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창세기 3장 8-13절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자 마자 아담과 하와 두 사람에게 일어났던 첫번째 사건은 자신이 벗을 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벌거 벗고 있다고 놀려댄 사람도 없고, 손가락질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저 부끄러웠습니다. 수치스러웠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스스로가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간은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나 남들에게나 혹은 하나님 앞에서 조차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죄는 우리 속에 원래는 없었던 수치심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치심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가리고 또 감추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해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수치심이란 원래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우리 속의 온전함이 깨어지게 됩니다. 점점 더 속 사람의 모습이 추해지며 아름다움을 잃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떳떳하고 건강한 감정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수치심의 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느끼는 수치심은 그렇게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들키게 될까봐 느끼는 감정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죄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또 다른 이들 앞에서도 자신을 가리게 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깨뜨리고 갈라놓게 됩니다. 그것이 비록 서로가 서로에게 행한 잘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만듭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첫 구절을 읽을 때마다 참 속이 많이 상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죄 때문에 잃어버리게 된 너무나 소중한 것을 생각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원래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친밀하고 행복한 관계를 생각하곤 합니다. 하루 종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지으신 세상을 돌보고 관리합니다. 그리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십니다. 그러다가 해가 지고 서늘한 바람이 불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담과 하와가 하루 종일 수고하여 돌보아 더 아름다워진 동산을 거니십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는 달려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기쁘고 풍성한 교제를 나눕니다. 아마도 이런 아름답고 행복한 광경은 그 동산에서 매일같이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 먹은 그 날은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 날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은 찟어지듯이 아프고 화가 났겠지만 똑같이 동산으로 내려오셨고, 그렇게 동산을 거니셨습니다. 그런데, 달려나와 하나님을 맞이해야할 아담과 하와는 보이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달아나 나무 뒤로 몸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는 인간 자신의 속 사람의 온전함을 부패하게 만들고 망가지게 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멀어지게 했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죄는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사야의 말처럼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어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은혜도 끊어지고, 기쁨도 사라지고, 풍성함도 없어지게 만듭니다. 이것이 죄가 만들어 낸 가장 심각한 어려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 아담과 하와를 부르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훤히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른 날과 똑같이 동산에 내려오셔서 마치 아무 것도 모르신다는 듯이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스스로 숨은 곳에서 나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계속해서 숨은 채로 대답합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벗은 것과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인간은 이상하게도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처음 만들어 낸 것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이었다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만들어 낸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우셔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너에게 알려주었느냐? 네가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었느냐?” 이렇게 물으시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라는 대답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아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자기가 먹기는 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책임은 자신에게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냥 보면 마치 여자의 핑계를 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만드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하와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를 바라셨지만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담의 이야기도 그리고 하와의 이야기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담은 하와가 주어서 먹었고 하와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아담과 함께 있게 했습니다. 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사실들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자신이 한 것입니다. 뱀이 꼬셔도 먹지 않으면 되고, 하와가 꼬셔도 받아먹지 않으면 됩니다. 최종적으로 열매를 먹은 것은 아담과 하와 자신들의 의지로 선택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 남의 핑계, 심지어는 하나님의 핑계만 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성입니다. 죄는 일차적으로 관계를 깨뜨립니다. 처음 죄 자체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고, 또 하나님께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죄는 그 죄의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야 가책과 부끄러움, 그리고 속불편한 두려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더 심각하게 망가뜨려 버립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망가뜨려 버립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큰 어려움을 당할 때 다른 이들 탓을 하고 하나님 탓을 하고, 심지어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주변환경이나 운의 탓을 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보였던 모습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죄는 자신과 자신의 관계,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심지어는 자신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를 망가뜨립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죠. 그런데, 가만히 보면 물론 이미 저질러진 죄를 제 자리로 되돌릴 방법은 없지만, 실은 그 죄가 우리의 삶에 더 심각한 상처와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되지 않는 죄는 항상 가려지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책임전가가 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 책임전가가 서로를 향한 원망과 분노를 만들어 내고, 그러는 과정에 관계를 깨뜨리고 자기 자신은 비겁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저지른 죄와 처음 생겨난 문제들을 제 자리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잘못을 환경이나 다른 사람, 그리고 하나님께 전가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그 죄 때문에 우리 자신과 주변을 둘러싼 것들과의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죄 용서의 은총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때로 죄를 짓게 되더라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저질저진 죄악들이 더 이상 우리 자신과 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임전가와 핑계는 이미 저질러진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죄는 그저 인정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고통스럽다고 책임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고 또 핑계를 댄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많은 상처와 아픔과 깨어짐을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셔서 하나님의 용서가 만들어 내는 회복과 치유의 은혜 속에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