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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4.27.주일오전 -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주니라(마가복음 72)


막1501to15 -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 주니라(마가72).pdf


20140427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5장 1-15절



십자가는 어마 어마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나오는 은혜의 샘 근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선한 것들이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 용서와 위로, 은혜와 능력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까지 공급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이런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고 계시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기대하건 그리고 또 지금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은혜를 누리고 있건 그것은 모두가 다 예수님의 십자가 덕분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알고 또 그 십자가를 든든히 붙드시고 신앙생활을 하시면 마치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샘물 하나 마당에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풍성하고 넉넉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목마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이런 놀라운 능력이 되어주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막힌 허물 수 없었던 담을 완전히 허물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고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그 어떤 거리낌도 없는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해결책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죄를 보고 울게 됩니다. 울며 용서를 구하고, 그 십자가에서 흘러 내리는 보혈의 공로로 죄를 씻는 은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의 죄 뿐만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죄악도 그대로 드러냅니다. 십자가의 순결함과 거룩함이 거울이 되어 사람들이 악한 모습을 더욱 더 명확하게 비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바로 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에는 흐릿하던 십자가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 십자가에 비추어 지는 사람들의 죄악들도 더 뚜렸해져 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 제자들과 도망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일, 그리고 예수님의 재판과정에서 보여진 공회원들의 거짓과 모함 등. 이상하게도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죄악됨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회원들에 의해서 빌라도의 손에 넘겨진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심문과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군병들의 손에 넘겨지는 순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오늘 본문 속에서도 십자가가 선명해 지면 선명해 질 수록 그 십자가에 비춰지는 인간군상들의 죄악들 또한 더욱 더 검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공회는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른 예수님을 직접 처형하지 않고 예수님을 결박해서 빌라도에게도 데리고 가서는 그에게 처형을 맡겼습니다. 그것은 아주 치밀한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인도하면서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은 바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로 보면 이미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커다란 인기를 끌고 계셨기 때문에 만약 예수님께서 이런 주장을 하셨다면 그것은 충분히 로마에 대한 반역죄를 범한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로마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인의 왕’은 로마의 황제 한 사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황제를 모독하고 사칭한 죄까지도 뒤집어 쓸 수 있는 그런 죄목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빌라도의 손에 처형된다면 로마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를 저지른 이유로 처형되는 것이었는데 로마는 정치범을 처형할 경우 항상 십자가를 그 형틀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유대인들의 율법으로는 누군가가 나무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는 것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런 방법으로 죽일 수만 있다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제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도 빌라도에게 미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있던 백성들의 마음도 한 번에 다시 되돌릴 기회를 얻게 됩니다. 공회원들은 바로 이런 계산 하에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인도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이 예수님을 고발했던 죄목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었는데, 사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주장은 로마인들의 입장에서는 미친 사람의 말도 안되는 헛소리는 될 수 있어도 절대로 로마에 대한 반역죄는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바꾸어서 고발했던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악한 일을 하면서 이런 계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공회원들은 그런 계산까지 하면서 그렇게 예수님을 모함했습니다. 


새벽같이 호출을 받고 나온 빌라도는 말 그대로 기도 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공회원들의 손에 이끌려 ‘유대인의 왕’ 그러니까 로마의 반역자로 고발당해서 끌려온 예수님의 행색이 너무나 초라했고, 너무도 무기력하게 그저 꽁꽁 묵인 채로 거기 서 있었으니까요.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님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며 로마에 대해서 반역할 만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렇게 서 계신 예수님을 향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는데, 이것은 사실 심문이라기 보다는 비아냥 거리는 말에 불과 했습니다. 원래의 느낌을 살려 읽으면 “너 정말 유대인의 왕이 맞아?”라는 말 정도가 됩니다. 그만큼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죠. 우리 말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그 질문에 대해서 “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원래 이 말은 그 의미가 조금 묘한 말씀입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그렇지만 빌라도가 이해하고 또 공회원들이 주장하는 그런 의미에서는 그런 것은 아니며, 또한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빌라도가 심문을 마치고 발견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로마에 대해 반역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빌라도가 그 과정에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자신에게로 데리고 와서 고소하며 처형을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저지른 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한 사람을 로마 총독인 자신에게로 데리고 와서 로마 법을 적용해서 처형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진짜로 저지른 죄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시기심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보기에 그 상황이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처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일단은 예수님을 살려줄 방도를 찾았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을 살려 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명절이 되면 총독들이 유대인들이 원하는 죄수 한 명을 특별사면해 주는 관례가 있는데, 관례대로 백성들이 와서 죄수 하나를 석방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을 찾아온 무리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은 얼마나 영리한 질문인지 모릅니다. 지금 빌라도가 ‘너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 왕을 너희를 위해서 놓아줄까?’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은 사실 여부를 떠나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심하게 자극하는 말이었고 그만큼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가 쉬운 제안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이 그 사람들을 충동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소리칩니다. 바라바는 처형을 기다리는 정치범이었습니다.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사람까지 죽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빌라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군중들은 대답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정말 놀랍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고발당한 사람을 로마의 총독은 풀어 주려고 하고, 반대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아 죽여 달라고 소리칩니다. 만약 그 사람이 미친 사람이면 미친 사람이어서 죽일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오히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살려달라고 해야하고 보호하려고 해야 하는데, 그 날 거기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빌라도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러느냐? 이 사람이 무슨 죽을 죄를 지었느냐?”하고 말입니다. 무리는 그저 더 크게 소리만 지릅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결국 빌라도가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은 이런 군중들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죽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군중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군중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던 그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도층이 아닌 평민들 중에서 예수님을 싫어하고 반기지 않을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요. 누가 자신들을 돌보며 고쳐주고 또 자신들에게 참된 진리를 가르쳐 주고,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왕이 되실 것을 기대하면서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호가 이제는 그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으라고, 무조건 그렇게 해 달라고 떼를 쓰며 졸라대는 잔인한 외침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렇게 변해버렸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그렇게 소리지른 이유는 대제사장 무리의 충동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은 대제사장 무리들의 충동질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흔히들 사용하는 말 중에서 군중은 어리석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인으로 있을 때는 안 그런데, 무리 안에 포함되면 생각이 없어지기 쉽고 감정적이 되기 쉽고 그래서 휩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어 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아주 인상깊게 보았던 공익광고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모두가 아니요라고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광고였습니다. 아주 멋진 광고입니다만 과연 이게 쉬울까요? 어렵습니다.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악한 사람들 틈에 끼어서 그들이 저지른 악한 일의 일부분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그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니, 우리는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사람들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수가 옳다면 다수 편에 서야 하고 그들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수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옳지 않은 다수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군중이 되면 어리석어지기가 굉장히 쉽기 때문입니다. 만약 군중이 그런 군중이라면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나도 그 날 빌라도를 찾아갔던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처럼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었던 두번째 이유는 이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되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채워줄 분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이 외침은 원래 왕에게 외치는 외침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를 외쳤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위대한 왕이 되어서 그들이 원하는 이스라엘의 독립과 영광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애초부터 그들의 기대를 채워주실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빌라도의 죄수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풀려나려는 의지도 없어 보입니다. 원래 기대가 무너지면  실망이 되고 그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기대가 기대를 걸었던 대상에 대한 분노로 바뀌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기대가 잘못된 것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예수님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실망과 분노는 급기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바뀌어 버리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떠 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대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자꾸 원망과 불평이 생겨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이런 이유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든지 아니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가 되는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나름대로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이런 저런 분으로 규정해 놓고, 또 이렇게 저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해 놓고 하나님이 그렇게 움직여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 덧입혀진 우리 나름대로의 기대가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바램과 기대대로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호산나 찬양소리는 너무 쉽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분노의 외침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 거기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 신앙생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을 피하면서도 언약을 지키시는 주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고 거칠어 지자 빌라도는 갑자기 태도를 바꿉니다. 그것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바라바는 실제로 로마에 대해서 반역죄를 저지른 사람이고 그 과정에서 사람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가 판단한 대로 전혀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 아닙니다. 설혹 예수님께서 정치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치더라도 아직은 그저 잠재적으로 그럴 뿐입니다. 만약 빌라도가 로마를 진짜로 생각했다면 빌라도는 절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렇게 했습니다. 스스로도 죄가 없다고 판단한 예수님을 죽이기로 하고 그대신 당연히 죽어야하는 죄수를 놓아 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정의도 생각하지 않았고, 로마의 이익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고려한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의 정치적인 유익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식민지의 총독으로서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곳이 시끄러워져서 자신의 정치적인 평판에 해가 입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려고’ 그런 선택을 했는데, 그것은 그 무리에 자신의 정치적인 평판이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는 과정의 전말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것이 불의한 세상 법정이 내린 예수님에 대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의 사악함과 무지함, 그리고 자기 입장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사실 십자가에 달려야 할 사람은 바라바이지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셨고 그 와중에 당연히 십자가에서 처형되어야 할 바라바는 그의 모든 죄를 면제받고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정말 부조리하고 부당한 죽음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지고 있는 은혜의 본질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우리들의 자리였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그렇게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 자리에 가셨습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죄없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셔야 했고, 우리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셔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부당하고 또 부당한 것입니까? 그러나, 십자가의 그 부당함 때문에 우리가 죄 용서를 얻고 새 생명을 얻는,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된다는 것 또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그런 영광스러운 신분을 얻을 아무런 이유도 자격도 없으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또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전혀 받을 이유도 자격도 없는 영광스러운 은혜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는다는 것 그것은 정말로 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신 그 부당한 십자가에서 흘러 나오는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의 영광스러움 앞에서 할 말을 잊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의 온갖 사악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욕심과 이기심을 보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같은 그들과 인간으로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부끄러움마저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악함과 연약함, 그리고 어리석음 때문에 그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또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고상한 목적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 때문에 갈보리에 서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죄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또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 바로 그런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덮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그 죄가 고백되고 인정되며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지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의 완전한 의로 그 모든 죄를 완전하고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또 맑혀 주십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그 십자가 앞에 선 사람들의 모든 죄악과 어리석음들을,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낱낱이 드러냅니다. 부끄러운 죄, 추악하고 더러우며 간교한 죄까지… 십자가는 그 순결함과 온전함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렇게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는 그렇게 드러낸 모든 죄를 덮습니다. 그 모든 죄를 씻고 용서하는 은혜의 샘근원이 됩니다. 그런 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게 해 주는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가 흘러 나오는 원천이 됩니다. 이 세상에 이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받으시고 돌아가신 그 부당한 십자가 외에는 이런 능력을 지닌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이며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요즘 우리는 사람들의 악함과 이기심과 무책임이라는 죄가 만들어낸 정말 가슴 아픈 비극을 함께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둘러싼 인간군상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얼마나 아프고 미안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악한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그저 마음에 화만 치밀어 오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묵상하다가 주님이 담당하려고 하셨던 죄악 속에는 이러한 인간의 죄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나의 모든 죄를 덮고 용서했다면, 그 은혜 덕분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 또한 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진실을 밝히지 않고 묻어 두어도 좋다거나 그 사건 속에서 의도적인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또한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게 만든 악한 시스템을 또다시 그대로 놓아두어도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밝혀지고 책임이 물어지고 또 바로잡아 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 가운데로 몰아넣을지 모르니까요. 그러나, 그 속의 악한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의 악함은 우리 모두가 용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이 일이 우리 속에 만들어 놓은 과도한 분노와 파괴적인 감정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그래야 그런 아픔들이 더 나은 일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 그 십자가의 부당한 은혜 덕분에 이 세상은 살 길을 얻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다시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보혈은 그 모든 죄를 씻어 주었고, 지금도 씻어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악함 때문에 화가 나고, 자신의 악함 때문에 실망하고 아플 때, 우리 그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다. 십자가의 그 부당한 은혜 덕분에 우리가 살았고 또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 십자가에 소망을 둡시다.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악함과 부족함에 화를 내고 절망하기 보다는 우리 주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효력이 언젠가 온 우주를 덮어 구속할 때, 그 때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힘을 회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