, 나의 사마리아를 넘어서 우리의 땅끝에서 권능있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비록 우리의 이름은 갈릴리 사람들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우리는 그 부르심 속에서 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영광스러운 어부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 이름이 아니라 성령충만한 내 이름을 들어야 합니다. 약속은 주어졌으니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고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응답하며 겸손하게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오늘 여기까지의 나 됨의 이유가 나에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성령충만해진다면, 그리고 성령님께 우리를 온통 내맡긴다면 우리의 미래, 우리 교회의 미래가 얼마나 놀랍게 변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만유보다 크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말입니다. 


설교준비를 하는 내내 제 입에 맴돌며 제 마음을 적셔 주었던 찬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불러보려고 합니다. 박종호 집사님이 부른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노래입니다. 


(프리젠테이션을 보면서 함께 부른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품고 있지만 땅에 발을 딛고서 소명에 응답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부르심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충만함을 허락해 주실 것이고, 그러면 그 소명을 충실히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과 생각을 지경을 넓히시고 성령충만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광현교회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