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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4.25.새벽예배 - 너는 나를 따르라(요한복음 127)

요2120to23 - 너는 나를 따르라(요한12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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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요한복음 21장 20-2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은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감언이설로 그들을 설득하여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들을 향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 한 마디로 자신들이 하던 일이나 가족마저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부르심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보고 들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과 가르침이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설득되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며, 제자가 사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도란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 모두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예수님의 제자인 저와 여러분이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던 삶”이 “남이 띠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는 누군가를 따르려면 나 스스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예수님을 신앙하려는 사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여기에 맞추어 가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그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예수님은 다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처음 베드로를 만났을 때 하셨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반복이었지만, 이 두 번째 부르심의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더 온전하고 성숙한 제자로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자기 말고 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도 자기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를 발견한 베드로는 그 제자의 미래가 궁금해 졌습니다.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자기는 이제 “남이 띠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런 죽음을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는 어떻게 됩니까? 그게 궁금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충분히 궁금할 수 있고, 또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대신 꾸짖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제자들은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각자 부르심이 다르고 그래서 가야할 길과 도착해야할 목적지가 다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교훈은 제자로서의 나를 향한 부르심과 나의 가는 길, 그리고 나의 목적지는 주님께서 나의 삶에 부여하신 것이며, 우리는 그것만 충실히 따르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은 우리 자신도 모릅니다. 우리는 제자로서, 성도로서의 삶이라는 큰 틀 속에 머물면서 신실하게 그 때, 그 때 인도하시는 주님의 이끄심에 최선을 다해서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삶은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향한 인생의 계획과 인도하심은 그 사람과 주님의 일입니다. 내가 알려고 해서도 안되고, 끼어들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성도들 중에는 신앙적인 지도라는 이름 아래 자꾸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어서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도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인생의 인도자는 주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주님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을 내 곁에 두신 것은 서로 돕고 섬김으로써 모두가 제자로서의 삶을 더 온전히 사는 유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지, 서로를 향한 지나친 관심과 간섭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제자로서의 삶을 생각할 때에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자도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가? 얼마나 잘 따르고, 못 따르는가? 그가 어떤 복을 누리며 그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얼마나 제대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함께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면 안되겠지만, 그 관심은 그들을 향한 기도와 섬김으로 이어질 때만 의미있는 관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그 관심은 자칫 주님과 그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고, 또 비교를 통한 우월감과 열등감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의 신앙생활은 비교와 경쟁으로 얼룩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관계는 더 이상 기도와 섬김의 관계로 남아있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님만 따르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야 주님께서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알 필요가 없으며 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겠다”는 말로 와전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주님은 “만약에 그 사람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게 하실지라도 그게 베드로 너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이 말씀이 “주님이 저 사람을 주님 오실 때까지 살려두신대.”라는 완전히 다른 말로 와전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낭설의 진원지가 어디일까요?  요한은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라고 말함으로써 이 일로 한 사람이 비난 받는 것을 피하게 하려 했지만, 주님의 말씀을 잘못 퍼뜨리는 것은 베드로였다고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자의 미래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졌던 사람이 다름 아닌 베드로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제 멋대로 해석하고, 그렇게 해석한 말씀을 틀림없는 주님의 뜻인 양, 여기 저기 퍼뜨렸던 것입니다. 


미성숙한 신앙의 첫번째 특징이 자신의 신앙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갖는 것이라면, 미성숙한 신앙의 두번째 특징은 자기 관심사에 빠져서 말씀을 오해하며, 그렇게 오해된 말씀을 진리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꾸짖으시는 주님의 말씀을 그 제자의 미래에 대한 주님의 말씀으로 오해했고, 그것을 마치 주님의 말씀인 양 떠들고 다녔던 것입니다.  어떤 신앙인이 입만 열면, 예수를 잘 믿었더니, 이런 복을 받았다, 저런 복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기를 즐기는 이유는 신앙인으로서의 그 사람의 주된 관심사가 복을 받는 것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 모든 이유를 자신의 신앙생활로 돌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신앙인이 항상 거룩함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그의 신앙적인 관심은 거룩함과 하나님의 영광에 묶여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증거일 것입니다. 


사람의 관심사는 그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고, 그 생각은 그 사람의 말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의 주된 관심이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사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의 방향과 색깔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신앙인으로서의 여러분은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살고 계십니까? 신앙인으로써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방향과 옳고 그름을 결정합니다. 신앙인으로써 가져야 할 올바른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도 올바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이 주님의 말씀일지라도 우리의 관심사라는 렌즈를 통해서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부분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누구나 결론 부분에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게 마련입니다.  왜 주님께서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이 이야기들을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놓으셨을까요?  믿음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이야기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결론으로 삼을 만큼 말입니다. 


제자도는, 그리고 신앙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내 중심이 어떠하냐? 나는 지금 제 길을 가고 있느냐? 나는 지금 점점 온전한 제자가 되어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가 나보다 더 많은 복을 받았느냐? 누가 교회에서 더 사랑을 받느냐? 누가 나보다 더 대접을 받느냐? 하는 것은 내가 주님을 어떻게 따르느냐 하는 문제와는 하등의 상관도 없습니다.  봐야 할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 속사람이며, 내 삶의 모습입니다. 또한 제자도는 바른 관심사의 문제입니다. 성도라면 제자라면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써의 올바른 신앙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올바른 관심사만이 올바른 제자도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올바른 제자도를 가질 때만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주님의 영광과 거룩한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볼 줄 아는 성숙한 눈을 가진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의 일그러진 관심사가 아니라 주님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올바른 마음을 가진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성도요, 제자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내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