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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4.20. 부활절 - 다만 이생 뿐이면



고전1516to22 - 다만 이생뿐이면(2014 부활절).pdf


20140420SM (#1).mp3.zip





         본문 : 고린도 전서 15장 16-21절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예수를 믿건 그렇지 않건 모두들 축제분위기가 됩니다. 물론 불교나 힌두교처럼 특정 종교가 국교로 되어 있는 나라들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불교도들도, 유교도들도 심지어는 무신론자들도 성탄절이 되면 기뻐하고, 선물을 주고 받으며, 파티를 벌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보다도 그들이 더 신이 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부활절에는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부활절날 선물을 주고 받으며 파티를 벌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또 성탄절이 언제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부활절이 언제 쯤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과 삶에 대해서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부활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역사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상 기독교가 거짓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시비를 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시비를 걸고 거짓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특히 부활에 대해서 입니다. 몇 년 전 소설인지 실화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게 쓰여졌던 소설 '다빈치 코드'나 예수님의 가족묘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던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그런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비해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나아가서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거짓임을 증명하려고 할 때,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하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의 무관심과 불신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며, 믿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적극적으로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돈과 시간을 들여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설명하기도 힘들고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부활이 거짓인 것이 증명된다고 해서 그들이 얻는 소득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일에 그렇게 열심히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영적으로 볼 때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사탄은 부활이 기독교의 생명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 사람들의 믿음은 헛 것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집착하고 그것을 뒤흔들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나 많은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이러한 사탄의 노름에 흔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신심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러한 느낌이나 감정이 내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느낌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 인간에 대한 사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사실이 기독교의 기반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말했듯이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적인 감정”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철저히 인간의 역사 속에 진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믿음 자체보다 믿음의 내용,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내용의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중심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다른 모든 내용들을 의미 있게 하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일생을 살펴보면 예수님에 관한 다른 모든 내용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속합니다. 먼저 어떤 탁월한 인물이 이 땅에 태어나서 자신이 구세주라고 주장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말도 안되는 사기꾼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사람이 고귀한 가르침을 가르치면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적이라면 지금도 세계의 구석 구석에서, 그리고 굳이 교회 안이나 믿는 사람들 안에서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또 그 사람이 너무 정직하고 고귀한 삶을 살아간 나머지 사람들의 모함과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의로운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활만큼은 이런 종류의 일들이 아닙니다. 부활 만큼은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입니다. 죽은 지 사흘이나 된 사람, 이미 부패되기 시작한 시체가 마치 잠자던 사람이 잠에서 깨듯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사실을 신앙의 기초요 근거로 삼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은 정말 독특하고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놓아두고 우리가 믿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은 절대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믿었고, 그래서 예수님도 부활하실 수 없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결론은 만약 부활이 없다면, 복음도, 믿음도, 소망도, 그리고 땅 위에서의 성도들의 삶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성도들이 받은 복음은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며, 바로 그 받은 대로의 내용 위에 그들의 믿음이 세워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들은 고린도 사람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말이었지만, 바로 그 말도 안되는 복음이 그들을 믿는 자들로 만든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성에 맞고, 논리에 맞아서 믿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철학이 발달한 그 도시 사람들에게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이야기는 어리석기 그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 이야기가 그들의 영혼 속에 믿음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부활을 거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그들의 생각대로 그것만 빼고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근거와 출처를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다 '성경대로'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사건들의 진정성을 증명해 보이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기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자기 자신을 진정성을 그의 말만으로는 스스로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이 죽고 다시 살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후에, 진짜로 그렇게 죽고 다시 살았다면, 게다가 그런 일에 대한 기록이 이미 수 천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 사람은 내적인 증거와 외적인 증거 모두를 갖춘 셈이 되고,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억지로 부인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믿을 수 있는, 믿어야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했던 모든 이야기, 이미 존재했던 기록 속에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모든 일이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대로, 성경의 예언대로 죽고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렇게 수의에 싸여 무덤에 장사 지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큰 돌이 그 굴 입구를 막는 모습도 지켜 보았죠. 그런데, 그 주님이 다시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여러 차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그 증인들 중 대다수는 고린도 전서를 기록할 때까지 생존해 있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만난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승천하셔서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바로 그 만남의 경험이 그를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에서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고린도의 성도들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단지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정성과 부활의 목격자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존재까지도 부인하는,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그래서 기독교도 믿음도 모두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들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을 한 덩어리로 말합니다. 만약에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주님도 부활하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약 죽은 사람이 다시 사는 일이 없다면, 예수님도 다시 사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면 성도는 자기 자신의 부활도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도 사람이니까요. 그 점에서 그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야기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샘플이라는 말씀입니다. 샘플은 모든 생산품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다른 생산품들이 어떻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샘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의 샘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부활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성도들을 한 몸으로 연합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 성도의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고,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를 믿으면 모두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다 씻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죄 용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고 많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속죄의 완성은 흔히 생각하듯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어떤 사랑 많은 위인의 숭고한 죽음을 상징하는 상징물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은혜의 보좌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다시 사시지 않으셨다면, 죄의 결과이고 형벌인 죽음은 정복되지 않은 것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죽음은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성도로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헛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이미 아무런 능력도 약속도 없는 기독교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고상한 삶과 위안, 현실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종교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죄와 죽음의 문제는 결코 해결하지 못하는 수많은 무능한 종교들 중의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독교가 이 땅 위에 있을 필요가 없고, 우리는 이 기독교를 믿을 필요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 옛날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자기 믿음을 지켰던 이유, 그렇게 하면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자신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었고 그래서, 그들의 믿음의 눈에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삶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고 확실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성도가 이 땅에서 말씀으로 자신을 깎고 다듬으며 그 말씀에 자신을 맞추어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이 땅에서 평안하고 복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야 우리의 후대가 잘 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믿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사도 바울의 말대로 “가장 불쌍한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아직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땅의 복 때문에, 또 다른 이미 보이는 땅의 복과 더 쉽게 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는 샘이 될텐데 그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의 삶을 조심하고 절제하며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이유는 땅의 복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부활이 남아있으며, 그 후에는 영원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 너무도 분명하니까 그 영광을 위해서 투자하며 살아가야할 이유가 충분한 것입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사실이고 그처럼 우리의 부활도 사실입니다. 이미 일어났던 과거의 그 어떤 일보다도 더 확실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 확실한 사실, 흔들리지 않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아무리 무식해 보여도 우리는 부활을 우리의 믿음의 근거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본입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은 확신에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부활을 우리 믿음의 가장 큰 소망이 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부활을 실패할 수 없고 좌절될 수 없는 든든하고 확실한 나의 가장 영광스러운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을 믿는 믿음은 우리 믿음의 선조들에게 그러 했듯이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게 하는, 충분히 세상을 이기는 강한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의 삶이 단지 이생 뿐이면,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와 우리의 소망이 단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만 머물러 있다면, 세상에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과 믿음을 위한 노력들도 모두 헛 것이 되며, 그래서 그 믿음은 결코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부활주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루 종일 주님의 부활을 많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욱 더 부활을 확신하시는 믿음을 새롭게 하시고, 소망을 새롭게 함으로써 참으로 복되고 든든한 믿음을 지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