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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5.13.새벽예배 - 우리가 그러하니라(요한일서 11)


요일0301to03- 우리가 그러하니라(요일11).pdf


20130513D (#1).mp3.zip




  문 : 요한일서 3장 1-3절


가끔씩 굉장한 역경이나 좌절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가장 힘들고 절망스러운 순간에 부모님의 자신을 향한 사랑이 떠올라 포기하지 않고 참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을 드물지 않게 듣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사람들에게 자신이 크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던 기억은 그 사람을 가장 힘있게 지켜주는 방패가 되고 또 그 사람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거나 포기하는 일을 막아주는 힘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에 이런 능력이 있는 이유는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비로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인식하게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정말 큰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결국 사랑을 받는다는 확신만 있으면 자신을 지켜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의 사랑에만 이런 능력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런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 안에도 이런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에 다른 사람을 지켜주고 다시 힘을 주는 능력이 있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림자나 표지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완전하지 못한 사랑 속에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하고 다함이 없는 사랑을 받는다면 그 사랑 안에는 어떤 능력이 있을지 생각해 보라는 하나님의 메세지를 담은 표지판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3장 1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사도 요한은 마치 굉장히 비싸고 귀한 장난감을 손에 쥐고 “너, 이거 있어?”라고 자랑하는 아이같습니다. 굉장히 흥분해 있고 또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이며,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그 기적과 같은 사랑을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였기에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사랑을 받았으며 또 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마다 이렇게 흥분하면서 자랑스러워 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 십자가 위에서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던 그 사랑. 그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사도 요한을 진실로 기쁘고 자랑스럽게 했던 것은 그 사랑이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만 그런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처럼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그와 똑같은 사랑을 똑같은 이유로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기도회 때, 우리는 “나 가진 제물 없으나...”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찬양의 가사는 송명희라는 우리 식대로 표현하면 중증 장애우가 쓴 시입니다. 그는 그가 고백한 대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진 제물도 없고, 건강도 없고, 지식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자신은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고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참 공평한 분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어떤 찬양컨서트에 갔다가 이 분이 무대에 직접 나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이 분은 거기 모였던 청중들을 굉장히 부끄럽게 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을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그 당당함, 그 기쁨... 정말 가사대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고 멋이 있는지... 어찌보면 참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분이 저희들을 혼낸 내용은 “왜 걱정하냐, 왜 근심하며, 왜 두려워하냐, 왜 기가 죽어있느냐, 예수님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있는데 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분은 하나님을 공평한 분이라고 노래했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편애하시는 분이십니다. 정말 중요한 것, 정말 능력있는 것, 정말 만족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만 주시니까요.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들을 통해 한량없이 쏟아부어 주시는 사랑,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에게만 알게 해 주시니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도대체 하나님의 어떤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던 그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는 지금 그 사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흥분하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며, 그 사랑이 나를 부요케 하며, 그 사랑이 나를 능력있게 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사도 요한처럼 그 사랑만으로도 “나 이런 사랑을 받고 있어.”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랑만으로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라고, 아니 나를 편애하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랑이 지금 나를 지켜주는 능력이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이것 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섭섭해 하실 것입니다. 이것말고도 우리에게는 정말 우리를 기대하게 하고 흥분하게 하는 은혜가 또 있습니다. 사실 그 사랑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그 불가사의한 사랑이 현재의 은혜라면 2절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소망, 그러니까 미래의 우리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는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덕분에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들은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우리들은 그 사랑 덕분에 얼마나 많은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극복해 왔으며 또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물론 부족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속사람을 지닌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분명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누리는 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하늘에서 취하게 될 모습에 비하면 정말 맛만 본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로서는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취하게 될 모습을 예상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울지, 얼마나 완전할지, 얼마나 영광스러울지 추측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날 우리가 하늘에서 가지게 될 모습은 우리가 그 나라에 가서야 보게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같은 그런 영광스럽고 온전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기대하는 것은 그 나라가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헤어짐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그런 나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은 그 나라에 가서야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영광스러운 우리의 형상, 예수님과 같은 아름다운 형상을 되찾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그 나라에 간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 정말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생각하는것만을도 정말 빨리 그 나라에게 가고 싶어서 조급증이 나지 않습니까? 이 허울많고 부족하며,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우리의 지금 모습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빛나고 영광스러운 형상을 덧입게 된다니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성도들에게는 바로 이 엄청난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현실보다 더 확실한 소망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마 어마한 하나님의 사랑, 헤아릴 길도 없이 쏟아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요한의 표현대로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귀하고 가치있는 사람인지 몰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 가지고 속상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내 가치를 증명하자고 무리하거나 애끓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이 사랑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을 정말 흥분될만큼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차기 대통령의 자리를 예약한 것이나 재벌 총수자리를 약속받은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입니다. 자다가도 실실 웃을만큼 좋은 일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따라 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러하니라”, “우리가 그러하니라” 할렐루야. 아멘. 우리는 누가 뭐래도 이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이 소망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으로써 자존심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 이런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거나 가치없게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흐지부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아서도 안됩니다. 그 사랑을 입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자신을 지켜야 하며, 그런 영광스럽고 고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거룩한 소망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마땅한 모습이며, 또 스스로도 원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유혹이 강하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대략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이 사랑과 이 소망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내가 누군데”, “내가 어떤 사람인데”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과 소망이 여러분을 죄와 유혹으로부터 지켜내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능력이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잊지 않는 은혜 가운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