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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5.02.새벽예배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요한일서4)


요일0201to02-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요일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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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요한일서 2장 1-2절


잠시 어제 새벽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요한사도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의롭다하심을 얻어도, 그리고 아무리 빛 가운데로 다닌다고 해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가 있으며, 그래서 여전히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해결책으로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성도들이 자신들이 얻은 의롭다하심을 오해해서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또 하나님과 성경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교만하고 악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들려준 이야기였지만,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더 죄를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래서 더 많은 죄를 지을 수도 있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죄를 지으면 자백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용서받고 다시 의로워질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병에 걸려 있다는 것과 언제든지 그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용서라는 약이 있다는 것을 동시에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오해하면 “그래? 그렇다면 어차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겠네? 그리고 죄를 지으면 용서만 빌면 되겠네?”라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전도자들이나 부흥사들이 전한 가볍고 부담없는 복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와 용서를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한 번 받은 용서는 영원합니다. 과거에 지은 죄도, 미래에 지은 죄도 다 용서되었습니다. 완전히 용서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다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빠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죄의 무거움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과 절실함이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죄를 짓는다고 해도 죄는 여전히 무겁고 심각한 것입니다. 또 그러한 우리에게 무한한 용서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고 해서 그 한 번 한 번의 기회가 가지는 소중함과 절실함이 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죄가 용서되어도, 단 하나의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하나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고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단 한 번의  죄도, 그리고 단 한 번의 용서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죄 용서의 약속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이유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으니 죄를 짓자. 그리고 용서를 빌자’라는 결론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죄와 싸우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어둠이 아니라 빛 가운데서 행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빛이시고 어둠이 전혀 없으셔서 어둠을 싫어하시고 어둠에 속한 일들을 용납하지 못하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은 후에도 여전히 죄를 가지고 있고 또 완전히 죄를 떠날 수 없는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다시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사귐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것을 알고 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는 결코 내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해서, 그리고 항상 죄용서의 은혜가 주어져 있다고 해서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또 죄를 함부로 짓지 못합니다. 오히려 내 죄성이, 그리고 나의 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자신과의 사귐을 깨뜨리게 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셨듯이 스스로도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다룹니다. 질 때 지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또 이기려고 애씁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그 안에 죄를 가지고 있고 죄를 범할 수 밖에 없으며 그래서 다시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들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 진리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현실과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이해할 때 그는 죄를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빛가운데로 행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우리에게는 항상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우리를 변호하시는 보혜사가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죄는 사실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하심 덕분에 용서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 변호해 주시기 때문에 용서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직접 보시려고 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서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해서, 아직 완성되지 못한 우리의 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손과 발에 난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하나님 앞에 보이시며 죽기까지 보이셨던 순종을 통해 이루신 의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그래도 저들은 나를 믿습니다. 제가 저의 목숨을 화목제물로 내어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드린 저들은 그래도 저를 믿습니다. 저의 의가 완전하다면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 상상 속의 이야기이는 하지만 저는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라는 구절은 하늘 보좌에서 날마다, 아니 매순간 우리가 죄를 범하고 또 용서를 구할 때마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하시는 은혜가 우리를 죄에 대해서 태만하고 뻔뻔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그 은혜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용서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화목제물로 내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며, 그 분이 지금도 하늘 보좌 옆에서 우리들을 편드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중보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눈이 십자가에 고정될 때, 우리에게 부어지는 다함없는 용서의 은혜는 우리를 죄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하며 그 죄와 더 열심히 싸우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참된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스스로 화목제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우리의 용서가 되었고 지금도 우리를 위한 용서가 되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무한한 용서의 은혜에 힘입어 죄와 싸우시고, 또 죄를 이기며 빛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