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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6.08. 주일오전 -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마가복음 78)


막1614to20 -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마가7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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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마가복음 16장 14—20절




부모들이 자녀를 나무랄 때 보면 그 끝에 거의 항상 덧붙이는 추임새 같은 말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인기가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너 미워서 그러는 줄 아니?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야!”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진심일까요? 실컷 나무라 놓고, 또 때로는 흠씬 두들겨 패 놓고 하는 말이라 자녀들 입장에서는 별로 믿겨지지 않는 말이지만, 그래도 진심은 진심입니다. 아무리 심하게 나무란다고 하더라도 자녀를 나무라면서 그저 자녀에게 상처 주고 기분 나쁘게 하기 위해서 그러는 부모는 적어도 정상적인 부모 중에는 한 사람도 없으니까요.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 부모가 아무리 심하게 여러분을 나무래도 부모의 진심을 믿어 주세요. 속는 셈치고 믿어 주세요. 부모의 꾸지람은 자녀를 생각하는 진심에서, 자녀를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일 때는 이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저 혼 나는 것만 기분 나쁘고 꾸지람을 듣는 것만 속 상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여전히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낙심 속에서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꾸중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직접 본 증인들의 말, 그것도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살펴 보았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들려주었던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도 있었고,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도 세 사람이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도 사도들이라는 열 한 명의 제자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증인들의 이야기가 사실 일 수 있다는 가능성 조차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것 때문에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셨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우리는 본문에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말은 고집이나 부정적인 생각으로 마음이 완고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는 것은 믿고 싶은데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 들지 않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갑니다. 마음이 완악해져 있으면 사람은 당연히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하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믿지 못하면 결국 그 마음은 더욱 더 완악해 집니다.


믿고 싶은데 믿지 못하는 것과 아얘 믿으려 들지 않거나 혹은 믿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생각할 때, 그것이 정말 믿고 싶은데, 믿음을 가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하나님에 대한 삐딱한 마음이나 자기 고집이 있어서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 것인지를 잘 구별해야 합니다. 믿고 싶은데 믿지 못하는 것은 믿음을 달라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지만, 뒤쪽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앞쪽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시지만 뒤쪽의 경우에는 꾸짖으시고 나무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믿는 믿음과 관련해서 주님의 꾸지람을 들었지만 우리는 실제적인 부분에서 그런 꾸지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이런 것입니다. 그 동안 오랫동안 주님이 충분히 내 삶의 공급자가 되어 주셨고 또 선하게 인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여전히 불안해 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는 여전히 내 지혜와 세상의 바르지 못한 방식을 따라 살아가려고만 합니다. 이런 경우도 있겠죠. 성경을 보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놀라운 약속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보니 정말 그런 약속들의 성취를 맛보며 은혜 안에서 힘 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약속들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로 여깁니다. 그 약속을 믿고 그 은혜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배고프고 목말라 신음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믿고 싶은데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일에 관심이 없거나 믿으려 들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주님은 그 마음의 완악함과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고 나무라십니다.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거나 심방을 받을 때, 위로를 받고 격려 받을 것을 바랍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받는 위로와 격려는 그저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결국에는 그 사람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들을 때는 힘이 된다고 말합니다.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지요. 그런데, 다음 날 보면 또 제 자리입니다. 얼굴은 다시 어두워져 있고 그 영혼은 다시 불안해 합니다. 이런 일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면서 실망 가운데 빠져 있는 제자들을 처음으로 찾아오셔서 그들을 위로하거나 격려하시지 않고 그 마음의 완악함과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는지 그 속 깊은 이유를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단단해져 있는 마음의 껍데기를 부수고 참된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으면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정신이 번쩍 들도록 그들을 나무라셨던 것입니다. 


잘 혼나는 성도가 잘 성장합니다. 혼나는 것을 꺼려하고 꾸중 듣는 것을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은 믿음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여러분을 꾸짖으시고, 상황 속에서 여러분을 혼내실 때, 그게 여러분 힘들게 하자고, 여러분 불쾌하게 하려고 하시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능력 있는 진짜 믿음으로 나아오라고, 그러니까 다 우리 잘 되라고 그러시는 것임을 헤아리시고 확실하게 혼나시고 기쁘게 꾸중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행스럽게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꾸중을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그 꾸중을 듣고 자신의 불신앙의 껍데기를 깨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소명을 맡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당연히 믿을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 불신앙의 껍데기는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에 대한 어마 어마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정죄를 당하게 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제자들이 이제 충분히 이 약속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복음을 그들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저는 설교자로 여러분은 청중으로 이 자리에 있는데요.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있어서 설교자와 청중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대개는 설교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청중들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전하는 사람이 30쯤 된다면, 듣는 사람은 70쯤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잘 전해도 듣는 사람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전하는 사람도 꼭 필요하고 또 그 사람의 역할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70이 다 채워져도 30이 없으면 100이 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그래도 30의 역할을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요? 19세기에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앉은뱅이가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설교를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 말에 굉장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설교를 잘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가르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 반드시 거기에 믿음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는 자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어야 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저의 기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하는 말씀을 믿고서, 순종하면서 설교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고, 또 그 기도와 애씀이 저를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언젠가 제가 전하는 말씀을 더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날이 온다면 주님이 훨씬 더 힘 있게 일하실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설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바르게 해야 합니다. 정직하고 신실하게 해야죠. 그렇지만 반드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복음의 약속을 믿고 복음을 전해야 했듯이 우리들도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하면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 그리고 마음이 주님을 향해서 열려지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는 제대로 일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잘 하려고 하는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잘 챙겨야 합니다. 내 안에 정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활짝 열려진 마음이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과 열려진 마음으로 살며 일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17절과 18절은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증거해 주고 있는데요. 이 말씀은 그저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지고 살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19절과 20절에서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기기서는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너무 놀라운 약속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래서 주님의 약속이라면 분명히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 기록되어 있는 일들이 정말 믿는 자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삶에서 그대로 일어났습니까? 이 약속들이 전부 이루어 졌나요? 그렇습니다. 그 일들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는 곳마다 귀신을 내 쫓았습니다. 또한 새 방언을 말했습니다. 그레데 섬에서 사도 바울은 독사에 물렸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서 오히려 그 섬 사람들에게 능력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주님의 약속은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 기록되어 있는 표적들이 글자 그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예외 없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은 특별한 표적으로, 주님이 꼭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경우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면 그것을 분명히 설명되어 있는데요. 찾아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적, 그러니까 표적의 의미입니다. 20절이 말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난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일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나중에 성령충만함을 받은 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록인데요, 주께서 함께하셔서 역사하시는 일은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두루 전파할 때 그 일에 따라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일들을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신 일들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이적들은 항상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가는 곳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참 성도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귀신이 쫓겨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죄와 악이 사라져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참 성도가 있는 곳에서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이전의 죄악에서 떠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결국 그 모든 죄와 악 뒤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죄짓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8세기 영국에는 커다란 영적인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참된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유익을 누린 것은 교회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에 일어났던 부흥은 영국에 그 이전에는 없었던 노동법이 생기게 했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린아이들이며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함부로 부려 먹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믿기 시작하자 그런 일들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노동법을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술집들이 다 문을 닫았다는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술을 먹으려고 하지 않으니 그렇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일들은 참된 성도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또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빛이 비춰지면 어둠은 사라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참 성도는 새 방언을 말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새 방언은 어떤 사람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다른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직접적으로 본다면 참된 성도는 그 입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참 성도의 말은 사람을 죽이고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살리고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우선 복음으로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일상적인 언어 생활 속에서도 똑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의 신앙에 있어서 말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책이 잠언입니다. 말에 대한 구절이 정말 많습니다. 그것은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특히 야고보는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그 사람의 경건은 일치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참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말이 거듭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말은 새 방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을 믿고서 참 복음의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건 다른 이들을 위한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세우는 그런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참 성도는 질병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도 필요합니다. 기도해서 다른 이들의 힘든 질병을 고쳐주는 일도 정말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사는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치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과 영혼에 병이 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이고, 아프고 병든 사회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성도는 그가 있는 곳에서 치유를 만들어 내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하고,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대학 때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던 선후배들이 모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자리에는 여자 후배 하나도 참석했습니다. 그 아이는 대학시절에 정말 그냥 이렇게 보기에도 그 마음에 상처가 가득한 아이였습니다. 곧 깨어질 것처럼 위태해 보이는 그런 아이였죠. 그런데, 이번에 이 아이를 만나고 또 대화를 나누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 상처 많던 아이가, 그 짧은 몇 시간 동안 오히려 거기 있던 목사들의 상처까지 상담하며 어루만져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또 감사한지… 정말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상처를 준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상처가 많다고 계속해서 다른 이들에게 상처만 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복음을 만나고 복음 안에서 치유된 사람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한 훌륭한 치유자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진짜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치료자들입니다. 이 나라는 얼마나 상처가 많고 얼마나 아픔이 많은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청소년들의 자살율도 마찬가지구요. 최근에는 가난한 분들이 그렇게 하시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게 얼마나 오래된 상처이건 그리고 얼마나 깊은 상처이건, 여러분의 연세가 얼마가 되었건 간에 주님 안에서 꼭 한 번 제대로 치료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의사되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안 그런 척 괜찮은 척하면서 사는 것은 정말 정말 손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 질병, 곤고함을 모두 짊어지신 주님 앞에 투명하고 정직하게 여러분의 상처와 아픔을 내어 놓고 반드시 치료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손길이 닿는 사람, 그리고 여러분의 손이 미치는 그 곳이 치유되게 하는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런 성도들에게 특별한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은 독사를 집어도,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런지 확신해 보신다고 지나가는 독사 함부로 건드리시면 안됩니다. 아무 거나 벌컥 벌컥 마시면 절대로 안됩니다. 이 약속은 위에 있는 표적들보다도 더 특별하고 드물게 이루어집니다. 얼마나 드물었으면 이 약속은 딱 한 번 사도 바울만이 그 혜택을 누려보았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다른 모양으로는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OM이라는 국제 선교회에는 둘로스라는 이름의 선교선박이 있습니다. 이 선박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데요. 한 번은 이 배가 항해 중에 갑자기 엔진이 꺼져서 작은 섬과 충돌할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 승무원이 다 함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충돌 직전에 엔진이 다시 돌기 시작해서 겨우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한 번은 상해에서 말레이시아 반투투라는 곳으로 이동하다가 또 엔진이 꺼졌는데 그 때는 설상가상으로 태풍에 휩쓸리기까지 했지만 또 한 번 위기를 모면했다고 합니다. 항상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어떤 성도를 특별하게 보호해 주시려고 하시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지금도 독사에 물린 사람이 거뜬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항상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죠. 다른 약속들과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영적으로 볼 때, 이 은혜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변함 없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참 성도의 영혼은 언제나 지켜 주십니다. 사탄의 어떠한 공격과 해를 입히려는 시도에도 완전히 망하지 않도록,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순간까지 완벽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우리가 수많은 시험과 우리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놀라운 일은 할 수 있고, 이 엄청난 은혜는 어떻게 해서 어김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1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 찾아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할렐루야! 지금 우리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우편은 어디입니까? 거기는 무엇이 있습니까? 거기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보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의 보좌는 절대로 공석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는 우리 예수님이 앉아 계십니다. 거기 앉아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움직여 가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통해 그렇게 일하실 것을 믿을 수 있고, 또 흔들림 없이 든든한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우리 자신을 보면 참 힘들고 좌절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은 커녕 나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커다란 실망에 빠질 때도 있고, 자신이 사는 모습을 볼 때에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조차 불안해 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 우리는 저 하늘 보좌,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빈틈 없이 섭리해 가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제자들은 두려움과 슬픔의 자리, 불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 그토록 두려워 하던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그 세상을 향해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시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시며 진짜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증거가 나타난 것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소식입니다. 그 분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그 분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는 놀랍고 은혜로운 소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이 놀라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복음을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을 붙들고 넉넉히 살 정도로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또 그것을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예수님께서 진짜로 자신의 왕 되어 주심을 경험하고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인지를 직접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 예수님은 부활하셨으며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 삶을 움직여 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약속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이것을 믿고 계시지요? 항상 이 믿음으로 사시고 이 믿음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항상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잘 챙기며 견고히 해서 그 믿음으로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 사는 진정으로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