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5.17.새벽기도회 -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15)

요일0316to20-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15).pdf


20130517D (#1).mp3.zip




  문 : 요한일서 3장 16-20절


사도 요한은 3장 1절에서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지를 생각하며 다시 그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과 믿음을 돌이킬 것을 권면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적어도 제가 신앙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며, 또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 나를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서 쏟아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망각하고 그 사랑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묵상하며, 또 우리가 여전히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벼운 멍에들을 가볍게 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며, 그 사랑이 우리를 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 사랑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진단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볼 때, 결코 외형의 문제나 행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은 진심의 문제이며 또 사랑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되어지고 그래서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적인 요구들도 전혀 달른 의미로 생각하게 됩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일이 되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듣는 성경의 명령 중에 “사랑하라”는 명령만큼 부담스러운 명령은 없을 것입니다. 이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되고 감동되기 전에 이 명령은 그저 우리에게 부담스럽게만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사랑에 설득되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와닿지 않습니다. 결코 피하고 싶은 명령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지만 부족해서 온전히 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도다” 이 구절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사랑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누누히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도록 내어 주신 것, 그리고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싫다고 스스로 하나님되어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 세상을 망가뜨린 주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형편없는 피조물인 우리들을 그렇게 사랑하시기 위해서 창조주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상상조차 하기 힘든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았으며, 지금도 이 사랑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에 설득되고 그래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어디서건 사랑에 대해서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목숨을 거신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작은 생명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이 댓가로 치러진 그런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결코 우리 옆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줄 만큼 성도들을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목숨을 내어주신 사랑 덕분에 다시 살았고 영생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만큼은 당연한 결론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사랑에 속깊은 설득되었다면, 우리는 결코 말로만 사랑하는 자리에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로만 하고 마음도 없고 행동도 없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서 갑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 때가 올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를 듣는다고 바로 그렇게 반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을 말과 혀에만 머물러 두지 않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표현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설득되었다면, 그 사랑 덕분에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그 사람 안에는 그 사랑이 씨앗이 되어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을 목표로 해야 하지만 완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은 결코 완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 속에는 행함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며 우리의 진심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뜻합니다. 진실함이란 거짓 없이 마음을 담으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랑 속에 이 두 가지만 있다면 우리의 사랑은 부족해도 괜챦습니다. 조금 흠이 있어도 좋습니다. 


사도 요한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게세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완전히 순수한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습니까? 부족하다 고백하면 됩니다. 완전치 못하다고 고백하면 됩니다. 그러면 설혹 우리가 행한 사랑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거리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진심과 그 진심에서 나온 애씀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 부족한 사랑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만날 때, 사랑할 수 없을 때... 그 때는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에서 쏟아부으신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에서 사랑할 힘을 얻으시고 사랑할 마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부족해도 좋습니다. 완전치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우리 사랑은 그럴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진심만큼은 생략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려는 마음담긴 애씀만큼은 없어서는 안됩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심과 그 진심에서 나온 행함을 보시고 부족한 우리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의 사랑으로 설득되어 사랑하고 싶어지고 사랑을 향해 간절한 마음이 되는 은혜를 누리셔서 행함과 진심으로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