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701to13 -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가32).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7장 01-13절
저는 설교준비를 하려고 본문을 읽고 묵상하다가 내가 그 본문이 기록된 시대, 그 장소에 살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본문이었습니다. 반쯤은 농담스러운 생각이기었지만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야. 정말 저 시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 이유는 제가 손을 그렇게 자주 씻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며칠에 한 번씩 씻는다든지, 손에 뭐가 묻어도 씻지 않는다든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밖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손을 씻지 않고, 또 밥 먹기 전에 꼭 손을 씻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이만큼 건강하게 살아왔으니 그것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닌가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신경쓰이지 않는 일은 잘 안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손 씻는 일입니다. 손을 꼭 씻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손을 씻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생기질 않으니 손을 자주 씻을래야 자주 씻을 수가 없죠. 만약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꼭 손을 씻어야 한다든지 식사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든지 하는 규칙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저같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끼어 있었다면 제가 바로 손도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 중에 속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 놓고 보니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앞으로 제가 악수를 청하면 피하시는 분들이 많아질까봐 말입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24,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시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부는 호수 위를 걸어 가셔서 곤경에 처한 제자들을 곤경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게네사렛 지방으로 건너 가셔서는 자신을 찾아오는 모든 병자들을 고쳐 주셨는데,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일은 제자들만 목격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두 사건은 그 어떤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고 또 경험할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행해진 일들이었기 때문에 이 일들로 인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 이전보다 더 빠르고 강하게 유대 땅 전체로 퍼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 당시의 도로사정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예루살렘에서부터 게네사렛까지, 요즘을 기준으로 해서 180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를, 예수님을 만나려고 달려왔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거기까지 오는 동안 예수님에 대한 이런 저런 놀라운 소문들을 들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문의 장본인을 눈 앞에 놓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성경은 그들의 첫번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물론 우리는 이 사람들이 왜 그 먼 거리를 달려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조사관으로 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고 그것을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만큼 그 역할에 적합한 사람들은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다른 것은 다 놓아두고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만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 때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근처에 모여 있었을 텐데, 그리고 여전히 그 곳에서도 병을 고치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을 텐데, 그 모든 것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어떻게 제자들, 그것도 다도 아니고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을까요?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제자들과 예수님의 행동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으면 그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 수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그런 곳에서 제자들 몇 사람이 손을 씻었는지 씻지 않았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을까? 감탄스럽기가 그지 없습니다.
물론 그 당시 유대 땅에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사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3절의 괄호 안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이라고 말하면서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일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지켰고 또 지켜야만 하는 장로들의 전통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손을 씻는 것은 단순히 깨끗하고 더러운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냐 부정하냐를 결정짓는 조건이었고 나아가서는 이것으로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구분짓기도 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들 스스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 그러니까 대대로 그들을 가르쳐온 율법 선생들이 정해놓은 전통이고 또 관습이었습니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규정은 레위기에 나오는데, 거기를 보면 손을 씻어야 하는 것은 제사장과 제사장의 식구들에게만 한정되어 있고, 그것도 제물을 음식으로 삼아 식사를 할 때에만 그렇게 해야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제물은 음식이 되었어도 여전히 제물이기 때문에 그 제물이 더럽혀져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그래서 그 제물을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제사장과 제사장의 식구들은 손을 씻어 다시 자신을 깨끗하게 한 후에 그것을 먹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선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제사장과 제사장의 식구들을 모든 유대인들로 확대했고, 제물을 모든 음식으로 확대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한 의도는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정결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좋으니까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서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을 호재를 잡은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바로 이렇게 따지고 듭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습니까?” 너무나 당당하게 따지고 들었지만 사실 이 말 속에는 그들의 심각한 오해가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의 말대로 라면 그들은 전혀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비난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이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을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과 부정함을 결정짓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정결함과 부정함에 대한 기준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다 정당한 것입니다. 정결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레위기에 나오는 기준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불리는 기준들은 어떻습니까? 지키면야 좋은 것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절대로 정결함과 부정함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정결함과 부정함이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라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합니다.
원래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율법 주변에 둘러친 울타리였습니다. 율법 자체만을 지키려고 들면 너무 예민하기 때문에 그것을 여러 개의 금지사항으로 둘러싸서 훨씬 더 큰 안전지대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로들의 전통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권장사항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것들이 율법의 자리를 차지했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언젠가 부터 이런 것들 때문에 왜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무엇을 요구하신 것인지 이런 것들이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잔디밭을 보호하자고 쳐놓은 울라리 때문에, 사람들이 잔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어서 결국에는 잔디가 죽어버리는 일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될 때, 꼭 함께 발생하는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굳어진 울타리들은 꼭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나누고 평가하는 딱딱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지키지 않는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키지 않는 사람을 자기가 속해 있는 원 밖으로 몰아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본질적인 것도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중요한 것처럼 붙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과 그 말씀의 진짜 의미나 요구는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특히 한국 교회에도 이런 모습이 꽤 많습니다. 처음에는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돕자고 생겨난 기준들이나 혹은 권면들이 나중에는 성경의 교훈처럼 굳어져서 사람들을 옭아매고 또 서로 간의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더 심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저 사회적인 관습이나 원리들, 그것도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는 나중에는 성경적인 원리와 교훈들을 밀어내는 경우입니다. 관례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또 그저 개인적인 취향이나 성향에 불과한 것이 권위라는 옷을 입고 힘을 얻게되는 경우는 더더욱 심각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관습들을 생각하거나 혹은 어떤 주장을 하거나 의견을 말할 때, 이것이 과연 성경적이고 본질적인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에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성경적인 원리를 거스른다면 그것은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취향이나 방법이 달라서 생겨나는 차이라면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너무 강하게 이야기되고 주장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결국 언제 장로들의 전통이 되어 신앙에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깨뜨리게 되기가 쉽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그야 말로 전통입니다. 전통이라는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든지 덧붙여지거나 빼질 수 있고, 또 변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으신 기준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것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전통을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함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아놓고서도 그것을 어겼다고 그렇게 노발대발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이것은 그야 말로 자기 무덤을 판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그들의 고소 자체가 자신들의 치명적인 잘못을 드러낸 것이었으니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말을 받아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셨습니다.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 일이 예수님 보시기에 그만큼 심각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말씀을 살피는 우리들도 무게를 가지고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주님의 말씀에서 사용되는 ‘외식’이라는 말은 위선이라는 뜻이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그런 뜻과 더불어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하느라고 하는데, 정말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문제삼고 계신 것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진짜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 그리고 감정과 인격이 모두 들어있는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은 전적으로 마음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해야 하는 문제이며,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의 말이나 행동은 적어도 아무리 종교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이 계속되면 그것은 이사야의 말씀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멀리하는 외식이 되어져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외식의 문제를 거론하시면서,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이 말씀 속에는 왜 사람들이 외식에 빠지는가, 왜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정작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안타까운 상태가 되어, 헛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그냥 신앙생활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는 헛된 신앙생활도 있고 우리의 신앙도 언제든지 헛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신앙이 헛된 것이 되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중요한 해답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사람의 계명, 그러니까 사람이 정한 신앙의 방법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게 되면 그 때부터 신앙은 헛된 것이 됩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고 그럴듯하게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해 버린 대표적인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은 ‘고르반’이라는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 사람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로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아주 좋은 것이었죠.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상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절대적인 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냥 말로만 ‘고르반’이라고 하고 나중에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도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기준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그냥 그 사람의 수중에 남아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불효자식들이 악용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것을 마땅히 부모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기가 싫습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고르반’을 선언 합니다. 그러면 일단은 부모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아도 되죠. 그러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기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랍비들은 일단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니 사람에게만 사용되지 않으면 된다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부모에 대한 의미를 회피하는 합법적인 편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르반’이라는 제도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종종 사람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대개 한 가지를 택하고 한 가지를 포기하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피치 못하게 그렇게 해야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그렇지만 우리는 곰곰히 그리고 정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하고 하나는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지,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혹시 둘 다 챙길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나의 편의를 위해서, 그리고 실은 반대편의 의무를 다하기 않기 위한 핑계로 사용하기 위해서 다른 한 편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하는 결정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고르반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중에 주일날 친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방법은 될 수 없겠지만 잘 적용하면 충분히 하나의 대안이 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일단 주일에는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한다. 이것을 원칙으로 세우는 것만큼은 양보하면 안된다. 그러면 친지의 결혼식은 어떻게 하느냐? 축의금을 두 배로 보내라. 10만원 할꺼면 20만원 해라. 미리 만나서 손에 쥐어 주어라. 그리고 아주 간곡하게 사과하고 양해를 구해라. 그러면 대개 다 이해해 준다. 문제는 그냥 축의금도 없고, 설명도 없이 가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 분명히 여기서 벗어나는 상황은 있겠지만 일리는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피치 못해서 참석해야만 한다고 할 때는 또 방법이 있습니다. 1부 예배가 있는 교회를 찾아가서 1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니면, 저녁예배나 오후예배에 참석하구요. 새벽이나 밤에 결혼하는 사람들은 없으니까요.
결혼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죠. 무언가 두 가지가 부딛힐 때는 항상 이런 고민을 해야하고 또 최선을 다해서 둘 다 할 수 있는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학생들의 경우 시험공부를 하는 일이 이런 경우가 될 것입니다. 시험공부와 주일을 지키는 일이 부딛힐 때는 적어도 이런 고민을 해야 하고 정직하게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정말 시험공부 때문에 주일 하루 한 시간 예배드릴 시간조차 없는지, 주중에는 단 한 시간도 낭비함이 없이 공부했는데도 여전히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서 그 한 두 시간도 꼭 공부하는데 사용해야 하는지, 예배를 드리고 나서 나머지 시간에 공부하면 정말 시험을 망치게 되는 것인지,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시험문제 한, 두 개 더 맞추는 일보다도 더 가치없는 일인지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꼭 정해진 하나의 법을 지키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노력이 있어야 하고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어떻게 하면 둘 다 아우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선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챙기면서도 나머지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고 하면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도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런 저런 노력도 고민도 하지 않은 채로 둘 중의 하나를 손쉽게 생략한다면 그것은 둘 중의 하나를 일종의 ‘고르반’으로 삼아서 편리함이나 혹은 자기가 원하는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고르반’은 마음이 담기지 않은 신앙생활, 그래서 하나님을 헛되게 섬기는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앙에 참된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그 신앙은 정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신앙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그런 신앙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먼 사람들에게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고 게네사렛 지방에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께서 눈 앞에 있어도 그 분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 대신 손을 씻지 않고서 음식을 먹는 몇 명의 제자들만 보일 뿐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머니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한 번 가만히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자꾸 하나님께서 중요하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신 사소한 것이 자꾸 눈에 걸리고 그것이 내 마음을 많이 어지럽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눈에 보일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꼭 한 마디 하고 짚고 넘어가야만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둘 다 챙길 수 있는데, 충분히 신앙을 우선으로 하면서도 현실을 챙길 수 있는데 자꾸 손쉽게 한 쪽만을 챙기면서도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면서도 정작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기를 원하는 데는 둔감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우리의 모습 속에 이런 모습들이 있다면 지금 우리의 신앙에서 마음이 빠져나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느 정도는 나의 신앙에서 마음이 새어나가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이 빠진 신앙은 헛될 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신앙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함을 잊지 말고, 그렇게 마음을 채우려고 애써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신앙에 우리 마음을 채울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 속에서 고르반이라는 빈 그릇은 저절로 줄어들게 될 것이며, 또 우리의 섬김은 헛된 섬김이 아니라 꽉찬 섬김,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섬김이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가득한 꽉찬 신앙생활을 하셔서 항상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는 기쁜 신앙생활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