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0204to21 -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3(사도행전15).pdf
본문 : 사도행전 2장 14-21절
성령충만함을 받기 전 사도들과 성도들은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시자 이들은 담대해 졌습니다. 그들은 입을 열어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로 그들을 가장 크게 실패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던 예루살렘은 오히려 그들이 최초로 복음으로 정복하는 곳이 되었으며 처음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또 이들이 성령충만하여 전해 주었던 ‘하나님의 큰 일’ 때문에 각지에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은 아주 크게 놀랐습니다. 그렇게 세계 각지의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전해주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갈릴리의 촌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함은 패배의 자리를 승리의 자리로 바꾸어 주며, 평범하고 연약하고 의기소침한 사람들을 담대한 사람들로 변화시켜 하나님을 위한 일꾼이 되게 해 줍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우리 삶에 이런 영광스러운 변화와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경험한 사람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이긴 했어도 가장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베드로는 성령충만해지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죄로 억눌려있고 망가져 있던 베드로의 속사람을 고치셨기 때문이고, 그 속에 숨겨져 있었던 잠재력을 그가 사용가능한 능력으로 끌어올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베드로 개인이 성공하고 원하는 것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 일로 가장 큰 유익을 얻은 것은 베드로였을 것이 분명합니다.그가 이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입으로 다시 예수님을 만천하에 전하게 되었을 때, 그가 얼마나 감격하고 기뻐했을까요? 그의 속에 남아있던 모든 좌절과 실망, 그리고 자신에 대한 상처는 모두 말끔하게 치료되었을 것입니다. 정말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베드로는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혜 속에서 스스로를 위한 완전한 답을 얻게 되었고 또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 답을 들려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은 그 당시 일어났던 일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기 베드로의 기록을 남겨두신 것은 변화되기 이전의 베드로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평범하고 흔들리기 쉬운 사람들, 자기를 중심으로 살면서도 자기에게 실망하며 좌절하며 답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과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그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고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하라고 말입니다. 우리 자신을 답답하게 만드는 구석들, 그렇게 우리를 붙들어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막는 것들은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하신 임재 가운데 살기 시작할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실 뿐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위한 능력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성령님은 우리를 고쳐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영적으로 재활시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원래의 우리의 모습과 능력을 되찾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답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모습 자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답이 될 수 있고, 성령님의 능력을 덧입어 또 입술로도 그 답을 능력있게 전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함은 이렇게 우리 자신을 위한 답이기도 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답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을 위한 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며 또 나 자신을 위한 최고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을 받고 그 은혜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온전하게 살고 싶고, 또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며 살고 싶지만 잘 되지 않아서 실망하고 좌절할 때, 그 때마다 갈릴리 사람들을 기억하시고, 또 베드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영광스럽고 능력있게 바꾸셨던 성령님을 생각하시고,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꼭 그 은혜를 얻으시고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구속사 속에서 볼 때, 말세는 이미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신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것이 씨앗의 모양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하늘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겨자씨 같고 또 누룩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씨를 이미 심으셨으며 그 누룩을 반죽 덩어리와 섞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그 씨앗은 자라나기 시작했고 지금도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 때부터 그 누룩은 반죽덩어리를 발효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죽으면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하늘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들어와서 자라나고 있으며 그렇게 세상을 자기 세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 땅의 교회들이고 또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더불어 이제 온 우주의 역사가 결정적인 마지막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충만하게 거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처리되어야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신 후에야 성령님께서 오신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은 또한 성령충만할 때, 예수님과 하늘나라를 능력있고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자마자 큰 소리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함은 이제 예수님이 오신 때보다 마지막 날이 더 가까이 와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그 때보다도 더 결정적인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고 또 온전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 주시기도 하시지만 사실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이전에 우리 중심으로 살았던 삶을 떠나 하나님을 위해서, 또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충만함을 요엘의 예언의 성취,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 있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해석하고 설명했던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며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첫째,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만 성령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부어주실 대상을 모든 육체라는 범위가 커다란 말로 한 번 말씀하시고는 너희 자녀, 너희의 젊은이, 너희의 늙은이라고 구체적으로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는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니께서는 성령님을 어린아이, 젊은 사람, 늙은 사람 가리지 않고 ‘너희’ 그러니까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의 종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까? 어린아이나 젋은이 그리고 노인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굉장히 촘촘한 그물과도 같습니다. 믿는 사람 모두를 포함하는, 한 사람도 놓치지 않는 그물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는 것은 마치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콜라가 나오고 커피가 나오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고 또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부요하고 풍성한 분이신지 이 좋은 성령님을 나이나 신분,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바란다면, 믿는다면, 믿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성령충만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혹시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시거나, 나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선 이 약속 안에는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예수님을 믿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그들 또한 이 놀라운 복에서 예외가 될 수 없고 예외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의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내 자녀 내 손주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그들에게도 성령충만함을 주시도록 기도해 주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들도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또 그 길로 인도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령님이 그들의 인생을 최고의 인생으로 만드실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아이들로 만들어 줄 것이며,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가실 것인데 이런 일들이야 말로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노인이라고 이 일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성령충만이 필요없고 또 성령충만할 수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너희 자녀들’, 그러니까 ‘너희 어린아이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너희 늙은이들’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이가 많건 나이가 적건, 남자이건 여자이건, 교역자이건 평신도이건 간에 자신의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모든 성도들의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최고의 복, 하나님을 위해서, 이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주시겠다고 하신 최고의 복인 성령충만함에 무관심한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기대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충만함에 대한 깊은 관심과 소망을 회복해야 하며, 믿음으로 그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특권이고 또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렇게 성도들이 성령충만하게 되면 그들은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예언을 하고 무슨 환상을 보고 무슨 꿈을 꾸게 될까요? 이것은 성령충만한 이후의 이야기이니까 그 전에 이루어진 것들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의 내용은 하늘나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는 예언을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환상을 보게 되고, 또 하나님게서 꾸게 하시는 꿈을 꾸게 되면 거기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늘나라와 예수님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늘나라만 소망하게 되고 예수님만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때문에 살게되고 또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강한 소원을 품고 살게 됩니다. 이 두 가지는 성령충만함이 없으면 전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하늘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의 은혜가 부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마지막이 가까이 와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진짜 마지막 날,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이 되려면 누구나 보아서 알 수 있을만큰 뚜렷한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다는 것이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귀에는 세상이 들려주는 어둡고 두려운 노래가 아니라 하늘이 들려주는 구원의 노래가 울려퍼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세상에 이것보다 밝고 확실하며 소망 넘치는 노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 그래서 성령충만함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에게 이것보다 더 기쁜 노래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성도의 진짜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때로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사느라고 힘들고 어려울 때, 서글프고 괴로울 때 그 때 견디고 이기게 하며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 줄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노래에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이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며 사는데 있습니다. 점점 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양심을 지키는 일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믿음을 지키는 일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구원의 노래를 더 크고 즐겁게 부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의 날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날이니까요. 물론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다가오고 있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 날을 노래부를 수 있고 그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요엘을 통해 주신 약속은 이미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하던 처음 교회 성도들에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진실로 예수의 이름을 자신의 구원자요 왕으로 부르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루어져 왔고 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막론하고 성령충만한 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노래를 부르며, 하늘나라를 꿈꾸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해 질 때, 우리도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하늘나라의 소망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꿈꾸며 예수님을 전하고,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며 기뻐할 수 있는 아이들과 젊은이, 그리고 노인들, 남종과 여종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