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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5.04. 주일오전 - 조롱과 채찍질을 다한 후에(마가복음 73)


막1516to20 - 채찍질하고 희롱을 다한 후에(마가73).pdf


20140504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5장 16-20절



예전에 멜 깁슨이라는 미국의 영화배우가 감독을 했던 ‘Passion of Christ’라는 예수님의 수난을 그린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멜 깁슨은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영화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닌 수난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그 영화는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막연하게만 생각되었던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생생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한 가지 생각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 그 모진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예수님의 마음과 그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영화는 이 두 분의 그런 모습을 큰 과장 없이 굉장히 잔잔하게 보여주지만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장면이 저에게 가장 큰 감동과 은혜를 주었다면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장면은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브라이도리온에서 채찍질을 당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정말 그 장면을 눈을 뜨고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 병사가 끝에 굽어진 날카로운 쇳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예수님의 등을 내려칠 때마다 그 채찍 끝에 달린 그 쇳조각은 예수님의 몸에서 예수님의 살점을 떼어갔고, 그 채찍이 하늘로 치켜 들려 올라갈 때마다 예수님의 등은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변해 갔습니다. 그렇게 채찍질은 계속되었고 채찍질이 끝난 예수님의 마치 바둑판 같은 갈라진 채찍 자국들이 가득했고 그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 그림은 제가 예수님의 고난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장면이 그저 영화여서 그렇게 과장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나중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성경본문을 연구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영화가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채찍질에 대한 장면은 그 당시 죄수들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마다 늘상 벌어지는 장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수를 때리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채찍은 그 생김새 때문에 ‘전갈’이라고 불렸는데, 가죽으로 된 채찍 중간에는 유리가루를 발라 놓았고, 채찍 끝에는 굽은 뼈조각이나 쇳조각이 박혀 있었고, 이 채찍으로 맞는 일은 맞는 사람의 몸을 그야 말로 갈기 갈기 찟어 놓았다고 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죄수의 몸을 파고 들어가서 살점을 떼어내면 늑골이 드러나기도 했고 심한 경우에는 내장까지 파열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채찍질을 당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 형벌이 얼마나 잔인했는가 하면 잔인하기로 소문난 로마 황제 도미티안까지도 그 광경을 보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달리실 십자가의 횡목, 그러니까 가로 막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시다가 쓰러지시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모진 채찍질을 당하신 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 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채찍질 하고…”라는 한 마디 말 속에는 그만큼 어마 어마한 예수님의 고통이 숨겨져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그 분의 육체적인 고통에만 집중하는 것은 전혀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진짜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감당하셨던 육체적인 고통도 그냥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육체적인 고통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에 대해서는 신약의 본문보다 오히려 구약의 이사야서 53장이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에 대한 이사야의 설명인데요.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사야서는 주전 745년과 620년 사이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사야서가 메시야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게 될 터인데 그 고난 중에는 채찍에 맞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이 왜 우리에게 중요할까요? 그것은 이 예언이 우리에게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라는 것을 확신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일은 예수님의 경험 속에 절대로 억지로 끼워넣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채찍질 또한 십자가에 처형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 분이 진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우리의 구주시구나.”라고 더욱 더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진짜 메시야라면 그는 반드시 채찍에 맞아야 하는데,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채찍질을 당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예수님이 그런 고통을 당하셔야만 했던 이유를 듣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십자가를 향해 가는 과정이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 그렇게 채찍에 맞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는 분이 메시야라는 더 깊은 확신을 주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수난들이 실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짊어지신 십자가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 줍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이 세상에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은 없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육체에는 병이 찾아오고 마음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겨나며 영혼은 깊은 병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질병도 고통스럽지만 사실 마음의 상처와 고통은 더더욱 고통스럽고 그 악한 영향이 오래도록 지속됩니다. 아주 어렸을 때 생겨난 상처가 노인이 된 지금에도 그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며, 때로는 달랠 길 없는 분노로 바뀌어 솟아 오를 정도로 질기고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우리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상처 받게 하는 또다른 가해자로 만듭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온전히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생겨난 우리의 상처가 우리 속에 있는 가시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 사이에 가장 큰 불신과 미움, 분노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육신의 질병이야 의학의 도움을 받아 치유한다고 해도 이런 마음의 상처, 그리고 영혼의 질병은 치유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과 영혼의 상처는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요? 물론 정신의학과 심리상담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런 수단들을 통해 이루어 지는 치료는, 만약 그 상처가 영혼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있다면, 더욱이 그 상처가 자신의 죄 때문에 생겨난 상처라면, 근본적인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에게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죄 때문에 생겨난 속 깊은 상처들을 스스로 치료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상처는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날 우리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아서 상처를 입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새 생명, 꺼지지 않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죽음과 그 분의 죽음이 교환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아 몸에 상처를 입으시고, 영혼에 상처를 입으신 것 또한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것이기에 그 모든 상처 또한 우리의 것이 되어야 했지만 그 날 브라이도리온에서 우리의 상처는 그 분의 등에 짐지워 지고 우리는 그 대신 그 분의 상처로 부터 흘러 나오는 치유를 선물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날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 생사를 넘나드는 심한 매질을 당하시고 살갖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는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으신 것, 그것은 목적없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치유를 선물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상처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 죄의 결과입니다. 죽음의 그림자인 질병도 죄 때문에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우리가 서로 주고 받는 마음의 상처, 그리고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또 이 불의한 세상에서 살면서 입는 영혼의 상처 또한 죄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이런 상처는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코 인생이 경험하는 깊은 상처는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에게 상처입게 하셨고, 그 상처로 우리에게 죄가 만들어 내는 육체와 마음, 그리고 영혼의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채찍질이 우리가 당해야만 했던 채찍질이며 그 분이 당해야 했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을 대신 감당하신 것이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분명히 그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분의 등에 난 깊은 상처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노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이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채찍에 맞으신 후,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주님은 극단적인 모욕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자색 옷, 그러니까 왕을 상징하는 색깔의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고는 가시로 관을 만들어 왕관 대신에 푹 눌러 씌웠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경례를 하며, 그런 고통과 멸시 속에 있는 예수님에게 “평안할지어다, 유대인의 왕이여.”라고 인사를 건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손에 왕의 홀대신 쥐어 주려던 갈대를 다시 빼앗아 예수님의 머리를 툭툭 치며, 선물을 주는 대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꿇어 엎드려 키득대며 절을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채찍질을 당하신 일 뿐만이 아니라 그 분이 이 땅에 계실 때 당하셨던 모든 어려움들, 멸시, 간고, 질고, 맞음, 곤욕, 심문, 그리고 그러는 중에 보이신 침묵 등. 모든 것들을 똑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뿐만이 아닙니다. 그 모든 아픔과 고통들, 억울함과 부당함 또한 그 분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죄인에게나 어울리는 것들인데 주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스스로 죄인이나 당하는 고통과 모욕, 부당한 대우를 감당하셨다면 그것은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하고 또 대신하시기 위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이사야는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이 다름 아닌 우리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받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오히려 당연히 예수님께서 당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그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지금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 속에는 이사야 자신도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그 장면을 보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그들 속에 섞여 있는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며, 그래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는 ‘그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유대인들이었고 만약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을 지켜보는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죄인인 바라바는 놓아주라고 소리치면서도 죄 없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그들 속에 우리도 끼어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지켜보면서 그것은 당연히 그런 예수님께서 받아야 마땅한 형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저는 그랬을 것 같습니다. 이사야처럼 저도 그들 속에 끼어서 똑같이 소리치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군중들이나 그 들 속의 이사야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멸시에 대해서 한 가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내 죄를 속하기 위하여 지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 치욕과 멸시 같은 것들은 나 대신, 우리 대신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가 우리에게는 치료가 되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미 채찍에 맞으셨으니 우리도 이미 치료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치유의 능력을 자신에게로 가져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신 것 또한 우리를 대신하신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 날 밤 거기서 그런 모욕과 수모를 당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모욕과 수모는 바로 우리들의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평안하게 나아가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게 되었으니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 하거나 주저하거나 기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서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하고 무엇 앞에서 기가 죽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예수를 제대로 믿기 시작하면서 저에게 일어난 가장 놀라운 일 중의 하나는 제가 점점 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남들은 알지 못하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는 안된다는 강박관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든지 저와 함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나 때문에 행복해 져야 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필요 이상의 친절도 베풀고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도 거절하지 못하고 항상 사람들 앞에서 웃고 장난치고 농담하고… 자기를 비하하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싫어할 수 있는 조건들을 없애려고 그야 말로 신경이 곤두서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모두 사람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그 사람이 나에게 줄지도 모를 거절이나 수치심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용납되고 받아들여 졌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누리게 된 이후 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거기서 자유를 얻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만 않다면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수치심, 그리고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어지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묶인 나의 감정과 생각도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죄인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수많은 상처를 입히고 또 일그러진 자아상을 갖게 만듭니다. 우리가 스스로 고통을 당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불편하고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마음 속을 한 번 가만히 들여다 보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어떤 상처가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분노하게 하며, 힘들게 하고 또다시 상처 받게 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괴롭게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까? 또 여러분에게는 어떤 수치심과 어떤 소외감이 있습니까? 어떤 억울함이 있으며, 어떤 거절 받는다는 느낌이 있으십니까? 성도가 이런 것들을 그냥 끌어 안고 살아가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들의 상처와 수치는 예수님께서 이미 모두 담당해 주셨는데,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그냥 안 그런 것처럼 숨기거나 혹은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면서 살아갑니다. 당장은 그게 훨씬 편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전혀 유익한 태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너무나 커다란 손해를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도 항상 성도들의 신앙과 연결시켜서 보게 되는데요. 제가 많은 성도들을 관찰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신앙이 정말 아름답고 풍성한 신앙, 그리고 성숙한 신앙이 되게 하는 것을 가로 막고 그래서 그가 신앙의 참된 능력을 누리지 못하게 가로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치료되지 않은 상처와 수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점쟁이는 아니지만 여러분들 속에 그런 것 한 두개 쯤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러는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저는 더 안타깝습니다. 저것만 넘어간다면, 저것만 주님 앞에 정직하게 내놓고 치유를 받는다면 더 풍성하고 능력있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을텐데, 계속해서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거기 붙들려서 아파하고 불편해 하는 여러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단지 우리 죄 용서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죄만 짊어지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그 죄가 만들어 놓은 인간의 모든 상처와 고통, 그리고 일그러진 삶의 모습까지도 모두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이미 다 짊어 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렇게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고통 안에서 우리에게 치유가 주어졌고, 그 분의 멸시받음 속에 우리의 부끄러움이 거절받음이 끝장났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위대한 진리를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의 나음을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욕과 멸시를 견디신 것은 우리의 담대함과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감당할 수 없이 은혜로운 진리를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날 그 곳에서 우리 주님이 당하셨던 고통과 멸시, 모욕과 천대를 진실로 가치 있게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상처, 무슨 좌절감, 무슨 열등감,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든 그냥 안고 계시지 마시고 모두 다 주님께 가져다 드리십시오. 정직하고 솔직하게 다 드러내시고 주님께서 고쳐달라고 없애주시고 바로잡아 달라고, 그 날 브라이도리온에서 허락하셨던 은혜가 나에게도 능력이 되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하시며 사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상처와 아픔은 여러분의 치유와 회복의 능력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치유된 상처와 아픔은 우리 주님의 상처처럼 오히려 다른 이들을 치유하고 섬기는 능력있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그 날 그 곳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치유와 회복, 자유와 풍성함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