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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5.25. 주일오전 - 여자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마가복음 76)

막1540to47 - 여자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마가76).pdf


20140525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5장 40-47절



도망친 제자들, 배반한 제자, 태도를 바꾼 군중들, 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던 사람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은 대개는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 주위에는 그 십자가 때문에 더 환한 빛을 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중에서도 특별했던 세 사람을 먼저 소개합니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그들이었는데, 성경이 이들을 따로 그리고 특별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이 세 사람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섬겼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신 여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7장과 본문을 비교해서 보면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글로바의 아내, 그러니까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이며, 살로메는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여인은 예수님 덕분에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 건짐을 받은 여인이었고 나머지 두 여인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닌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이 누군가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할 때는 곧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여인이 예수님의 여제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던 여제자들 말고도 그 자리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아주 짧은 시간을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예수님 당시 여인들은 정말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도 ‘여인들의 뜰’이라고 불리는 성전의 중간 마당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고, 사람의 숫자를 셀 때도 제외되었으며 심지어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런 여인들이 끝까지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 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 곁에는 열 두 명의 사도들 말고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정말 많은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며 스스로도 당연히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인들은 함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정식 제자로 대접받거나 혹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뒤에서 묵묵히 예수님을 섬기며 따라다닐 뿐이었습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때, 예수님 곁을 지켰던 것은 항상 예수님 옆 자리를 독차지 했던 열 두 사도들이나 남자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했던 그 여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가 참된 예수님의 제자인지, 그리고 누가 참된 성도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이 세상과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타이틀과 위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직함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대접해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직분이나 소명을 가볍게 여기거나 쓸 데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직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그 직분과 위치를 가진 사람이 과연 거기에 어울리는 속 사람의 모습과 충성스러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묻습니다. 그리고 비록 타이틀은 없고 남들이 알아주는 위치는 없을 지라도 자기가 있는 그 곳에서 묵묵히 충성을 다하면 그것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타이틀이 있고서 그렇게 하는 사람보다 더 큰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자들은 사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또 제자들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반면에 여인들은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겼습니다. 또 예수님을 따른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누가 진짜 제자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참 제자의 영광을 주실까요?

 

성도 여러분, 다이아몬드의 진짜 가치는 빛이 많은 데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의 진짜 가치는 다른 보석들이 모두 자기 빛을 잃어버릴 만큼 희미한 빛만 남아있을 때 드러납니다. 사람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참된 가치는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려워지고 힘들어 질 때, 손해를 보고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 그럴 때 참으로 드러나는 것이 사람의 참된 가치입니다. 참 제자들, 참 성도들의 가치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비록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여인들은 그 곳에서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국자들이 예수의 잔당을 색출하기 위해서 서슬 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 그 때였지만 그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이 먼 곳에서 예수님을 바라본 것은 잡힐까봐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중에 예수님이 장사지내 질 때 거기까지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고, 안식일 다음 날 향품을 들고 그 무덤으로 다시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여인들이 먼 곳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은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속 깊은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십자가 그림에는 예수님께서 천으로 하체를 가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십자가에 그렇게 달리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은 그게 누구든 완전히 발가벗겨집니다. 십자가는 죄수를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처형하는 형틀이었으니까요. 여인들은 먼 발치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은 예수님의 수치를 줄여 들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그저 예수님의 모습이 작고 희미하게 보이는 곳에서 그 안타까움과 슬픔을 함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적어도 이 순간에는 제자라고 불렸던 사람들, 그리고 사도들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진짜 제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사람들이라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의 시신은 아무 곳에나 던져져서 들개와 날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은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날 오후 세 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다음 날 해 질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에는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치르는 일은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 지내려면 오후 세시 부터 해가 완전히 지는 시간까지의 짧은 시간 밖에 었었습니다. 그 때까지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지 않으면 예수님의 시신은 그냥 아무렇게나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나선 것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명망있는 공회원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들을 참고해 보면 그는 부자였고 예수님의 숨어있던 제자였습니다. 또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었고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 하였을 때, 그것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요셉은 공회원이었는데 어느 때부터 예수님으로 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같습니다. 물론 그가 가지고 있었던 공회원이라는 위치 때문에 드러내 놓고 그것을 밝히지는 못했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을 때, 더 이상 양심을 속이지 못하고 그 결의에 반대했으며, 결국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예수님의 장사를 지내주기 위해서 스스로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입니다. 


43절을 보면 성경은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로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였다고 말합니다. 당돌하다는 말을 좀 더 잘 번역해 보면 ‘용기있게’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아리마대 요셉이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이 굉장히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고 그는 힘들지만 용기를 내서 그 일을 결행했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몰렸을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로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드러내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망자의 장례를 지내는 일은 가족들의 일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일은 요셉 스스로 자신이 예수님과 굉장히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정치적인 관계도 잃어버리고 가지고 있던 위치나 권력도 잃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일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당돌하게’ 그러니까 큰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는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잊지 말고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고 그래서 어느 시점에선가는 반드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처음부터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부터 예수님의 참 제자로 출발할 수도 없고, 또 온전한 제자 노릇을 하기는 더더욱 힘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었고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었다면 우리들 또한 요셉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라도 참 제자가 되는 방향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어느 순간엔가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 당돌하게 용기를 내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고 이 세상을 향해서도 그렇고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세상을 향해서 당당하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는 귀한 세마포를 사서 예수님의 시신을 싸 주었고, 아마도 자신이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사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사용하지 않은 새 바위굴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그리고는 관례대로 커다란 돌을 굴려서 그 굴을 막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칫 잘못 했으면 광야에 아무렇게나 버려질 수 있었던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서 예수님의 죽음이 최악의 비참한 죽음이 되지 않게 해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정말 귀하고 귀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인들과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그리고 죽음 이후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가장 함께 하기 힘들고 불리한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람들이야 말로 참 제자였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저 예수님의 죽음과 관계된 소중한 역할을 했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위한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먼저 여인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여인들은 법정에서조차 증인의 자격을 주지 않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보고 또 결국 무덤까지 좇아가서 예수님께서 장례지내지는 것을 본 유일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는데요. 그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것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에 기록된 성경이 증인의 자격도 없는 여인들을 예수님의 죽음의 증인으로 기록할 리가 없습니다. 여인들이 아니라 남자들을 증인들로 내세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것은 무엇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여인들을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며,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신 것도 마찬가지라는 굉장히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또 만약 이 여인들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장례 지내지시는 곳까지 따라가 끝까지 함께 하지 않았다면 나중에 이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 그렇게 쉽게 빈 무덤을 찾아갈 수가 있었겠으며, 또 우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아침의 이야기를 이렇게 생생하고 영광스럽게 들을 수가 있었을까요? 이 여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위한 아주 중요한 증거와 이런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아리마대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아리마대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시신은 바깥에 버려져서 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시신은 흔적조차 찾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빈 무덤은 더더욱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요.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했을 때, 빌라도는 의아해 했습니다. 원래 십자가에 달리면 짧게는 한 나절, 길게는 3-4일씩 살아 남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로서는 여섯 시간만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백부장을 불러 예수님께서 진짜로 돌아가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주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이야기에서 아리마대 요셉이 빠져 버린다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더라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죽었다가 사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저 잠시 거의 죽은 상태가 되었다가 회복된 것이라고 억지를 부린다고 해도 아니라고 주장할 증거가 없었겠죠.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찾아갔을 때 한 번, 그리고 무덤에 장례되어질 때 또 한 번 두 번 씩이나 거듭 확인되어질 수가 있었고, 예수님께서 계셨던 빈 무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소중한 증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맡았던 역할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할 때, 애초에는 이런 행동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죽음이라는 어찌보면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함께 하며 섬기던 분이었기 때문에, 또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에 여인들은 자신들이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드셨던 그 순간에 말이죠. 요셉은 처음에는 그런 인식이 약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거부할 수가 없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으로써 자신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해 준 예수님의 죽음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어 자기 무덤에 장례를 치러 주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사람들이 비겁하고 나쁜 사람들이지 이 사람들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 인정해 주든 그렇지 않든 정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여인들과 요셉이 그 일을 할 때, 이들은 자신들이 뭔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후에는 우리를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흔들림 없이 믿을 수 있게 해 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영광스러운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눈에 보이는 대단한 일을 해야 주님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야 성도답게 사는 것이며 또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에 나오는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도 우리에게 바로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데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일의 크기나 느껴지는 일의 중요도는 하나님께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역할을 맡기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실 능력이 없어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또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우리가 주님을 향한 진심을 가지고 정직하게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 자신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처럼 말이죠. 때로는 손해를 보고 조금 위험해 질 수도 있고, 힘들어 질 수 있어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위해 의롭고 정직한 길을 가려고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향한 진심을 가지고서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한 큰 일을 하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해 우리답게 살 것을 요구하시기는 하십니다. 성도답게 살고, 제자답게 살고, 또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고…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손에 붙들고 사용하고 싶어하시는 것은 그러한 우리 삶의 조각 조각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요즘 우리 성도들과 청년들이 참 기특합니다. 주일을 안식하고 또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주일 날 하던 일을 멈추고 주님 앞으로 나오고 있고, 또 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데 따르는 크고 작은 손해와 어려움들을 스스로 감당해 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정말 기특합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제자가 되고 성도로 사는 것은 그렇게 시작하고 또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분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또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신에게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주님 앞에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하는 부분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꼭 큰 일 안 해도 됩니다. 빛나는 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께 충성하며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면 주님이 바로 그러한 우리 삶의 조각 조각들을 손에 드시고 놀랍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의 일부분은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처럼 하늘나라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중요한 한 조각이 될 것이며, 주변의 성도들과 이웃들을 유익하게 하며 주님 앞에서 커다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르심 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그게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작은 일에 충성하고 정직하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성도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