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630to44 - 그 목자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마가29).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30-44절
오랜만에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그냥 계속 마가복음의 말씀을 살펴볼까, 아니면 가정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까 고민하다가 뒤쪽을 택했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시고 또 도전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설교자이기는 해도 저도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위임해 주신 가정과 가족들에 대해서 적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받은 교훈과 생각들을 어떻게 삶으로 옮겨낼 것인가 하는 것은 저에게 또다시 맡겨진 숙제이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좀더 깊고 자세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조금 애석하기는 합니다만 5월은 내년에도 있으니 후년에도 있으니 그 때 다시 은혜와 교훈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모두의 가정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나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 방식대로 가정을 돌보고 사랑할 때, 우리의 가정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생각과 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우리 가정은 계속해서 불완전하고 무능력한 우리 손에 쥐어져 있어야하고 그러면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뜻 위에 세워진 견고한 가정이 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니까요. 이런 생각과 믿음으로 우리가 일년에 한가지만이라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복된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번째 전도실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지팡이 하나 옷 한 벌, 신발 한켤레만 챙겨들고 꽤 오랜 기간을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였지만 그들은 굶지 않았고, 다른 필요들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역 자체도 아주 성공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아주 신이 나고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 자기들이 가르쳤던 내용과 행했던 것들을 모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의 보고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야 하겠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오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찾는 바람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온통 자신들이 한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관심이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행한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제자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필요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필요를 해아리시고 챙겨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쉬면서 힘을 얻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너무 유명해진 예수님과 제자들을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알아보고는 이 동네 저 동네에서 거의 뛰다시피하여 예수님께서 도착하실 곳으로 먼저 가서 모여있었습니다.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한적한 곳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의 쉴 짬도 주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참 이기적이라고 화를 내시고 짜증을 내셨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그 숫자에만 기뻐하셨을까요? 다른 사람같으면 그렇게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대신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의 속에 있는 마음과 필요들을 읽기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필요와 영혼의 갈증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갈 때, 그들은 분명히 침울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쁘고 흥분된 모습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그들의 영혼 속에 숨겨져 있는, 어쩌면 그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영혼의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마음 둘 곳이 필요했고, 온전히 의지하고 따라갈 인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마른 목을 채워줄 목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들의 그런 마음이 그렇게 예수님을 애타게 찾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이 기쁘기 보다는 불쌍했습니다. 측은하고 안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아니라 목자도 없이 주리며 방황하는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우리는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쁜 모습으로 오고, 어떤 사람은 흥분을 가지고 옵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 속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채우고 올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을 수도 있구요. 그러나, 우리의 겉모습이 어떠하든지 우리 영혼은 언제나 갈급합니다. 계속해서 길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 온전히 신뢰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기름진 꼴을 먹여줄 목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아담 이래로 우리의 영혼은 마치 길잃은 양, 그리고 목자없는 양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의 필요에 무뎌져서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 우리가 진짜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즐겁기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렇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을 먹이고 인도해 줄 목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들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진짜 문제와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목자없는 양처럼 자기 힘으로 그런 것들을 찾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끙끙거리며 헛되게 수고하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길을 인도해 주시고 진짜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모여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저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굉장히 다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예수님께로 온 사람들도 있었을테고, 마지 못해 지인의 손에 끌려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구요. 그렇지만 예수님께 그들 모두는 목자가 없는, 그래서 목자가 꼭 필요한 양이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목자가 없이는 필요한 것도 얻을 수 없고,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는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것이 그렇게 다양한 필요와 갈증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왔던 사람들을 위해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큰 무리를 정말 정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 하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그들을 여러가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참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목자없이 지냈던 양같은 백성들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하셔야만 했던 가장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참된 은혜없이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대개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필요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현실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고, 절실한 것이 없으면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을 동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떤 성도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다가도 그 문제만 해결되면 무덤덤한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름진 꼴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또 알고 있더라도 그런 은혜를 경험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 행복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알건 모르건, 제대로 알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목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그리고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진짜 문제, 우리가 가진 진짜 부족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 영혼은 방황하며 배고프며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궁핍함을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분명히 다른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 영혼이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도록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크고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은 정말 큰 어려움이나 부족함 속에서도 평강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보장하는 은혜가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 영혼을 방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지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믿음을 더하는 일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기쁘고 온전한 삶을 위해서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경험하기 전에 그 일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담임목회를 위한 가장 필요한 준비는 하나도 없이 이 일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부임한 후 한동안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목회 자체에만 몰두했었습니다. 생각을 해도, 기도를 해도 거의 이것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거의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동안 그것때문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가 물어도 저는 그것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위해서 산다고 말했었으니까요.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면 이 두 가지만 생각하면 힘이 나고 기쁨이 회복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목회라는 일 자체에만 몰두하다가 보니 이 두 가지에 대한 소망과 감격이 흐릿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힘이 드는데 그 힘을 보충하고 회복시켜 줄 원천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은혜를 회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저의 영혼도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다시 평안이 찾아왔고 기쁨도 되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만족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며,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새롭게하고 회복하는 일에 게을리 하면 오히려 목회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저만 그럴까요? 그리고 목회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목사가 그렇고 목회가 그렇다면 성도인 여러분은, 그리고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회복해야 하며, 그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일상생활도, 교회를 섬기는 일도 다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건조해 지고 무의미해 지며 불만스러운 이유,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일 차체가 그런 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지 않고, 그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의 필요를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흘러들어오는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런 필요가 느껴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항상 목자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먹이시기 위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시되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가지 말씀으로, 많은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해가 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가르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그렇게 많은 말씀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르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 동안 혼자서 만족을 위해 방황하느라고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한 양떼들에게 그 모든 말씀들이 다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을 들을 때, 과연 그 모든 말씀들이 전부 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기면서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말씀은 자신에게 너무 필요한 말씀이어서 정말 빨아들이듯이 집중해서 들었겠지만 다른 말씀들은 내가 왜 저런 말씀을 들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억지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섬긴 지가 이제 9개월이 지났으니 주일 오전만 해도 꽤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5월달 동안 했던 설교, 특히 지난 주일날 했던 설교만큼 여러분이 집중해서 들으셨던 설교도 없고, 또 이런 저런 직접적인 반응을 보여주셨던 설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지난 주일 설교가 이제까지의 설교 중에서 제일 훌륭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여러분의 영혼에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제 생각에는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5월의 설교가 가장 현실적인 설교였고, 그래서 팍 와닿는 설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그리고 자녀양육의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크고 중요하게 피부로 와닿는 문제이니까요.
‘입에서 땡기는 것을 찾아 먹으면 그게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지금 몸이 고기 안에 들어있는 영양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원래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저런 자극적인 음식들을 많이 먹고, 특히 인공조미료에 길들여 지면서 이미 우리는 그런 능력을 많이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입에 땡기는 것만 찾아먹으면 오히려 영양의 균형이 깨지고 건강에 손해를 보게 되기가 쉬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우리를 자극하고 흔들어 대는 현실적인 필요들에 계속해서 노출되면서 그런 필요들만을 크게 느끼는데 익숙해져서 우리 영혼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감각에만 의존해서 우리 영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항상 놓치고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종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호하는 말씀이 들려올 때는 귀를 잘 기울이지만 설교 중간이라도 자기가 별로 관심이 없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주제가 나오면 이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다른 생각에 빠집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런 부분은 건성으로 보거나 그냥 건너뜁니다. 과연 우리는 그래도 괜챦을까요? 그래도 우리 영혼의 건강과 풍성한 삶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큰 일 납니다. 아이가 계속 한 가지만 먹을 때 부모들이 그냥 내버려 두나요? 아니면 걱정하면서 이것 저것 먹이려고 애쓰나요? 걱정하면서 골고루 먹이려고 애쓰죠?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자기 먹기 싫은 것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영양실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우리 영혼도 영양실조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리고 영혼이 건강함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 또한 건강하고 풍성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냥 내 감각에만 의지하지 말고 의도적으로 영혼이 편식을 하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부드럽고 잘 넘어가는 음식 뿐만 아니라 단단해서 먹기 어려운, 손이 안가는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음식일 수록 먹으려고 더 많이 애써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배우는 것을 공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당장 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불만이기도 하죠. 왜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구요. 그렇지만 그래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 어디에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장 필요할 때 배우려고 하면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진리를, 때로는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배워야 하는 것은 그 말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에게 도움이 되고 능력이 되어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정말 많은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성경이 정말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들로 채워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주님도 굳이 많은 말씀들, 여러가지 말씀들로 사람들을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함으로써 그들을 돌보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시고 챙겨주셨던 주님은 결코 그런 필요들을 무시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그런 필요들, 당장의 필요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의 목자되시고 또 그들을 만드신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영혼을 먹이고 또 올바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여러가지 말씀이었습니다. 풍성한 진리였습니다.
예배 때마다 쌀을 나눠주거나 옷을 나눠주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 주에도 여러차례 말씀을 설교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성경공부를 시키고,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여러가지 말씀,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당장 그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필요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는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 그 모든 진리가 다 필요합니다. 필요없다고 느껴지는 그것까지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들려오는 모든 말씀, 눈에 보이는 모든 진리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집중하여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말씀들이 필요하고 그 모든 말씀들이 우리 영혼과 삶의 건강과 온전함을 지탱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잘 들리지 않는 말씀일수록, 지금 당장 관심이 가지 않는 말씀일수록 더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말씀과 풍성한 진리로 인도를 받아서 더 이상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굶주리지 않는 주님의 우리 안에 있는 양과 같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30-44절
오랜만에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그냥 계속 마가복음의 말씀을 살펴볼까, 아니면 가정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까 고민하다가 뒤쪽을 택했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시고 또 도전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설교자이기는 해도 저도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위임해 주신 가정과 가족들에 대해서 적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받은 교훈과 생각들을 어떻게 삶으로 옮겨낼 것인가 하는 것은 저에게 또다시 맡겨진 숙제이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좀더 깊고 자세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조금 애석하기는 합니다만 5월은 내년에도 있으니 후년에도 있으니 그 때 다시 은혜와 교훈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모두의 가정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나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 방식대로 가정을 돌보고 사랑할 때, 우리의 가정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생각과 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우리 가정은 계속해서 불완전하고 무능력한 우리 손에 쥐어져 있어야하고 그러면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뜻 위에 세워진 견고한 가정이 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니까요. 이런 생각과 믿음으로 우리가 일년에 한가지만이라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복된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번째 전도실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지팡이 하나 옷 한 벌, 신발 한켤레만 챙겨들고 꽤 오랜 기간을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였지만 그들은 굶지 않았고, 다른 필요들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역 자체도 아주 성공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아주 신이 나고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 자기들이 가르쳤던 내용과 행했던 것들을 모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의 보고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야 하겠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오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찾는 바람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온통 자신들이 한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관심이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행한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제자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필요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필요를 해아리시고 챙겨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쉬면서 힘을 얻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너무 유명해진 예수님과 제자들을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알아보고는 이 동네 저 동네에서 거의 뛰다시피하여 예수님께서 도착하실 곳으로 먼저 가서 모여있었습니다.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한적한 곳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의 쉴 짬도 주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참 이기적이라고 화를 내시고 짜증을 내셨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그 숫자에만 기뻐하셨을까요? 다른 사람같으면 그렇게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대신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의 속에 있는 마음과 필요들을 읽기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필요와 영혼의 갈증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갈 때, 그들은 분명히 침울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쁘고 흥분된 모습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그들의 영혼 속에 숨겨져 있는, 어쩌면 그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영혼의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마음 둘 곳이 필요했고, 온전히 의지하고 따라갈 인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마른 목을 채워줄 목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들의 그런 마음이 그렇게 예수님을 애타게 찾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이 기쁘기 보다는 불쌍했습니다. 측은하고 안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아니라 목자도 없이 주리며 방황하는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우리는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쁜 모습으로 오고, 어떤 사람은 흥분을 가지고 옵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 속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채우고 올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을 수도 있구요. 그러나, 우리의 겉모습이 어떠하든지 우리 영혼은 언제나 갈급합니다. 계속해서 길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 온전히 신뢰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기름진 꼴을 먹여줄 목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아담 이래로 우리의 영혼은 마치 길잃은 양, 그리고 목자없는 양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의 필요에 무뎌져서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 우리가 진짜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즐겁기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렇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을 먹이고 인도해 줄 목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들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진짜 문제와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목자없는 양처럼 자기 힘으로 그런 것들을 찾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끙끙거리며 헛되게 수고하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길을 인도해 주시고 진짜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모여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저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굉장히 다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예수님께로 온 사람들도 있었을테고, 마지 못해 지인의 손에 끌려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구요. 그렇지만 예수님께 그들 모두는 목자가 없는, 그래서 목자가 꼭 필요한 양이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목자가 없이는 필요한 것도 얻을 수 없고,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는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것이 그렇게 다양한 필요와 갈증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왔던 사람들을 위해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큰 무리를 정말 정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 하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그들을 여러가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참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목자없이 지냈던 양같은 백성들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하셔야만 했던 가장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참된 은혜없이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대개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필요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현실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고, 절실한 것이 없으면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을 동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떤 성도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다가도 그 문제만 해결되면 무덤덤한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름진 꼴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또 알고 있더라도 그런 은혜를 경험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 행복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알건 모르건, 제대로 알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목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그리고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진짜 문제, 우리가 가진 진짜 부족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 영혼은 방황하며 배고프며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궁핍함을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분명히 다른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 영혼이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도록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크고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은 정말 큰 어려움이나 부족함 속에서도 평강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보장하는 은혜가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 영혼을 방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지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믿음을 더하는 일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기쁘고 온전한 삶을 위해서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경험하기 전에 그 일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담임목회를 위한 가장 필요한 준비는 하나도 없이 이 일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부임한 후 한동안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목회 자체에만 몰두했었습니다. 생각을 해도, 기도를 해도 거의 이것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거의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동안 그것때문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가 물어도 저는 그것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위해서 산다고 말했었으니까요.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면 이 두 가지만 생각하면 힘이 나고 기쁨이 회복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목회라는 일 자체에만 몰두하다가 보니 이 두 가지에 대한 소망과 감격이 흐릿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힘이 드는데 그 힘을 보충하고 회복시켜 줄 원천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은혜를 회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저의 영혼도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다시 평안이 찾아왔고 기쁨도 되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만족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며,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새롭게하고 회복하는 일에 게을리 하면 오히려 목회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저만 그럴까요? 그리고 목회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목사가 그렇고 목회가 그렇다면 성도인 여러분은, 그리고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회복해야 하며, 그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일상생활도, 교회를 섬기는 일도 다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건조해 지고 무의미해 지며 불만스러운 이유,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일 차체가 그런 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지 않고, 그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의 필요를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흘러들어오는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런 필요가 느껴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항상 목자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먹이시기 위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시되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가지 말씀으로, 많은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해가 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가르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그렇게 많은 말씀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르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 동안 혼자서 만족을 위해 방황하느라고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한 양떼들에게 그 모든 말씀들이 다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을 들을 때, 과연 그 모든 말씀들이 전부 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기면서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말씀은 자신에게 너무 필요한 말씀이어서 정말 빨아들이듯이 집중해서 들었겠지만 다른 말씀들은 내가 왜 저런 말씀을 들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억지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섬긴 지가 이제 9개월이 지났으니 주일 오전만 해도 꽤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5월달 동안 했던 설교, 특히 지난 주일날 했던 설교만큼 여러분이 집중해서 들으셨던 설교도 없고, 또 이런 저런 직접적인 반응을 보여주셨던 설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지난 주일 설교가 이제까지의 설교 중에서 제일 훌륭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여러분의 영혼에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제 생각에는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5월의 설교가 가장 현실적인 설교였고, 그래서 팍 와닿는 설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그리고 자녀양육의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크고 중요하게 피부로 와닿는 문제이니까요.
‘입에서 땡기는 것을 찾아 먹으면 그게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지금 몸이 고기 안에 들어있는 영양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원래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저런 자극적인 음식들을 많이 먹고, 특히 인공조미료에 길들여 지면서 이미 우리는 그런 능력을 많이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입에 땡기는 것만 찾아먹으면 오히려 영양의 균형이 깨지고 건강에 손해를 보게 되기가 쉬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우리를 자극하고 흔들어 대는 현실적인 필요들에 계속해서 노출되면서 그런 필요들만을 크게 느끼는데 익숙해져서 우리 영혼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감각에만 의존해서 우리 영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항상 놓치고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종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호하는 말씀이 들려올 때는 귀를 잘 기울이지만 설교 중간이라도 자기가 별로 관심이 없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주제가 나오면 이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다른 생각에 빠집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런 부분은 건성으로 보거나 그냥 건너뜁니다. 과연 우리는 그래도 괜챦을까요? 그래도 우리 영혼의 건강과 풍성한 삶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큰 일 납니다. 아이가 계속 한 가지만 먹을 때 부모들이 그냥 내버려 두나요? 아니면 걱정하면서 이것 저것 먹이려고 애쓰나요? 걱정하면서 골고루 먹이려고 애쓰죠?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자기 먹기 싫은 것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영양실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우리 영혼도 영양실조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리고 영혼이 건강함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 또한 건강하고 풍성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냥 내 감각에만 의지하지 말고 의도적으로 영혼이 편식을 하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부드럽고 잘 넘어가는 음식 뿐만 아니라 단단해서 먹기 어려운, 손이 안가는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음식일 수록 먹으려고 더 많이 애써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배우는 것을 공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당장 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불만이기도 하죠. 왜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구요. 그렇지만 그래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 어디에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장 필요할 때 배우려고 하면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진리를, 때로는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배워야 하는 것은 그 말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에게 도움이 되고 능력이 되어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정말 많은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성경이 정말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들로 채워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주님도 굳이 많은 말씀들, 여러가지 말씀들로 사람들을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함으로써 그들을 돌보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시고 챙겨주셨던 주님은 결코 그런 필요들을 무시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그런 필요들, 당장의 필요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의 목자되시고 또 그들을 만드신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영혼을 먹이고 또 올바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여러가지 말씀이었습니다. 풍성한 진리였습니다.
예배 때마다 쌀을 나눠주거나 옷을 나눠주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 주에도 여러차례 말씀을 설교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성경공부를 시키고,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여러가지 말씀,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당장 그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필요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는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 그 모든 진리가 다 필요합니다. 필요없다고 느껴지는 그것까지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들려오는 모든 말씀, 눈에 보이는 모든 진리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집중하여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말씀들이 필요하고 그 모든 말씀들이 우리 영혼과 삶의 건강과 온전함을 지탱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잘 들리지 않는 말씀일수록, 지금 당장 관심이 가지 않는 말씀일수록 더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말씀과 풍성한 진리로 인도를 받아서 더 이상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굶주리지 않는 주님의 우리 안에 있는 양과 같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30-44절
오랜만에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그냥 계속 마가복음의 말씀을 살펴볼까, 아니면 가정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까 고민하다가 뒤쪽을 택했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시고 또 도전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설교자이기는 해도 저도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위임해 주신 가정과 가족들에 대해서 적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받은 교훈과 생각들을 어떻게 삶으로 옮겨낼 것인가 하는 것은 저에게 또다시 맡겨진 숙제이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좀더 깊고 자세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조금 애석하기는 합니다만 5월은 내년에도 있으니 후년에도 있으니 그 때 다시 은혜와 교훈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모두의 가정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나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 방식대로 가정을 돌보고 사랑할 때, 우리의 가정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생각과 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우리 가정은 계속해서 불완전하고 무능력한 우리 손에 쥐어져 있어야하고 그러면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뜻 위에 세워진 견고한 가정이 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니까요. 이런 생각과 믿음으로 우리가 일년에 한가지만이라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복된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번째 전도실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지팡이 하나 옷 한 벌, 신발 한켤레만 챙겨들고 꽤 오랜 기간을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였지만 그들은 굶지 않았고, 다른 필요들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역 자체도 아주 성공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아주 신이 나고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 자기들이 가르쳤던 내용과 행했던 것들을 모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의 보고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야 하겠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오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찾는 바람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온통 자신들이 한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관심이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행한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제자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필요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필요를 해아리시고 챙겨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쉬면서 힘을 얻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너무 유명해진 예수님과 제자들을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알아보고는 이 동네 저 동네에서 거의 뛰다시피하여 예수님께서 도착하실 곳으로 먼저 가서 모여있었습니다.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한적한 곳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의 쉴 짬도 주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참 이기적이라고 화를 내시고 짜증을 내셨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그 숫자에만 기뻐하셨을까요? 다른 사람같으면 그렇게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대신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의 속에 있는 마음과 필요들을 읽기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필요와 영혼의 갈증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갈 때, 그들은 분명히 침울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쁘고 흥분된 모습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그들의 영혼 속에 숨겨져 있는, 어쩌면 그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영혼의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마음 둘 곳이 필요했고, 온전히 의지하고 따라갈 인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마른 목을 채워줄 목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들의 그런 마음이 그렇게 예수님을 애타게 찾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이 기쁘기 보다는 불쌍했습니다. 측은하고 안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아니라 목자도 없이 주리며 방황하는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우리는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쁜 모습으로 오고, 어떤 사람은 흥분을 가지고 옵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 속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채우고 올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을 수도 있구요. 그러나, 우리의 겉모습이 어떠하든지 우리 영혼은 언제나 갈급합니다. 계속해서 길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 온전히 신뢰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기름진 꼴을 먹여줄 목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아담 이래로 우리의 영혼은 마치 길잃은 양, 그리고 목자없는 양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의 필요에 무뎌져서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 우리가 진짜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즐겁기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렇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을 먹이고 인도해 줄 목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들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진짜 문제와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목자없는 양처럼 자기 힘으로 그런 것들을 찾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끙끙거리며 헛되게 수고하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길을 인도해 주시고 진짜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모여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저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굉장히 다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예수님께로 온 사람들도 있었을테고, 마지 못해 지인의 손에 끌려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구요. 그렇지만 예수님께 그들 모두는 목자가 없는, 그래서 목자가 꼭 필요한 양이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목자가 없이는 필요한 것도 얻을 수 없고,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는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것이 그렇게 다양한 필요와 갈증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왔던 사람들을 위해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큰 무리를 정말 정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 하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그들을 여러가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참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목자없이 지냈던 양같은 백성들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하셔야만 했던 가장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참된 은혜없이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대개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필요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현실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고, 절실한 것이 없으면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을 동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떤 성도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다가도 그 문제만 해결되면 무덤덤한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름진 꼴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또 알고 있더라도 그런 은혜를 경험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 행복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알건 모르건, 제대로 알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목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그리고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진짜 문제, 우리가 가진 진짜 부족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 영혼은 방황하며 배고프며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궁핍함을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분명히 다른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 영혼이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도록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크고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은 정말 큰 어려움이나 부족함 속에서도 평강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보장하는 은혜가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 영혼을 방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지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믿음을 더하는 일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기쁘고 온전한 삶을 위해서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경험하기 전에 그 일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담임목회를 위한 가장 필요한 준비는 하나도 없이 이 일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부임한 후 한동안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목회 자체에만 몰두했었습니다. 생각을 해도, 기도를 해도 거의 이것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거의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동안 그것때문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가 물어도 저는 그것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위해서 산다고 말했었으니까요.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면 이 두 가지만 생각하면 힘이 나고 기쁨이 회복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목회라는 일 자체에만 몰두하다가 보니 이 두 가지에 대한 소망과 감격이 흐릿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힘이 드는데 그 힘을 보충하고 회복시켜 줄 원천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은혜를 회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저의 영혼도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다시 평안이 찾아왔고 기쁨도 되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만족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며,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새롭게하고 회복하는 일에 게을리 하면 오히려 목회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저만 그럴까요? 그리고 목회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목사가 그렇고 목회가 그렇다면 성도인 여러분은, 그리고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회복해야 하며, 그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일상생활도, 교회를 섬기는 일도 다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건조해 지고 무의미해 지며 불만스러운 이유,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일 차체가 그런 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지 않고, 그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의 필요를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흘러들어오는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런 필요가 느껴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항상 목자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먹이시기 위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시되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가지 말씀으로, 많은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해가 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가르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그렇게 많은 말씀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르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 동안 혼자서 만족을 위해 방황하느라고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한 양떼들에게 그 모든 말씀들이 다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을 들을 때, 과연 그 모든 말씀들이 전부 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기면서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말씀은 자신에게 너무 필요한 말씀이어서 정말 빨아들이듯이 집중해서 들었겠지만 다른 말씀들은 내가 왜 저런 말씀을 들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억지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섬긴 지가 이제 9개월이 지났으니 주일 오전만 해도 꽤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5월달 동안 했던 설교, 특히 지난 주일날 했던 설교만큼 여러분이 집중해서 들으셨던 설교도 없고, 또 이런 저런 직접적인 반응을 보여주셨던 설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지난 주일 설교가 이제까지의 설교 중에서 제일 훌륭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여러분의 영혼에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제 생각에는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5월의 설교가 가장 현실적인 설교였고, 그래서 팍 와닿는 설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그리고 자녀양육의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크고 중요하게 피부로 와닿는 문제이니까요.
‘입에서 땡기는 것을 찾아 먹으면 그게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지금 몸이 고기 안에 들어있는 영양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원래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저런 자극적인 음식들을 많이 먹고, 특히 인공조미료에 길들여 지면서 이미 우리는 그런 능력을 많이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입에 땡기는 것만 찾아먹으면 오히려 영양의 균형이 깨지고 건강에 손해를 보게 되기가 쉬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우리를 자극하고 흔들어 대는 현실적인 필요들에 계속해서 노출되면서 그런 필요들만을 크게 느끼는데 익숙해져서 우리 영혼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감각에만 의존해서 우리 영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항상 놓치고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종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호하는 말씀이 들려올 때는 귀를 잘 기울이지만 설교 중간이라도 자기가 별로 관심이 없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주제가 나오면 이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다른 생각에 빠집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런 부분은 건성으로 보거나 그냥 건너뜁니다. 과연 우리는 그래도 괜챦을까요? 그래도 우리 영혼의 건강과 풍성한 삶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큰 일 납니다. 아이가 계속 한 가지만 먹을 때 부모들이 그냥 내버려 두나요? 아니면 걱정하면서 이것 저것 먹이려고 애쓰나요? 걱정하면서 골고루 먹이려고 애쓰죠?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자기 먹기 싫은 것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영양실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우리 영혼도 영양실조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리고 영혼이 건강함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 또한 건강하고 풍성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냥 내 감각에만 의지하지 말고 의도적으로 영혼이 편식을 하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부드럽고 잘 넘어가는 음식 뿐만 아니라 단단해서 먹기 어려운, 손이 안가는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음식일 수록 먹으려고 더 많이 애써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배우는 것을 공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당장 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불만이기도 하죠. 왜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구요. 그렇지만 그래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 어디에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장 필요할 때 배우려고 하면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진리를, 때로는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배워야 하는 것은 그 말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에게 도움이 되고 능력이 되어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정말 많은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성경이 정말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들로 채워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주님도 굳이 많은 말씀들, 여러가지 말씀들로 사람들을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함으로써 그들을 돌보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시고 챙겨주셨던 주님은 결코 그런 필요들을 무시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그런 필요들, 당장의 필요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의 목자되시고 또 그들을 만드신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영혼을 먹이고 또 올바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여러가지 말씀이었습니다. 풍성한 진리였습니다.
예배 때마다 쌀을 나눠주거나 옷을 나눠주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 주에도 여러차례 말씀을 설교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성경공부를 시키고,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여러가지 말씀,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당장 그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필요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는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 그 모든 진리가 다 필요합니다. 필요없다고 느껴지는 그것까지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들려오는 모든 말씀, 눈에 보이는 모든 진리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집중하여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말씀들이 필요하고 그 모든 말씀들이 우리 영혼과 삶의 건강과 온전함을 지탱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잘 들리지 않는 말씀일수록, 지금 당장 관심이 가지 않는 말씀일수록 더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말씀과 풍성한 진리로 인도를 받아서 더 이상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굶주리지 않는 주님의 우리 안에 있는 양과 같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30-44절
오랜만에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그냥 계속 마가복음의 말씀을 살펴볼까, 아니면 가정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까 고민하다가 뒤쪽을 택했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시고 또 도전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설교자이기는 해도 저도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위임해 주신 가정과 가족들에 대해서 적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받은 교훈과 생각들을 어떻게 삶으로 옮겨낼 것인가 하는 것은 저에게 또다시 맡겨진 숙제이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좀더 깊고 자세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조금 애석하기는 합니다만 5월은 내년에도 있으니 후년에도 있으니 그 때 다시 은혜와 교훈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모두의 가정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나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 방식대로 가정을 돌보고 사랑할 때, 우리의 가정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생각과 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우리 가정은 계속해서 불완전하고 무능력한 우리 손에 쥐어져 있어야하고 그러면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뜻 위에 세워진 견고한 가정이 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니까요. 이런 생각과 믿음으로 우리가 일년에 한가지만이라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복된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번째 전도실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지팡이 하나 옷 한 벌, 신발 한켤레만 챙겨들고 꽤 오랜 기간을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였지만 그들은 굶지 않았고, 다른 필요들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역 자체도 아주 성공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아주 신이 나고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 자기들이 가르쳤던 내용과 행했던 것들을 모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의 보고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야 하겠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오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찾는 바람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온통 자신들이 한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관심이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행한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제자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필요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필요를 해아리시고 챙겨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쉬면서 힘을 얻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너무 유명해진 예수님과 제자들을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알아보고는 이 동네 저 동네에서 거의 뛰다시피하여 예수님께서 도착하실 곳으로 먼저 가서 모여있었습니다.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한적한 곳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의 쉴 짬도 주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참 이기적이라고 화를 내시고 짜증을 내셨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그 숫자에만 기뻐하셨을까요? 다른 사람같으면 그렇게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대신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의 속에 있는 마음과 필요들을 읽기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필요와 영혼의 갈증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갈 때, 그들은 분명히 침울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쁘고 흥분된 모습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그들의 영혼 속에 숨겨져 있는, 어쩌면 그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영혼의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마음 둘 곳이 필요했고, 온전히 의지하고 따라갈 인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마른 목을 채워줄 목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들의 그런 마음이 그렇게 예수님을 애타게 찾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이 기쁘기 보다는 불쌍했습니다. 측은하고 안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아니라 목자도 없이 주리며 방황하는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우리는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쁜 모습으로 오고, 어떤 사람은 흥분을 가지고 옵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 속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채우고 올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을 수도 있구요. 그러나, 우리의 겉모습이 어떠하든지 우리 영혼은 언제나 갈급합니다. 계속해서 길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 온전히 신뢰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기름진 꼴을 먹여줄 목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아담 이래로 우리의 영혼은 마치 길잃은 양, 그리고 목자없는 양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의 필요에 무뎌져서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 우리가 진짜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즐겁기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렇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을 먹이고 인도해 줄 목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들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진짜 문제와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목자없는 양처럼 자기 힘으로 그런 것들을 찾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끙끙거리며 헛되게 수고하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길을 인도해 주시고 진짜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모여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저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굉장히 다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예수님께로 온 사람들도 있었을테고, 마지 못해 지인의 손에 끌려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구요. 그렇지만 예수님께 그들 모두는 목자가 없는, 그래서 목자가 꼭 필요한 양이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목자가 없이는 필요한 것도 얻을 수 없고,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는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것이 그렇게 다양한 필요와 갈증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왔던 사람들을 위해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큰 무리를 정말 정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 하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그들을 여러가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참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목자없이 지냈던 양같은 백성들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하셔야만 했던 가장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참된 은혜없이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대개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필요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현실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고, 절실한 것이 없으면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을 동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떤 성도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다가도 그 문제만 해결되면 무덤덤한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름진 꼴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또 알고 있더라도 그런 은혜를 경험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 행복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알건 모르건, 제대로 알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목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그리고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진짜 문제, 우리가 가진 진짜 부족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 영혼은 방황하며 배고프며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궁핍함을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분명히 다른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 영혼이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도록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크고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은 정말 큰 어려움이나 부족함 속에서도 평강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보장하는 은혜가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 영혼을 방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지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믿음을 더하는 일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기쁘고 온전한 삶을 위해서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경험하기 전에 그 일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담임목회를 위한 가장 필요한 준비는 하나도 없이 이 일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부임한 후 한동안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목회 자체에만 몰두했었습니다. 생각을 해도, 기도를 해도 거의 이것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거의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동안 그것때문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가 물어도 저는 그것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위해서 산다고 말했었으니까요.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면 이 두 가지만 생각하면 힘이 나고 기쁨이 회복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목회라는 일 자체에만 몰두하다가 보니 이 두 가지에 대한 소망과 감격이 흐릿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힘이 드는데 그 힘을 보충하고 회복시켜 줄 원천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은혜를 회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저의 영혼도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다시 평안이 찾아왔고 기쁨도 되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만족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며,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새롭게하고 회복하는 일에 게을리 하면 오히려 목회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저만 그럴까요? 그리고 목회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목사가 그렇고 목회가 그렇다면 성도인 여러분은, 그리고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회복해야 하며, 그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일상생활도, 교회를 섬기는 일도 다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건조해 지고 무의미해 지며 불만스러운 이유,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일 차체가 그런 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지 않고, 그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의 필요를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흘러들어오는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런 필요가 느껴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항상 목자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먹이시기 위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시되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가지 말씀으로, 많은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해가 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가르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그렇게 많은 말씀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르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 동안 혼자서 만족을 위해 방황하느라고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한 양떼들에게 그 모든 말씀들이 다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을 들을 때, 과연 그 모든 말씀들이 전부 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기면서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말씀은 자신에게 너무 필요한 말씀이어서 정말 빨아들이듯이 집중해서 들었겠지만 다른 말씀들은 내가 왜 저런 말씀을 들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억지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섬긴 지가 이제 9개월이 지났으니 주일 오전만 해도 꽤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5월달 동안 했던 설교, 특히 지난 주일날 했던 설교만큼 여러분이 집중해서 들으셨던 설교도 없고, 또 이런 저런 직접적인 반응을 보여주셨던 설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지난 주일 설교가 이제까지의 설교 중에서 제일 훌륭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여러분의 영혼에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제 생각에는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5월의 설교가 가장 현실적인 설교였고, 그래서 팍 와닿는 설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그리고 자녀양육의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크고 중요하게 피부로 와닿는 문제이니까요.
‘입에서 땡기는 것을 찾아 먹으면 그게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지금 몸이 고기 안에 들어있는 영양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원래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저런 자극적인 음식들을 많이 먹고, 특히 인공조미료에 길들여 지면서 이미 우리는 그런 능력을 많이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입에 땡기는 것만 찾아먹으면 오히려 영양의 균형이 깨지고 건강에 손해를 보게 되기가 쉬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우리를 자극하고 흔들어 대는 현실적인 필요들에 계속해서 노출되면서 그런 필요들만을 크게 느끼는데 익숙해져서 우리 영혼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감각에만 의존해서 우리 영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항상 놓치고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종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호하는 말씀이 들려올 때는 귀를 잘 기울이지만 설교 중간이라도 자기가 별로 관심이 없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주제가 나오면 이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다른 생각에 빠집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런 부분은 건성으로 보거나 그냥 건너뜁니다. 과연 우리는 그래도 괜챦을까요? 그래도 우리 영혼의 건강과 풍성한 삶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큰 일 납니다. 아이가 계속 한 가지만 먹을 때 부모들이 그냥 내버려 두나요? 아니면 걱정하면서 이것 저것 먹이려고 애쓰나요? 걱정하면서 골고루 먹이려고 애쓰죠?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자기 먹기 싫은 것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영양실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우리 영혼도 영양실조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리고 영혼이 건강함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 또한 건강하고 풍성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냥 내 감각에만 의지하지 말고 의도적으로 영혼이 편식을 하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부드럽고 잘 넘어가는 음식 뿐만 아니라 단단해서 먹기 어려운, 손이 안가는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음식일 수록 먹으려고 더 많이 애써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배우는 것을 공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당장 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불만이기도 하죠. 왜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구요. 그렇지만 그래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 어디에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장 필요할 때 배우려고 하면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진리를, 때로는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배워야 하는 것은 그 말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에게 도움이 되고 능력이 되어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정말 많은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성경이 정말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들로 채워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주님도 굳이 많은 말씀들, 여러가지 말씀들로 사람들을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함으로써 그들을 돌보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시고 챙겨주셨던 주님은 결코 그런 필요들을 무시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그런 필요들, 당장의 필요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의 목자되시고 또 그들을 만드신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영혼을 먹이고 또 올바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여러가지 말씀이었습니다. 풍성한 진리였습니다.
예배 때마다 쌀을 나눠주거나 옷을 나눠주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 주에도 여러차례 말씀을 설교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성경공부를 시키고,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여러가지 말씀,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당장 그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필요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는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 그 모든 진리가 다 필요합니다. 필요없다고 느껴지는 그것까지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들려오는 모든 말씀, 눈에 보이는 모든 진리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집중하여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말씀들이 필요하고 그 모든 말씀들이 우리 영혼과 삶의 건강과 온전함을 지탱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잘 들리지 않는 말씀일수록, 지금 당장 관심이 가지 않는 말씀일수록 더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말씀과 풍성한 진리로 인도를 받아서 더 이상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굶주리지 않는 주님의 우리 안에 있는 양과 같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30-44절
오랜만에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그냥 계속 마가복음의 말씀을 살펴볼까, 아니면 가정에 대한 말씀을 살펴볼까 고민하다가 뒤쪽을 택했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시고 또 도전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설교자이기는 해도 저도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위임해 주신 가정과 가족들에 대해서 적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받은 교훈과 생각들을 어떻게 삶으로 옮겨낼 것인가 하는 것은 저에게 또다시 맡겨진 숙제이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좀더 깊고 자세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 조금 애석하기는 합니다만 5월은 내년에도 있으니 후년에도 있으니 그 때 다시 은혜와 교훈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 모두의 가정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세상의 방식이나 나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 방식대로 가정을 돌보고 사랑할 때, 우리의 가정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생각과 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우리 가정은 계속해서 불완전하고 무능력한 우리 손에 쥐어져 있어야하고 그러면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뜻 위에 세워진 견고한 가정이 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니까요. 이런 생각과 믿음으로 우리가 일년에 한가지만이라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복된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첫번째 전도실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지팡이 하나 옷 한 벌, 신발 한켤레만 챙겨들고 꽤 오랜 기간을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였지만 그들은 굶지 않았고, 다른 필요들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역 자체도 아주 성공적이어서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아주 아주 신이 나고 자랑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실습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 자기들이 가르쳤던 내용과 행했던 것들을 모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의 보고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좀 쉬어야 하겠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오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찾는 바람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온통 자신들이 한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관심이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행한 제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비록 제자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필요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필요를 해아리시고 챙겨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쉬면서 힘을 얻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너무 유명해진 예수님과 제자들을 사람들이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배에 타고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알아보고는 이 동네 저 동네에서 거의 뛰다시피하여 예수님께서 도착하실 곳으로 먼저 가서 모여있었습니다.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한적한 곳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의 쉴 짬도 주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괴롭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참 이기적이라고 화를 내시고 짜증을 내셨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그 숫자에만 기뻐하셨을까요? 다른 사람같으면 그렇게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대신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의 속에 있는 마음과 필요들을 읽기 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행동 속에 숨겨져 있는 마음의 필요와 영혼의 갈증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갈 때, 그들은 분명히 침울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쁘고 흥분된 모습으로 기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그들의 영혼 속에 숨겨져 있는, 어쩌면 그들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영혼의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마음 둘 곳이 필요했고, 온전히 의지하고 따라갈 인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마른 목을 채워줄 목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그들의 그런 마음이 그렇게 예수님을 애타게 찾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이 기쁘기 보다는 불쌍했습니다. 측은하고 안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예수님을 찾는 수많은 군중이 아니라 목자도 없이 주리며 방황하는 양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우리는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쁜 모습으로 오고, 어떤 사람은 흥분을 가지고 옵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로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 속은 전혀 다른 생각으로 채우고 올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을 수도 있구요. 그러나, 우리의 겉모습이 어떠하든지 우리 영혼은 언제나 갈급합니다. 계속해서 길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 온전히 신뢰할 대상을 찾고 있습니다. 기름진 꼴을 먹여줄 목자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아담 이래로 우리의 영혼은 마치 길잃은 양, 그리고 목자없는 양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의 필요에 무뎌져서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 우리가 진짜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즐겁기만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렇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을 먹이고 인도해 줄 목자를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들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진짜 문제와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목자없는 양처럼 자기 힘으로 그런 것들을 찾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끙끙거리며 헛되게 수고하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길을 인도해 주시고 진짜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모여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도 저마다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굉장히 다양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예수님께로 온 사람들도 있었을테고, 마지 못해 지인의 손에 끌려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구요. 그렇지만 예수님께 그들 모두는 목자가 없는, 그래서 목자가 꼭 필요한 양이었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목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목자가 없이는 필요한 것도 얻을 수 없고,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는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목자는 양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것이 그렇게 다양한 필요와 갈증을 가지고 예수님께로 나왔던 사람들을 위해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큰 무리를 정말 정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하나 하나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그들을 여러가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참 목자되신 예수님께서 목자없이 지냈던 양같은 백성들을 채워주시기 위해서 가장 먼저 행하셔야만 했던 가장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참된 은혜없이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의 특징은 자신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은 대개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필요에 묶여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 현실적으로 아쉬운 것이 없고, 절실한 것이 없으면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을 찾을 동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어떤 성도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때는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다가도 그 문제만 해결되면 무덤덤한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도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에 관심이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름진 꼴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고, 또 알고 있더라도 그런 은혜를 경험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 행복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알건 모르건, 제대로 알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목자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그리고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진짜 문제, 우리가 가진 진짜 부족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 영혼은 방황하며 배고프며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궁핍함을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은 분명히 다른 일부터 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부터 시작하셨을 것입니다.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 영혼이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만족할 수 없도록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크고 결정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은 정말 큰 어려움이나 부족함 속에서도 평강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이 보장하는 은혜가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 영혼을 방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지도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믿음을 더하는 일보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기쁘고 온전한 삶을 위해서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경험하기 전에 그 일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담임목회를 위한 가장 필요한 준비는 하나도 없이 이 일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부임한 후 한동안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목회 자체에만 몰두했었습니다. 생각을 해도, 기도를 해도 거의 이것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을 거의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그 동안 그것때문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누가 물어도 저는 그것 때문에 그것을 붙들고 그것을 위해서 산다고 말했었으니까요. 그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면 이 두 가지만 생각하면 힘이 나고 기쁨이 회복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목회라는 일 자체에만 몰두하다가 보니 이 두 가지에 대한 소망과 감격이 흐릿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힘이 드는데 그 힘을 보충하고 회복시켜 줄 원천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행히 제가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은혜를 회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저의 영혼도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다시 평안이 찾아왔고 기쁨도 되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만족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이며,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새롭게하고 회복하는 일에 게을리 하면 오히려 목회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저만 그럴까요? 그리고 목회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목사가 그렇고 목회가 그렇다면 성도인 여러분은, 그리고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를 회복해야 하며, 그 은혜 가운데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일상생활도, 교회를 섬기는 일도 다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건조해 지고 무의미해 지며 불만스러운 이유, 그리고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일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 일 차체가 그런 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르지 않고, 그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말씀의 필요를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흘러들어오는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런 필요가 느껴지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항상 목자되신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을 먹이시기 위해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시되 ‘여러가지로 가르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가지 말씀으로, 많은 말씀으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해가 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가르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그렇게 많은 말씀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르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 동안 혼자서 만족을 위해 방황하느라고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한 양떼들에게 그 모든 말씀들이 다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많은 말씀을 들을 때, 과연 그 모든 말씀들이 전부 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기면서 들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말씀은 자신에게 너무 필요한 말씀이어서 정말 빨아들이듯이 집중해서 들었겠지만 다른 말씀들은 내가 왜 저런 말씀을 들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억지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섬긴 지가 이제 9개월이 지났으니 주일 오전만 해도 꽤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5월달 동안 했던 설교, 특히 지난 주일날 했던 설교만큼 여러분이 집중해서 들으셨던 설교도 없고, 또 이런 저런 직접적인 반응을 보여주셨던 설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지난 주일 설교가 이제까지의 설교 중에서 제일 훌륭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여러분의 영혼에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설교여서 그랬을까요? 제 생각에는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5월의 설교가 가장 현실적인 설교였고, 그래서 팍 와닿는 설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 그리고 자녀양육의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크고 중요하게 피부로 와닿는 문제이니까요.
‘입에서 땡기는 것을 찾아 먹으면 그게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지금 몸이 고기 안에 들어있는 영양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원래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저런 자극적인 음식들을 많이 먹고, 특히 인공조미료에 길들여 지면서 이미 우리는 그런 능력을 많이 상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입에 땡기는 것만 찾아먹으면 오히려 영양의 균형이 깨지고 건강에 손해를 보게 되기가 쉬운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영혼도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살면서 우리를 자극하고 흔들어 대는 현실적인 필요들에 계속해서 노출되면서 그런 필요들만을 크게 느끼는데 익숙해져서 우리 영혼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능력을 거의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감각에만 의존해서 우리 영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항상 놓치고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선호하는 종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호하는 말씀이 들려올 때는 귀를 잘 기울이지만 설교 중간이라도 자기가 별로 관심이 없고 당장 필요하지 않은 주제가 나오면 이내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다른 생각에 빠집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런 부분은 건성으로 보거나 그냥 건너뜁니다. 과연 우리는 그래도 괜챦을까요? 그래도 우리 영혼의 건강과 풍성한 삶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큰 일 납니다. 아이가 계속 한 가지만 먹을 때 부모들이 그냥 내버려 두나요? 아니면 걱정하면서 이것 저것 먹이려고 애쓰나요? 걱정하면서 골고루 먹이려고 애쓰죠?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자기 먹기 싫은 것 계속해서 먹지 않으면 그 부분에서 영양실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우리 영혼도 영양실조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은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리고 영혼이 건강함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 또한 건강하고 풍성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냥 내 감각에만 의지하지 말고 의도적으로 영혼이 편식을 하지 않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부드럽고 잘 넘어가는 음식 뿐만 아니라 단단해서 먹기 어려운, 손이 안가는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음식일 수록 먹으려고 더 많이 애써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배우는 것을 공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당장 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불만이기도 하죠. 왜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느냐구요. 그렇지만 그래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것까지 배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 어디에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장 필요할 때 배우려고 하면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양한 진리를, 때로는 왜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배워야 하는 것은 그 말씀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에게 도움이 되고 능력이 되어줄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정말 많은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꺼운 성경이 정말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들로 채워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 주님도 굳이 많은 말씀들, 여러가지 말씀들로 사람들을 가르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오셨을 때, 그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일부터 시작함으로써 그들을 돌보시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시고 챙겨주셨던 주님은 결코 그런 필요들을 무시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 그런 필요들, 당장의 필요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의 목자되시고 또 그들을 만드신 주님이 보시기에 그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그들의 영혼을 먹이고 또 올바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여러가지 말씀이었습니다. 풍성한 진리였습니다.
예배 때마다 쌀을 나눠주거나 옷을 나눠주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한 주에도 여러차례 말씀을 설교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성경공부를 시키고, 교리를 가르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의 영혼은 여러가지 말씀, 다양하고 풍성한 진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필요하지 않다고, 당장 그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필요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는 주님이 주신 모든 말씀, 그 모든 진리가 다 필요합니다. 필요없다고 느껴지는 그것까지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들려오는 모든 말씀, 눈에 보이는 모든 진리에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집중하여 경청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말씀들이 필요하고 그 모든 말씀들이 우리 영혼과 삶의 건강과 온전함을 지탱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잘 들리지 않는 말씀일수록, 지금 당장 관심이 가지 않는 말씀일수록 더 열심히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말씀과 풍성한 진리로 인도를 받아서 더 이상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며 굶주리지 않는 주님의 우리 안에 있는 양과 같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