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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5.11. 주일오전 - 남은 구원하였으되(마가복음 74)



막1521to32 - 남은 구원하였으되(마가74).pdf


20140511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5장 21-32절




프랑스 파리의 어느 수도원 입구에 큰 돌비석이 있는데, 그 비석에는 프랑스어로 “aprés cela, aprés cela, aprés cela”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라는 뜻인데요. 이렇게 이상한 묘비문이 생긴 유래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어느 법과대학 졸업반에 다니던 학생이 마지막 한 학기 등록금을 도무지 낼 수가 없어서 한 신부님을 찾아 갔답니다. 학생의 도와달라는 호소에 신부님은 “마침 조금 전에 어떤 교인이 좋은 일에 써달라고 돈을 기부했는데 이 건 분명히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주시는 것인 것 같군.” 하며 그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그 청년에게 주었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청년이 돌아서려는데, 신부님이 “잠깐만!” 하고 그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자네 그거 가지고 뭘 할 건가?” “등록금 내야지요.”

“그 다음은?” “열심히 공부해야지요.” 

“공부하고 나서는?” “졸업해야지요.”

“그 다음은?” “변호사가 되어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 의로운 변호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구만, 그 다음은?” “돈을 좀 더 벌겠습니다.”

“그 다음은?” “장가가겠습니다.” 

“그 다음은?” “......”

심상치 않은 신부님의 질문에 청년은 더 이상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자네도 죽어야 되네. 그 다음은 자네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일세. 알겠는가?” 그 말을 듣고 나오는 청년의 귀에 “아쁘레 셀라, 아쁘레 셀라, 아쁘레 셀라”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다음은……”이라는 소리가 맴돌았고 그는 이후 훌륭한 수도사가 되어 한평생 귀한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죽으며 그의 묘비에 썼던 묘비문이 바로 이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 세 마디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사들에게 끌려 골고다라는 언덕으로 가셨습니다. 골고다는 ‘해골의 장소’라는 뜻인데 그 언덕이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 곳이 해골 비슷한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곳이 죄수들이 처형을 당하는 죽음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죽음, 특히 죄수의 죽음을 부정하다고 여겨서 예루살렘 밖에 죄수를 처형하는 장소를 따로 마련하고는 그 곳을 가장 저주스러운 장소로 여겼으며, 그 곳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골고다는 어떤 의미에서 그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모든 곳에 사는 모든 인간은 그 어디서든 죽음을 경험하며, 바로 그 곳을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 갑니다. 아무리 화려한 인생도,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고 자랑할 것이 많고 아무리 거창한 계획을 가진 인생도 결국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이 이어지면 마지막에는 “죽음!”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그 곳을 자신의 골고다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만약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우리 인생의 마지막 결론은 결국 ‘골고다’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골고다, 죄와 죽음이 있는 이 세상 전체를 상징하는 그 언덕으로 끌려가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두 명의 죄수와 함께 못 박히셨는데 예수님은 그 한 가운데 매달리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 자리를 ‘해골의 정수리’라고 불렀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모든 생명이 바싹 말라버린 해골의 정수리, 죽음이 가득 찬 그 곳에 예수님께서 매달리셨고, 거기서 마르지 않는 생명수, 예수님의 보혈을 흘려 보내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골고다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었습니다. 골고다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생명이 충만한 곳이 되었습니다. 골고다를 닮은 온 세상을 향해서 예수님의 보혈을 흘려 보내는 생명수의 샘근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골고다 덕분에 세상은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그 생명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골고다에서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생명이 우리의 죽음을 덮고 이겨서 그런 은혜를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다음에는…”이라는 질문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질문이 아무리 반복되고 반복되어 들려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질문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참 성도는 이미 그 속에 골고다의 보혈이 흘러 들어와 그 무엇으로도 억누를 수 없는 생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 다가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누리며 사는 과정입니다. 흘러 넘치는 영생을 맛보며 또 다시 다른 곳으로 그 생명을 흘려 보내며 사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죽음을 그 분께 떠 넘기고 그 분의 생명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은 ‘대속적’인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가 결코 지불할 수 없는 우리 생명의 값을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두 사람이 제비를 뽑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옷을 누가 가질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잔인함이고 탐욕이며 이기심입니다. 너무 크고 깊습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자신이 가진 악에 대한 값을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대신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의 죄의 값을 넉넉하게 지불하셨습니다. 그 어떤 악함이라도 덮고 남을 정도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넉넉한 구원과 생명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고 힘쓰셨는지 모릅니다. 먼저 골고다에 도착한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릴 죄수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마취제였는데,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죄수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죄수들에게 제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냥 드시고서 고통이라도 더시지 왜 그것마저 거절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래야 십자가 위에서 당하실 고통이 흠잡을 데 없는 온전한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약의 도움을 받아서 조금이라도 경감된 고통이라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온전한 십자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예수님께서 온전히 감당하신 것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마저 거절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것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완전한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제공되는 자비마저도 거절하셨습니다. 그 분의 대속적인 죽음을 온전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완전한 대속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에서 서로 예수님의 옷을 가지겠다고 제비 뽑는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 보셨습니다. 그리고 행인들이 머리를 흔들며 내뱉는 조롱도 견디어 내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조롱과 심지어는 함께 달린 죄수들의 모욕도 끝까지 참아 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당장에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부어 벌을 주실 능력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당하고만 계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죄패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정말 “유대인의 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시며 또한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열 두 부대나 되는 천사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일순간에 멸망시키실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행인의 말대로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뽑아 버리고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말대로 스스로를 구원하시고 그 악한 사람들을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감내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도 견디어 내셨으며 끝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참 아픈 조롱이죠. 그렇지만 이 말 속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셨던 힘들고 고통스러운 선택이 고스란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남들, 그러니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시려면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습니다. 죄 뿐만 아니라 죄인이게나 어울리는 고통과 멸시, 그리고 모욕까지도 전부 짊어지시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려면 그렇게 하면 안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이 흠이 없는 대속적인 죽음이 되게 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온전한 생명이 되게 하려면 십자가에서는 자신을 구원하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무기력함의 상징이 아닙니다. 자포자기의 상징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이 만들어낸 선택이며, 자기를 포기하고 다른 이들을 살린 가장 위대한 승리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선택을 하지 않으셨고, 그 선택을 끝까지 지켜내지 않으셨다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여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과 영생의 소망이 없이, 항상 그 다음을 계획해 보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삶의 자리를 또 하나의 골고다로 만들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대신 내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끝까지 흠 없고 온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영생의 소망을 품고, 이 땅에서도 하늘의 영광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원리이지만, 실은 우리들이 세상에 생명을 더하는 유일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를 힘들고 가슴 아프게 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세상이 살만 한 이유는 여전히 이 세상에는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든 그렇지 않든 십자가를 닮은 대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을 위해서 대신 댓가를 치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이 한 사람 나옵니다. 물론 이 사람은 자발적으로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지나가다가 붙들려서 그런 역할을 떠 맡았을 뿐입니다.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몬은 예루살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온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시몬은 그 날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재수 없게 로마 병사들에게 걸렸습니다. 전날 심한 채찍 질로 몸이 상할 대로 상하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십자가의 횡목을 지고 골고다로 가실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것을 대신 지고 갈 사람을 찾던 로마 병사들의 눈에 띠게 되었고,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를 그야 말로 “억지로”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시몬이 기뻤을까요? 아마도 엄청나게 불쾌했을 것입니다. 적어도 비록 자기가 질 십자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굉장히 불쾌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구레네 시몬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이지만, 오늘 본문은 이상하게도 이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알렉산더와 루포가 어떤 사람들이길래 마가는 이렇게 두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만약 여러분에게 편지를 쓰는데요. 그 중간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어떤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마가복음이 처음 쓰여지고 읽혀질 당시에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 교회 안에서 상당히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시몬의 출신지인 구레네가 북 아프리카 리비아의 중심도시 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두 사람이 초대교회에 얼마나 넓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를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원래 유대의 풍습으로는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보다 앞세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사람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죠. 그런데, 마가복음은 그런 시몬을 소개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 앞에 두 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시몬보다도 이 두 아들이 훨씬 더 중요하고 잘 알려진 사람들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상상이지만 이렇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계속해서 동행했겠지요. 그리고 그 덕분에 예수님의 모습도 지켜보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모습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그가 나중에 복음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결국 두 형제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의 시작지점에는 시몬이 예수님 대신 억지로 지고 갔던 십자가가 놓여 있습니다. 비록 이 일이 시몬이 기쁘게 감당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 일이 자신의 구원과 가정의 구원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이고 신앙적인 유익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일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짐을 지고 그 대신 다른 이들을 자유케 해 주는 일의 상징입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대개는 이 말씀을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해야한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만 저는 이 말씀 속에는 그것보다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단순히 복음과 하늘나라를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손해를 보라는 말씀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삶, 자기 유익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대속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야 말로 대속적인 삶과 죽음 그 자체이니까요.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께서 지셔야 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습니다. 시몬이 진 십자가 또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시몬도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졌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도 대속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맺은 열매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은 저와 여러분을 비롯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은혜가 되고 복이 되었습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지고 간 십자가 또한 우선은 자기 자신의 구원과 두 아들의 구원으로 이어졌고 그 두 사람을 통해서 초대교회는 커다란 유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 일에 이런 열매들이 맺히게 될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것을 내려놓거나 가질 수 있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죠. 그러나, 누군가 어떤 부분에서든 다른 이들을 위해서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결국 그 누구도 유익을 누릴 수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누군가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친절과 사랑을 베풀 때, 자기 것을 내어 놓아 다른 이들의 유익을 챙겨줄 때, 그 때 그 옆에 있는 사람도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빚을 갚으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사회는 아직은 살만한 사회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 상식이 깨지면 사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크든 작든 내가 대속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그러한 삶을 지켜보는 내 옆의 이웃도 자신의 손을 펴서 다른 이들에게 내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그 옆의 사람도 그렇게 합니다. 또 받은 사람이 없으니 빚진 사람도 없어서 나중에 자신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때에도 자기 손에 있는 것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곳간에서는 곡식이 썩어 나가도 다른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을 품지 못하게 됩니다. 점점 그렇게 변해가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과연 나만 풍성하고 나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나의 인생도 풍성함을 잃어버린 매마른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사랑이 풍성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교회를 교회답게 합니까? 누가 교회를 풍성한 공동체로 만듭니까? 그것은 딱 필요한 만큼만 하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필요 이상으로 섬기고, 필요 이상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풍성한 공동체로 만듭니다. 교회를 받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니라 주기 위해서 오는 곳으로 생각하고 작든 크든, 그게 물질이든 시간이든 아니면 몸을 움직이는 일이든 최선을 다해서 내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속에 속한 지체로 몸의 풍성함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대속의 공동체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생명을 값으로 치르신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덕분에, 그리고 그 모진 대속의 고통을 온전히 당하신 덕분에 생겨난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지 않았다면, 우리를 필요 이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이 곳에 함께 모여 있을 이유도, 그리고 모여 있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인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그 다음은? 그리고 그 다음은?”이라는 질문을 애써 외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골고다”를 향해 가야만 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미 필요 이상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예수님의 우리대신 죽으신 죽음 덕분에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구하기를 포기하셨던 예수님의 과도한 사랑 덕분에 지옥이 아닌 하늘나라를 꿈꾸며 살게 된 은혜의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대속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크게 혹은 작게 자신의 삶의 자릴에서 십자가를 흉내내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랬듯이, 그것이 기쁨으로 선택한 것이든 때로는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이든, 십자가를 흉내 내는 삶은 결국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숨겨 놓으신 최고의 삶을 사는 지혜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인데요. 저는 부모님들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의 대속적인 사랑의 그림자를 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를 위해서 오랜 세월 손해와 고통을 감내하신 우리 부모님들 덕분입니다. 때로는 그 분들의 부족함이 우리에게 커다란 상처가 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내어주고 포기했던 사랑이 오늘의 우리 존재와 삶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것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대속적인 사랑을 입고서야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웃을 위해서 크고 작은 것을 내려놓고 나눠주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삶을 나누고, 소유를 나누며 여러분의 마음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런 여러분 덕분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치유되며 풍성해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 꼭 해야할 것 이상을 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주님의 교회가 교회다워져 갈 것이고, 그 안에 있는 우리 모두도 행복한 대속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기적인 우리들은 자연적으로는 계속해서 십자가에서 멀어지고 싶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가 지기 싫어지실 때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지고 갔던 십자가를 생각하시고, 그 십자가가 그의 가족과 교회에 남긴 영광스러운 열매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와 여러분의 거리를 좁혀 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최고의 지혜입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일 뿐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내놓지 않고 취하기만 하려는 세상의 열매 없는 지혜, 껍데기 뿐인 지혜가 아니라 이 영원한 지혜를 따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항상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대속의 은혜 가운데서 주님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있는 자리에서 조금 더 내어주고 조금 더 섬기는 대속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 속에 주님을 닮은 영광스러운 흔적을 남기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