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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7.31.수요예배 -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린도 전서 7)



고전0126to31 -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전7).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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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전서 1장 26절 – 31절


영어에 something이라는 단어와 nothi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something은 어떤 것이라는 뜻이고 nothing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이 말이 사람에게 사용될 때는 something은 대단한 사람, 존재감이 확실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nothing이라는 말은 반대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 있으나 마나한 사람, 존재감이 미미한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중요한 사람, 존재감이 확실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그 반대편에 속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싫어합니다.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고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거꾸로 있으나 마나 표시가 나지 않는 사람으로 살거나 크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something이 될 기회가 주어지고 능력이 있으면 그렇게 되고 싶어하지 nothing으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런 욕구가 가장 커진 시대이고 그래서 겸손과 겸양이 미덕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자기를 드러내고 선전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과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로 취급받고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개인과 개인이 만났을 때는 그런 모습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직장이나 어떤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자리에서 겸손은 전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을 중요하고 존재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건들 중의 하나라도 갖추게 되면 그것을 드러내어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런 조건이 없으면 가족이나 아니면 먼 친척, 사돈의 팔촌이라도 내세우고, 또 연결해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야기 해야만 속이 편안합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의 권사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권사님들쯤 되니 이제 손주들이 생기고 또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권사님들이 모이시면 자연히 손주들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손주보다 이쁜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이야기가 자꾸 손주들 자랑으로 흘러가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게 재미였고 애교였지만 나중에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서로 경쟁심이 생기게 되었고, 특별하게 자랑할 거리가 없는 손주를 둔 분들이나 혹은 손주가 없는 분들은 괜히 기가 죽게 되었습니다. 기분도 좋지 않았겠죠.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언제부터인가 손주자랑을 하려면 먼저 만원을 벌금으로 내놓고 하자는 벌칙아닌 벌칙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이것 때문에 손주자랑을 비롯해서 다른 자랑을 하는 것도 많이 줄어들었고 또 그런 자랑이 과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들도 자각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에게 있는 자기 과시의 욕망, 무언가 자신이 대단하고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또 그렇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심은 본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자꾸 어떤 사람의 인생이 자신을 증명하려는 과정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인간의 이런 모습은 결코 건강한 모습도 아니고 바람직한 모습도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보면 이것은 교만의 한 종류이며, 그래서 꼭 처리해야  할 영적인 질병이기도 합니다. 자랑하는 것, 그것은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남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지 모릅니다. 남들이 나를 부러워하는 시선을 느끼는 일은 우리를 얼마나 부풀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은 그렇게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시겠습니까? 아마도 이런 사람을 만나는 일을 즐거워 하거나 또 그런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 개인을 보아도 자기를 과시하려는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 그래서 끊임없이 자랑거리를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더 가볍고 별로인 사람이 되어져 갑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그런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을 때, 내세울 것이 없을 때는 우울해지고 의기소침해 집니다. 또 자랑할 것이 있어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불쾌해 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굉장히 민감해 지고, 또 쉽게 화를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은 결국 인간관계도 망가뜨려 버립니다.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는 반목과 멸시가 생겨나고 또 서로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결국 갈등과 거친 경쟁이 생기게 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을 위해서 자랑거리를 만들며 살아가는 삶은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함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결코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자기를 과시하며 자랑거리를 만들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자랑거리가 있을 때는 우쭐대며 없을 때는 의기소침해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자랑할 때는 조금 불쾌해 하면서 살아가도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이러한 태도와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이 되고 또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들은 항상 문제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반드시 처리해야만 하는 그런 문제가 됩니다. 


처음에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들 중 대부분은 정말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지혜로운 사람들도, 힘을 가진 사람들도, 그리고 귀족가문에 속한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고린도가 경제적으로도 풍요하고, 또 철학을 비롯한 학문도 굉장히 발달되어 있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대부분은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something이 아니라 nothing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안에 별로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 것은 단순히 그런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유와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름답게 포장되거나 또 고상하게 꾸며진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도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신 투박하고 거칠기만한 피묻은 십자가를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은 첫번째로 복음을 듣는 그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음식을 달게 만들면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짜게 만들면 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포장되고 꾸며진 복음은 그런 모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것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그런 복음은 사람을 차별하는 모양이 됩니다. 이것을 막으려면 복음은 있는 그대로 전해져야만 합니다. 두번째는 그렇게 해야 복음을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지혜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은 자신의 지혜와 총명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와 자신의 총명을 믿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총명을 소용없게 만들기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였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면 결코 물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몸에서 힘을 완전히 빼고 자기를 건져주기 위해서 물에 뛰어든 사람이 끌고 가는데로 끌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복음이 인간의 지혜와 총명을 소용없이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지혜와 총명에 의지하고 있는 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복음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파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오히려 인간적인 기준에서 보면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탁월하게 지혜롭게 주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모든 조건이나 자랑들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만들어 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랑하지 못하게, 자랑할 필요가 없게 만듭니다. 그러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그렇지 않고서 받는 것은 구원이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그렇습니다. 첫째로는 내세울 것 없고 자랑할 것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자랑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복음은 결국 그런 역할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2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거의가 다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 누구도 주목해 주지 않고 그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혀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다함없는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한 출세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온 세상의 주인이며 왕이신 분들께 참으로 가치있는 사람들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을 받을 때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 어렸을 때 부모를 잃어버려 길거리를 방황하며 살던 거지소년이 나중에 부모를 찾게 되고, 알고보니 그 부모가 억만장자였을 때, 그 소년에게 일어나는 것보다도 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한 쪽은 이제 그 부유한 부모님의 돌봄 속에서 풍요롭고 자유로우며 평안한 삶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다시 찾은 부모에게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이전보다 더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누리기 위해서 자랑하며 뻐기며 또 예전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며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의 평범한 성도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인 상태에서 그리고 세상적으로도 아무런 내세울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야 말로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바닥인 상태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감격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저 하나님 안에서 얻은 새롭고 귀한 신분과 복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랑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그렇기 때문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주신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낮은 자리에서 건져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받은 은혜를 오히려 다른 이들과 경쟁하며,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조건으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간증을 들어보면 자꾸 이런 이야기가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들어보면 결국 자기자랑이죠. 사실 간증은 대부분 이렇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증을 하거나 듣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간증은 원래 이런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잘못했는데, 이렇게 실패했는데, 내가 한 것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간증이 내가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가 되면 그것은 내 자랑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받은 것 중심이 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자랑거리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것을 막으려면 우리는 항상 우리의 실패를 기억해야 하며, 자격없는 나에게 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고린도의 성도들 중 낮은 자리에서 부름받은 성도들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낮은 자리에서 부름받은 은혜를 자기 자랑거리고 만들고 말았습니다. nothing의 자리에서 something의 자리로 끌어올려주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대신에 something이 된 것만을 자랑하는 자리로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받으신 은혜가 있으십니까? 낮은 자리에서 받은 은혜가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항상 그 자리를 잊지 마시고, 그 자리에서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항상 겸손을 유지하시고 감사를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유는 첫번째로는 이렇게 그들 자신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겸손하게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 사람들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이미 가졌다는 사람들, 많이 안다는 사람들, 그래서 구원을 자기 힘으로 얻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있고 또 바른 사람들일수록 자기를 신뢰하는 실수를 하게 되기 쉽습니다. 심하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잘해서 은혜를 얻었고, 내가 잘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something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내세울 것 없는 성도들을 많이 두신 것은 이런 사람들을 위한 안전장치였습니다. 그것은 이런 이치에서 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아무 것도 자랑할 것 없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은 것을 보게 될 때,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구원의 은혜와 자신이 아는 것, 가진 것, 그리고 자신이 행한 선한 일 등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교회 안에 자신과 같은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으로는 유리한 조건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굉장히 불리한 조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귀한 은혜에 더 크게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고 또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은 인간적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사실 예수를 믿는데는 불리한 조건입니다. 그런 것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큰 부자는 예수를 진짜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누군가 하면 아는 것 많고 가진 것 많으면서도 양심껏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많은 성도들을 만나고 또 심방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내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별로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드문 은혜, 그리고 깊은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부자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믿음을 지켜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자랑할 것 있었던 성도들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자랑했고, 그것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했으며, 또 자기들 끼리도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시고, 그래서 더 겸손하도록 하셨지만 자신이 받은 은혜보다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 그리고 가문 같은 것들을 내세우며 교회를 힘들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자의 자리, 식자의 자리, 그리고 가문좋은 자리에서 부르셔서 내세울 것 없는 성도들 사이에 두신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들을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서 스스로를 something으로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이 정말 대단한 이유가 어디있을까요? 복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려보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 세상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그 일을 복음이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복음은 낮은 자들을 높입니다. 그 어떤 사람의 주목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을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겨 주시는 자리로 높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기가 죽거나 슬픔에 빠져있지 않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교만하지 않게 합니다. 복음은 항상 자신이 구원받은 낮은 자리를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 복음은 스스로 높아진 자들을 낮춥니다. 자신의 높은 자리가 구원을 받는데는 전혀 소용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실은 많이 불리한 자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서 높아진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낮추게 만듭니다. 이렇게 낮은 자는 높이시고, 또 높은 자는 낮추셔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높고 낮음이 없는 ‘형제들’로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참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자리가 어디였든지 간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잊지 않으며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복음은 부자이든 가난한 자든, 그리고 배운 것이 많은 적든, 내세울 것이 있든 없든 간에 자신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리가 어디입니까? 낮은 자리입니까? 높은 자리입니까? 낮은 자리는 너무 낮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자리이고 높은 자리는 사실 너무 높아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 복음을 듣고 구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받을 수 없었고 또 누릴 수 없었던 그 은혜의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감사해야 합니까? 또 얼마나 많이 겸손해야 합니까? 


이런 우리가 자꾸 교만해지고 자기를 자랑하고 또 주장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자리에있다가 이 은혜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그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려도 별 상관이 없지만 성도는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리를 잊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내가 구원을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고, 그래서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기억이 희미해 지고, 그래서 그 감사와 감격이 흐려지는 순간부터 자기 자랑은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스스로를 something으로 주장하고 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그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일까요? 그래서 자랑하는 재미도 없이, 낙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분명히 인간은 무언가를 자랑하며 살아가도록 지음받았습니다. 그래서 자랑거리가 있어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애석하게도 진짜로 자랑해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래서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덧붙여진 일너 저런 것들, 결코 자랑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진짜 자랑해야 할 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진짜로 자랑해야 할 것을 자랑하면서 살아가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게 우리의 본래의 자리, 가장 행복한 자리이니까요.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왜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우리를 낮추시기도 하고 또 높이시기도 하셨을까요? 왜 그렇게 모두가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하셨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덧붙여진 것을 자랑하지 않고 진짜로 자랑해야 할 것을 자랑하며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1절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자랑하라는 것도 아니고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조금 애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무슨 뜻인지 명확해 집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무엇을 가장 크게 자랑하면서 살아갈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을 가장 크게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자랑한다면 돈이 제일 그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자식이 그렇기 때문이구요. 지식이라면 지식이, 특별한 능력이라면 그 능력이 그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크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실은 ‘주님을 기뻐하라’는 말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다른 것을 기뻐하지 말고 예수님을,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기뻐할 수 있는 상태가 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기뻐해도 됩니다. 주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기쁨을 얻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랑해도 됩니다. 아니, 그렇게 자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자랑하고 또 자신에게 덧붙여진 것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굳이 스스로의 힘으로 something이 되고, 또 스스로 something인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끙끙대며 살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뻐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 안에서 자랑할 수 있게 되면 우리가 우리가 무엇을 가졌든지 가지고 있지 않든지, 그리고 어떤 능력이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자신의 소중함을 인정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행복하고 당당한 삶을 살 수 있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고픈 욕심은 우리에게 잠시잠깐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랑은 그 댓가로 우리를 우리 스스로에 얽어매고 쓸데 없는 교만과 열등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참된 기쁨이 없는 죄인의 자리에 남아있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그 곳에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알려주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게 해주고 또 하나님을 자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갈 있는 자유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굳이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something이 되려고 하거나,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아도 되게 해 줍니다. 복음은 이렇게 죄도 해결해 주고, 자유도 선물해 줍니다. 


이것이 복음이 구원얻는 자들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능력이 되는 이유입니다. 모두가 이 능력을 붙으시기 바랍니다. 자유케 하는 복음의 능력, 하나님을 기뻐하며 자랑하게 하는 능력,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는 능력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항상 내가 어떤 자리에서 부름을 받았는지, 그것을 기억하시고 또 기억하셔서 항상 그 감사와 겸손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