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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7.17.새벽예배 -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세기 19)


창0401to07 -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창1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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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창세기 4장 01-07절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 열매와 죽음을 가져오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 중에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도처에 널린 죽음의 흔적들을 맞닥뜨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땅이 내는 가시와 엉겅퀴, 그리고 땀을 흘려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수고로움.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처럼 자신들의 삶이 생명으로 충만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그 이전에는 아얘 죽음을 몰랐던 두 사람에게는 굉장한 두렵고 허무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 커다란 선물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손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은 점점 죽음으로 가까이 가며 살아가야만 했던 두 사람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아담과 하와 사이에 첫째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담은 정말 정말 기뻤던 것 같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얻었다’라는 의미의 ‘가인’이라고 지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 아담은 자신이 가인을 낳은 것이 자신이 다시 태어나는 것과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허락받은 것처럼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후에 아담에게 둘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담은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벨’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벨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안개’, ‘없음’을 뜻하는 말로 인생의 허무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그렇게 환호했던 아담이 왜 둘째 아들을 낳고는 왜 인생의 허무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동안 아담은 여러가지 일로 인해서 아무리 자신이 아이를 낳고 또 낳아도 자신의 삶은 여전히 허무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다시 흙으로 돌아가 없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은 그 인생이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여전히 허무할 뿐입니다. 우리가 얻는 것으로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인생이 가지는 허무함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허무함을 해결해 줄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우리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하나님에게서 오는 해결책이 꼭 필요합니다. 그 해결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우리 안에 있는 허무함의 문제는 비로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연결될 수 있으며,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영생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확신하지 못하는 인생이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벨’, 그러니까 ‘허무함’ 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들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허무함에 시달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수록 우리 삶은 허무함과 그만큼 더 상관없어 집니다. 허무해 지는 순간이 오기 전에 예수님을 철석같이 믿고 붙들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득 문득 오늘의 아담과 하와를 갑자기 찾아오는 허무함의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허무함이 느껴지거든 그럴 수록 더욱 더 예수님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그 믿음이 여러분의 허무함을 해결해 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아담은, 그리고 하와는 허무함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 질병을 치료할 약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가인과 아벨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후이니 아마도 가을철이 지난 계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 자신이 한 해 동안 얻은 것들을 제물로 삼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농사지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했습니다. 가장 인기있는 설명은 가인은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은 즉, 죄사함이 없다’는 구절을 증빙자료로 삼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첫째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죄용서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감사제였고, 구약의 제사에는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피흘리는 제사를 명하신 것은 실제로 출애굽 이후였습니다. 그러니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로 보아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는 속죄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예배만 드리면 항상 기쁘게 받아주실까요?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배를 드리는 많은 성도들을 바라보면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저 예배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전혀 긴장도 없고, 기대도 없습니다. 그 예배가 믿음으로 드려져야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래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거기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성도 여러분,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보이십니까? 가인은 그냥 땅에서 얻은 것을 아무거나 드렸습니다. 첫 수확물이나 가장 귀한 것을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그 해에 첫번째로 태어난 양을 구별하여 한 해 동안 잘 키웠고, 그것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가인이 대충 드렸다면, 아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그래서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의 모습 속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존중과 사랑이 베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최선의 것, 최선의 마음과 최선의 태도, 그리고 최선의 믿음을 드리려고 애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가인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되고 믿음없는 태도는 제사를 드린 후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제사가 끝난 후 가인의 태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정말 놀라운 기록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난 오늘 네 예배를 받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다음에는 정말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가인은 속으로 엄청난 화를 품었고 그것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가인은 아벨과는 달리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정도로 스스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가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적선하듯이, 내가 이 정도 애썼으면 하나님은 꼭 내 제사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사가 거절되었습니다. 그러니 가인은 불같이 화가 났던 것입니다. ‘감히 나의 제사를 받지 않다니!’라는 생각이 솟구쳐 올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안색이 변하다니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이유로, 이런 태도를 보일 수 가 없습니다. 제사를 받고 받지 않고는 완전히 하나님의 권한인데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큰 불만을 보인다는 것은 이미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계시지 않는다는 뜻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가인의 제사를 받으실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면 그 사람도 받으십니다. 제물을 받지 않으시면 그 사람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들 또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와 예배드리는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서 예배자를 확인하시고 또 그 예배자를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예배는 받드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는 곧 예배자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거절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거절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허무함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믿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는 준비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도 또 우리들도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그 분이 주시는 은혜로 우리를 공격하는 허무함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벨을 닮은 참된 예배자로 살며 또 예배드려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충만하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