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0312to15- 가인같이 하지 말라(요일14).pdf
본 문 : 요한일서 3장 12-15절
성도들은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복음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 안에 하나님을 닮은 선한 성품의 씨앗을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할 때는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도들의 선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선과 같을 때도 있지만 다를 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무엇이 선한 것인가를 결정할 때도 하나님이라는 기준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는 사람을 위해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도 그것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거나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과 다르면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 때문에 갈등이 되고 또 오해를 받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결코 이것을 어기면서 까지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이것은 좀 더 일반적인 것인데, 성경이 말하는 선이란 ‘어떤 사람의 존재에 유익하고 그 사람의 생명과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존재’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본질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선을 행할 때, 그 사람이 당장의 눈 앞에서의 잘 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 사람에게 선한 것을 분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그것이 그 사람에게 해가 되고 손해가 될 수 있어도 결국 그 사람이 진짜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는 사탕을 너무 너무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탕을 무한정으로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가 만족해하고 행복해 할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그것이 그 아이에게 해가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이란 바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선의 반대는 악입니다. 그래서 악이란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인 동시에, 그것이 그렇기 때문에 결국 어떤 사람의 존재에 해를 입히고 또 어떤 사람의 생명과 삶에서 풍성함을 빼앗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선과 악은 바로 이런 점에서 정반대가 됩니다. 14절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선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생명에 속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생명에 속해 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미움은 어떻습니까? 미움은 자연히 그 반대가 됩니다. 미움은 악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미워하는 사람들은 아직 생명으로 넘어온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사망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15절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물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형제를 미워하고 멸시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15절 말씀은 전혀 억지나 과장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15절은 미워하는 것이 곧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이 구절이 이야기하는 바는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어쨋든 그 사람의 생명의 풍성함을 헤치는 일이며, 그래서 미움은 사람에게서 생명을 빼앗는 살인과 같은 종류의 죄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경우에 처럼, 그 미움이 지나치면 결국 진짜로 사람을 죽이게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속에 살인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어쨋든 그 사람의 생명을 해를 가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움은 생명에 속한 일이 아니라, 죽음에 속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생명인 영생을 얻은 사람은 사람을 계속해서, 그리고 지나치게, 더욱이 가인처럼 이상한 이유로는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생명에 속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죽음에 속한 일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성도가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지나치게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이 미움의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며, 다시 사랑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영생에 속한 자로서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고방식으로는 미워할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되어지고 있습니다. 멸시를 받을만한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오히려 멋진 일이며 의무처럼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오늘날 성도들은 미움의 문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미움이 자신의 영생과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우리 구원을 위한 아주 중요한 구절이니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를 구원얻게 하는 믿음이 어떤 종류인가 하면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맞지만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려면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증명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려면,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되려면 그 믿음은 반드시 사랑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 속에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가인같이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는 미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선이 아니라 악에 속한 자였고, 하나님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저처럼 사랑하는 일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 아픈 말씀이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해 보아도 오늘 본문 말씀을 성경적으로 지금껏 말씀드린 것과 다르게 생각하고 이해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인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는 사랑이 아니라 미움에 속해 있었고, 그래서 결국 그 미움을 동생을 죽이는 일로 이어지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에게 속한 자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불쑥 불쑥 파고드는 미움과 멸시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움은 당연한 것이고, 멸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이 우리의 소속을 결정하고 드러낼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사랑이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주님의 피할 수 없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이미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랑의 씨앗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선한 일에 항상 도우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사랑합시다. 서로를 더 사랑하십시다.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을 옮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하고 또 확신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을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하려고 결단하고 애쓴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부족함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열매인 영생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영생과 영생의 확신을 소유하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