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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5.22. 새벽예배 -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한일서 18)


요일0407to10-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요일1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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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요한일서 4장 7-10절


일반적인 경우에 사람은 부모에게서 태어남으로써 그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그 때부터는 그 부모의 양육을 받으며 그 부모의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해 갑니다. 그러면서 그 집의 가풍도 익히고 또 그 부모들의 성품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부정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리는 우리의 거듭남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거듭나지 않고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을 뜻합니다. 일반적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그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하는 말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과만을 생각한 설명입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그 때부터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아 그 아버지의 양육을 받으며 그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보호하심과 양육하심을 뜻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볼 때, 뒤쪽에 무게가 더 많이 실려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고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 속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닮아가며 더 아름다워지고 더 온전해지는 성품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세상의 자녀로 세상의 사고방식과 세상의 모습을 닮아갔다면 거듭난 이후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배우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또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 사이의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는 사랑하기만 하고 누구는 그 사랑을 받기만 하는 그런 모습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사랑을 베풀기만 하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같은 모습, 그것도 이상적인 모습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누군가가 섬기며 또 굳은 일을 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은 절대로 서로 사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섬기기 위해서 굳은 일을 하고 있다면 실제로 그 일을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 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또 교회를 섬기는 것이지만 그 일의 유익은 우리들이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당연한 것이다, 할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고마워하고 미안해 해야 하며 그래서 그 짐을 나누어 지거나 혹은 다른 부분에서 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서로가 서로를 섬김으로써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서로를 섬김으로써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으려면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다른 사람이 지고 있는 짐을 나눠질 수는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찾아서 행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보고만 있는 일은 결코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교회라면 사랑이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먼저 수고하려고 해야 합니다. 남들은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뭐하러 사랑하는가 남들은 수고하지 않는데 내가 뭐하러 수고하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아름답지 못한 마음을 품지 말고 그저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기쁨으로 교회의 빈 구석을 채워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사랑하라는 계명은 의무인 동시에 큰 복이 있는 약속입니다. 하지 않으면 불순종이 되지만 행하면 기도응답이라는 큰 복을 받는 그런 일입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면 나도 불순종하는 것이 되고, 또 기도가 응답되는 복된 약속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사랑하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일에 구경꾼이 되고 받기만 해서 애써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사랑은, 성도 간의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사랑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것은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랑하며 다가가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습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방법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몸을 입은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멋지고 고상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사람인 우리들을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기 위한 피를 흘리고 생명을 대신 내어주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이었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기 힘들어질 때, 이것을 기억하시고 이것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다시 태어난,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증거가 될 것이고, 우리를 더욱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가게 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더욱 더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럽거나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못난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시되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또 무한히 사랑하셨던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는 것이며, 가장 용기있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일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마다 사랑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더욱 더 닮아가시는 작은 사랑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우리 교회에 이런 성도들이 점점 많아져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 안에서 기뻐하며 행복해 하는 하늘나라를 닮은 곳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