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8.16. 금요기도회 - 아나니아와 삽비라(사도행전 26)



행0501to11 - 아나니아와 삽비라(사도행전26).pdf


20130816FE (#01).mp3.zip




본문 : 사도행전 5장 1-11절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은 실은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를 굉장히 불편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한 부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다가 그것이 들통나서 그 자리에서 모두 목숨을 잃은 너무도 충격적인, 그렇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사건을 그저 짧은 기록을 통해 듣는 우리도 이렇게 당혹스러운데, 그 일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더 당혹스럽고 두려운 사건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도행전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교회역사의 정점에 해당하는 곳에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고 우리를 위한 중요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밭을 팔았습니다. 바나바처럼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내놓기 위해서 였습니다. 정말 대단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얼마를 따로 떼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숨겨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아내인 삽비라도 알고 있었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부부는 이래서는 안됩니다. 좋은 일에는 마음과 방향을 함께 해야하겠지만 나쁜 일, 옳지 않은 일일 때는 같은 방향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의 경우처럼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요즘에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너무 쉽게 신앙도 양보하는 분들이 허다한데 그건 결코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혜롭게 해야 할 필는 있겠지만 신앙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가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가르치실 때마다 꼭 그렇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먼저 아나니아가 자기 재산의 일부를 들고서 사도들에게로 가지고 갔습니다. 본문에 나와있지는 않지만 베드로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이 땅을 전부 팔아서 그 전부를 내놓는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교회의 멤버가 되려면 전재산을 헌납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습니다. 전재산이든, 그 일부이든, 아니면 바치지 않든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결정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서 받은 돈의 일부는 숨기고 일부만을 내놓으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가 땅 판돈의 일부를 내놓은 것이 그의 순수한 신앙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바나바를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아 가난한 성도들을 섬긴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는데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가 그렇게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 앞에 내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또 그렇게 한 이후에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 사람에게는 자신들도 바나바처럼 교회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다는 유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재산을 헌납하기로 합니다. 물론 이들 또한 예수님을 믿었고,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교회에 내놓을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직은 가진 땅을 전부 팔아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내놓을 정도로 신앙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도 남아있었고,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대한 강한 욕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땅을 팔아서 일부는 숨겨놓고 일부를 내놓으면서 그게 전부라고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애석하게도 이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돈도 챙기고 교회의 인정도 챙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이 두 사람이 교회를 속이고 살아남았다고 했을 때, 과연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이 원하는 칭찬과 인정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바나바가 교회의 인정과 칭찬을 얻은 것은 그가 단순히 전재산을 내놓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랬을 뿐만 아니라 바나바, 그러니까 위로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신앙도 인격도 아름다웠던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전재산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런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돈에 매달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돈으로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잠깐동안은 명예든 칭찬이든 돈으로 진짜와 비슷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잠깐 놀란 것뿐이지 그 이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그 사람의 나머지 삶과 인격이 그 행동을 뒷받침 해 주지 않으면 결국 그 행동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 잠시 동안도 속거나 놀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참된 마음은 참된 것으로만 움직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의 마음은 100퍼센트 순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항상 무슨 행동을 할 때 거의 자동적으로 ‘내가 이렇게 하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하는 행동과 그런 생각과 싸우면서 그래도 선한 일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엄언히 다릅니다. 완전히 순수해 질 때까지 선을 행하지 않고, 또 하나님께 물질적인 헌신을 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내가 가진 것으로는 이웃도 하나님도 섬기지 못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습니다. 땅을 팔아 절반만 교회에 헌금하고 나머지는 숨겨놓으면 돈도 챙기고 명예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저절로 그렇게 될 때가 대부분이니까요. 그렇지만 생각은 생각에서 그쳐야 합니다. 유혹은 유혹 자체로 끝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과 싸우고 유혹을 이겨낸 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아무런 유혹이 없을 때 선을 행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내 것이 아까운 줄 알면서도 선한 일에 사용하고, 돈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정말 선으로 악을 이긴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실 것이고 또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하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죄와 악의 유혹을 그만큼 더 쉽게 이겨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들로 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또 그만큼 더 나의 인격과 생각도 성숙해 갈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돈을 받은 베드로는 이미 성령님 안에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통해서 죄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첫번째로 아나니아는 사탄으로 가득 찬 마음에서 그런 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나니아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처음 사탄이 그에게 악한 생각을 하게 했을 때, 그것을 계속 품고 있었던 것은 아나니아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생각과 유혹은 오래 품고 있을수록 내가 불리해 집니다. 나쁜 생각이나 죄의 유혹은 찾아왔을 때 곧바로 처리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유혹도 강해집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시간을 끌수록 우리 마음에서 사탄이 차지하는 영역이 넓어집니다.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둘째, 마지막으로 실행에 옮긴 것 또한 아나니아 자신의 의지이지 다른 것의 핑계를 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핑계를 대는 것은 동생 사탕을 몰래 먹고나서 내가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손이 그랬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짓는 죄는 세상에 없습니다. 죄는 항상 마지막에는 우리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둘째로 교회를 속이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거짓으로 교회를 속이고 명예와 칭찬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가 명예욕에만 빠져 있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결코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전입니다. 성령님의 거처입니다. 그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를 상대로 해서 죄를 짓는 것은 모두가 성령님께 대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도 순간적인 실수라면 그 죄가 그렇게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나니아의 경우에는 밭을 팔기 이전부터 그렇게 하려고 계획을 짜고 마음을 먹고 있었으며 결국 실행에 옮겼습니다. 계획적으로,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대해서 저지르는 죄악들은 모두가 다 성령님께 대한 심각한 죄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계획적인 범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비록 성도 한 사람에 대한 죄처럼 여겨져도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 죄는 교회 전체에 대해서 저지르는 죄가 되고, 결국 교회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 대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마치 교회를 자기 세를 과시하는 곳인 양 착각하며, 그래도 되는 곳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교회가 얼마나 위대한 곳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별 것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교회든 거기 참된 성도 두 사람만 있으면 거기는 성령님께서 거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하려는 것은 실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나니아가 저지른 심각한 잘못을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향해 두 번째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이 말은 아나니아가 가지고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은 자기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법적으로도 나의 것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나니아도 그랬겠죠. 그런데, 베드로는 그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땅이 아나니아의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원래 ‘소유권’이라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기로 결정했을 때 뿐만 아니라 내려놓거나 포기하기로 했을 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것은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지고 있을 때도 자유로워야 하고 또 누군가에게 내어줄 때도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은 상태는 비록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만큼 그것 또한 나를 소유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땅은 아나니아의 소유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진짜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지고 있을 때도 땅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땅이 아나니아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땅을 팔았을 때 드러났습니다. 그가 땅을 판 것은 사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땅을 명예와 칭찬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절반은 그 일부는 그 일을 위해서 사용했고, 나머지 땅은 겉모습만 돈으로 바꾸어서 숨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땅에 묶여 있다는 것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의 계산대로 되었다면 일부분은 명예와 바꾸었고 나머지는 돈으로 바꿔서 숨겨놓았으니 그는 여전히 똑같은 땅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땅이 아나니아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을 때도 내놓고 싶을 때 마음대로 내놓을 수 없었고, 판 후에는 땅을 판 돈의 일부를 숨겼습니다. 참 이상하죠. 누가 내놓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것을 자기가 숨기다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숨기려고 거짓말까지 하다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소유에 묶여 있으면 이렇게 되기가 무척 쉽습니다. 나의 것인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악을 행하게 되고, 또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숨겨 놓게 되고 말입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소유의 문제를 바로잡지 못해서 하루에 두 사람 모두가 목숨을 잃게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절대로 우리의 목적이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이 되는 순간 그것이 나를 소유하게 됩니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무엇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항상 도구의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 이웃을 섬기는 도구, 그래서 나를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영광스럽게 해 줄 도구 말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이러한 자기 자리를 벗어날 때, 꼭 또 다른 죄를 우리 삶으로 끌어들이게 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듭니다. 


우선 유혹은 유혹 수준에서 끝장을 내시기 바랍니다. 쉽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유혹이 생각 속에 들어올 때면 자꾸 그것과 반대가 되는 선하고 바른 생각을 하셔서 처음 유혹에 물을 타서 흐리게 만드시고 또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특히 그 유혹이 교회나 성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떨쳐 버리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성령님께 대한 심각한 죄가 되기 쉽습니다. 또 한 가지 이런 죄악의 원인이 되는 것을 바로 잡아 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유’ 그러니까 ‘내 것’이라는 말의 개념입니다.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나 지나치게 거기 매달려 있는 것은 아무리 내 수중에 있더라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나를 자기 것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도구로 남아있어야만 진짜로 내 것, 나를 위한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항상 하늘나라에서의 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애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은 나의 종이 되고 그래서 진짜로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나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유혹을 이기시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셔서 항상 성령충만하고 또 하나님께 칭찬받는 성도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