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838to1901 -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요한114).pdf
본 문 : 요한복음 18장 38-19장 1절
마지 못해 예수님을 심문하고 난 빌라도는 아무래도 예수님을 로마법상으로는 그 어떤 법으로도 처벌할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시는 나라는 전혀 로마에 위협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관정 밖으로 나와서 무언가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무죄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주장했다고 고소한 죄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스스럼 없이 사용하였던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이 사람을 그렇게 고발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은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으며, 전혀 로마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그렇다고 해서 그냥 대놓고 “예수는 무죄다”라고 이야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유대인들의 지도자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 지니까요. 그래서 그 뒤에 넌지시 유월절 특사로 예수님을 석방해 주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노발대발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말합니다. 바라바는 우리 성경에는 강도로 되어 있지만, 그는 보통 강도가 아닙니다. 그는 정치범, 그러니까 테러범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에 정치범들만 달리는 형틀이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보통 강도가 아니라 테러범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로마법을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도 정치범으로 처형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으로 만들려고 그렇게 했지만 말입니다. 상황적으로만 보면 빌라도는 아무 죄도 없고, 게다가 정치적으로 로마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아무 죄도, 아무런 위험성도 없는 예수님이 대신 로마에게 정치적인 위협이 되는 바라바를 놓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유대인의 관계 속에서 너무 깊숙히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아무 죄도 없다”, “유대인의 왕이다” 그리고 “이 왕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인 바라바를 살리고 대신 죽는다”, 또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기 왕의 죽음을 필요로 한다”, “그 죽음이 자신들을 위한 죽음인데도 그 왕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다”, “그리고 그 왕은 아무 죄도 없이 채찍질을 당한다.” 이것은 이 짧은 구절들 속에 담긴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전 생애와 우리를 위한 대속적 죽음을 가장 짧게 요약한 듯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습니다. 죄하고는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죄가 없으셨을 뿐 아니라 그 분은 온 우주의 왕이셨습니다. 참으로 유대인의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강도처럼, 테러범처럼 포악한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대신 목숨을 내어주고 살리는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실은 그 죽음을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죽음에 내어 던져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예수님께서 저지른 악행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53장 4절과 5절에서 그것에 대해서 마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너무도 생생하게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러나 이사야가 환상을 보고 예언한 내용은 실은 훨씬 더 복잡한 상황, 훨씬 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그저 장난 반 비아냥 반 사용합니다.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하지만 대신 정치적인 관계 때문에 오히려 절대로 놓아주어서는 안되는 바라바를 놓아주게 됩니다. 그래서 죽어야 할 죄인은 풀려나고 풀려나야 할 의인이 붙잡혀 죽음을 당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당사자들이 예언된 자신들의 왕,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서 대속적인 죽음을 죽어주어야 할 메시야를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모두가 다 너무나 엄청난 부조리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부조리하다고 하더라도 이것만큼 부조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나게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그 억울함을 당하시면서 악인들의 입술을 통해 당신은 죄가 없는 유월절 어린양이시라는 사실과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며 또 악한 죄인을 위해서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는 분이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채찍에 맞으시며 죽음을 당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유월절 어린양되심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메시야 되심을 드러냈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죄 가운데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말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 삶의 한 부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나 예수님의 구원자되심을 드러내는 통로가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말입니다. 아마 저나 여러분이나 이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순간 이미 그런 역할을 해 온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사용하셔서 그렇게 쓰시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악함이 아니라 선함이, 우리의 선한 생활이 주님의 그런 도구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과 성품의 밝은 부분이 주님의 영광과 진리를 드러내는 통로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 주님이 그런 부조리 속에서 그토록 명확하게 당신을 드러내셨다면, 우리가 삶의 부조리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보이는 태도들을 통해서도 주님은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무조건 참고 당하고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우리의 삶이 때로는 더욱 더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런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반응을 찾으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어떤 모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선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날 때, 하나님도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들 또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하나님을 위한 최선을 찾으셔서 하나님께도 또 우리 자신에게도 가장 유익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