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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5.03. 금요기도회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2(사도행전11)


행0201to13 -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2(사도행전11).pdf



본문 : 사도행전 2장 1-13절


프로토타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공업이나 과학분야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인데요, 주로 처음 만들어진 것을 이렇게 부릅니다. 우리 말로는 ‘원형’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프로토타입이 중요한 것은 앞으로 그것을 통해서 등장하게 될 제품이나 완성품들이 어떤 모양이 될 것인가, 어떤 기능을 가지게 될 것인가, 어디에 어떻게 쓰여지게 될 것인가하는 방향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던 해의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임했던 첫번째 성령충만은 그 자체로도 너무 놀랍고 은혜로운 사건이었지만, 그 날 이후 온 세상 곳곳에 임할 성령충만의 프로토타입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오늘 예수를 믿으며 성령충만을 기대하는 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구체적인 모습이나 세부적인 목적은 조금씩 다를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만 보아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커다란 덩어리에서 본다면 본문의 성령충만에 대한 기록은 성령충만함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만들어 주며, 또 성령충만해야 하는 우리를 위한 길안내자의 역할도 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의 그림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그 날 거기 임했던 그 놀라운 성령충만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본문을 통해 확신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충만해지는 것을 원하시며 그래서 성령충만함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성령님의 추수날이었고, 그래서 첫번 성도들이 성령충만을 구하며 성령님을 모실 준비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성령충만함을 주셨습니다. 그들을 천국의 알곡으로 하늘곳간에 거두어 들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우리의 오순절이 있을까요? 우리가 그 때까지 성령님을 모실 준비를 한다면 그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허락해 주실까요? 만약 우리에게 이 믿음, 이 확신, 그리고 이 은혜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우리는 그것부터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무관심과 좌절감은 우리가 성령충만을 구할 때, 싸워 이겨야 할 첫번째 가장 커다란 대적입니다. ‘되겠느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정말 그렇게 해 주시겠느냐? 그냥 이대로 가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라는 등등의 우리를 묶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우리가 제일 위험하게 생각하고 또 반드시 처리해야할 우리영혼의 대적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이런 생각과 감정은 항상 끼어들어 오기 마련입니다. 저도 항상 이런 생각이나 감정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오늘만해도 하루 종일 싸운 것 같습니다. 싸울수록 싸움이 치열해 지지만 언젠가는 결정적으로 그 불신앙의 허리를 꺽어놓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여러가지 면에서 그래도 합격점을 주실만할 때, 성령을 선물로 충만하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이런 저런 생각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기대하면서 기도하면 됩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의 무관심과 영적인 좌절감을 처리해가면서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첫번째 오늘 본문은 그 날 그 곳에 임했던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성령님은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이렇게도 저렇게도 마음대로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마치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듯이 그렇게 찾아오실 수도 있습니다. 비둘기처럼 평화롭게 내려앉을 수도 있구요. 그런데 그 날 성령님은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로 오셨습니다. 마치 돌풍이 부는 것같은 큰 소리, 태풍이 부는 것같은 그런 소리로 임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특별한 모습이나 현상으로 임하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특별하게 전달하시고자 하시는 메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시지만 또한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숨결이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날 하나님의 숨결은 아주 급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강했습니다. 6절에 보면 그 소리를 듣고 몇 첫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 정도였으니 그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 거기모인였던 성도들을 참 생명으로 되살리는 일에는 그만큼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필요했다는 뜻이고, 또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만큼 급하신 마음이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잔잔한 호수같이 임하시는 성령님도 필요하고, 비둘기처럼 잔잔하게 임하시는 성령님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급하고 강한 바람이신 성령님입니다. 저는 그렇게 진단하고 또 그렇게 믿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실로 살아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넘치는 생명으로 능력있게 살아있습니까? 내 영혼이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참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저 자신도 아직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굉장히 고민입니다. 내가 이런 상태인데 과연 내가 우리 교회를 제대로 돌보고 목회할 수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더 간절해지고 더 절실하게 기도하게 되지만 저 스스로에 대해서 너무 안타깝고 급한 마음이 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다른 짐승들처럼 그저 명령만으로 생명을 주실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코에 숨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성경은 그제서야  사람이 ‘생령’ 그러니까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인간은 그 속에 하나님의 숨결,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머물러 계실 때, 비로소 온전히 살아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온전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진짜로 살아있는 사람들로 만드는데 있어서 마음이 굉장히 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시라도 빨리 성령님을 부어 주시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해서 한시라도 빨리 우리가 진실로 능력있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억지로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믿고 기다리면서 기도하라고, 기도로 세상을 따르던 마음을 접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을 준비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하나님철머 성령충만을 향한 급한 마음을 지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감미로운 미풍이 아니라 강한 바람입니다. 우리를 되살리고, 또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되려면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과 성령님의 강한 임재가 필요합니다. 제가 신앙의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발견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 분들은 모두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든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였으며 그리고 그러한 성령님의 임재가운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했고,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전도자였던 D.L.무디는 하나님께 강력한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갈 때, 하나님은 그의 소원대로 그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셨습니다. 그 때 임한 은혜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그는 마치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되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 그만, 그만, 이제 됐습니다. 그만 주셔도 됩니다.” 그런 그가 영국으로 건너갔을 때, 거기서는 대대적인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은혜를 한 번 받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우리도 능력있고 견고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꼭 필요합니다. 아니, 더 강력한 성령님의 임재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은 그 때의 성도들보다, 무디보다 훨씬 더 매마른 심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이미 촉촉히 젖어있는 땅은 가랑비로도 충분하지만 완전히 매말라버린 땅에는 가랑비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 땅을 적시고 또 살아있는 생명의 땅이 되게 하려면 콸콸 쏟아부어주시는 강력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강력한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충만을 그저 적당한 수준에서 이해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 날 성령님께서 그들이 모여있던 그 집안을 충만하게 채우셨다고 말씀합니다. 강하고 충만한 성령님, 바로 이것이 그 날 그들이 모였던 집안에 임하셨던 성령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받되 적당히 받아서는 안됩니다.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는 성령님의 강하고 충만하신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우시고, 우리가 모인 이 공간까지 점령하시도록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러한 성령의 임재가 꼭 필요하다면,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성령님을 구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대충 구할 수가 없습니다. 간절하게 구하고 절실하게 구해야만 합니다. 처음 성도들처럼 모일 때마다 오로지 그것을 위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강하고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성령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마땅한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할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강하게 임하실 것이고, 그렇게 우리를 충만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그 날 성령님은 불의 혀같이 임하셨습니다. 성경이 불을 이야기할 때는 항상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정결케 하는 능력입니다. 더러운 것을 태워서 깨끗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불의 역할입니다.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에 제물을 불로 태우는 것은 그렇게 해야 죄가 완전히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자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단의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을 지져 주셨는데, 이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이사야의 입술을 그렇게 깨끗하게 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처음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부어지시던 그 날, 그들에게 불의 혀로 임하셨던 것은 그들의 죄를 태우시고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그들이 성령충만을 덧입은 후, 그들이 했던 역할은 복음전파자의 역할이었는데, 이것을 위해서 그들이 성결해지고 거룩해지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 사람은 거룩해지기 시작하고 또 계속해서 거룩해져 갑니다. 성결해지기 시작하고 또 계속해서 성결해 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주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성결해 질 때, 비로소 성령님은 우리를 통해서 더 능력있게 역사하시고, 또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기대해야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면 내가 거룩해지고 순결해지며 가장 나다운 나,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내가 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성령충만을 기도해야 하며 또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는 4절에 집중해야 합니다.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다 성령충만함을 받고...”, “그들이 다 성령충만함을 받고...”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그 날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충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성령충만의 은혜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성령충만함이 항상 이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항상 한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동시에 성령충만함을 받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이 알려주는 분명한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없이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오래된 소원을 이루시는 일이고 또 하늘곡간에 알곡을 모아 들이시는 일입니다. 또 아들을 내어주고 다시 찾은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령충만함으로 우리를 차별하실 리는 없습니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주지 않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내가 구해도 주지 않으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으시다면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라는 구절을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특별히 ‘다’라는 말에 동그라미를 쳐 놓으시기 바랍니다. 거기 모인 모든 성도들, 그 동안 성령충만함을 기다리며 간구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성령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충만을 주셨다는 것은 그들 모두에게 성령충만함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그 귀하신 성령님을 아무에게나 부어주시지 않으시니까요. 성도들 중에서 성령충만하지 않아도 될 사람, 그런 상태로 충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다운 자녀,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 능력있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절대로 스스로를 성령충만의 은혜에서 제외하시키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는 선물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을 돌보는 목사인 제가 성령충만한 목사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해 주십시오. 여기 이 장목사가 정말 성령님으로 철철 흘러넘치는 그런 목회자가 되도록 항상 기도해 주십시오. 저를 위해서 기도하실 때, 제가 나는 죽고 성령님으로 사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그것으로 족할까요? 그렇게 해서 저만 성령충만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여러분도,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도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성령충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의 성령충만함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각 사람 위에 임하게 하셨던 하나님, 그래서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도록 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우리의 영적인 현실입니다. 


첫번 오순절날 성도들이 모였던 곳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영은 약속대로 오신 영이었습니다. 그 분은 성도들을 향한 급하디 급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강력하게 임하신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그 영은 성도들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는 영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거기 모여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며 준비했던 모든 사람에게 빠짐없이 임하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함께 전심으로 구해야할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령님을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속히 보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