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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6.15. 주일오전 -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에(룻기 1)


룻0101to05 -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룻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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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룻기 1장 1-5절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아름답고 의미있는 이야기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또 자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는 인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인생이 편안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기쁨으로만 가득 찬 그런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바램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이 두 가지 소원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충분히 받고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성공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 할 수는 있지만 그런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또 치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사회에 환원한다든지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런 인생은 감동이 되고 우리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지고 그래서 누군가에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인생이 되려면 우리의 삶에는 고난과 고통, 그리고 어려움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것만 있다고 저절로 삶이 향기롭고 아름다운 삶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선한 감동을 주는 삶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우리들의 좋은 반응과 그 반응이 씨앗이 되어 만들어 내는 좋은 열매들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쉽지 않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그렇게 아름답고 훌륭한 삶을 살았다더라라는 이야기가 들려와야 그 사람의 인생이 감동적인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고난’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연단’이라는 말부터 떠올리고 그래서 ‘인내’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물론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인내를 통해 성숙해 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아주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어려움과 고통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들며,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치유하는 그런 삶이 되게 하는 거의 유일한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 딱 한 가지 밖에 없다면 이 세상은 아무런 희망도 없을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절망하고, 이기적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모두가 다 이기적이 되고, 욕심을 부려야 할 상황에서는 예외 없이 욕심꾸러기가 되는 그런 존재가 사람이라면, 실제로 우리를 좋아지게 만드는 상황보다 그렇지 않게 만드는 상황들이 훨씬 더 많은 이 세상에서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삶과 이 세상을 망가뜨리고 가치 없게 만드는 그런 선택만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공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악하고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도 함께 악해지고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서 악하고 이기적이며 심지어는 잔인하기 까지한 반응을 내놓을 수도 있겠지만 정반대로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더 선하고 더 고귀한 반응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 안에 죄로 기울 쉬운 성향을 지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속에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충분히 상황과 반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그래서 사람과 이 세상에는 여전히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아주 감명 깊게 읽었던 책 중에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루마니아가 아직 공산치하에 있을 때, 그리고 공산당이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핍박할 때, 리차드 범브란트라는 목사님께서 경험하신 일들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책은 전혀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지켜 갔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일해 가셨는지를 기록해 놓은 책인데요. 이 책에는 이런 일화가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 당시 사상범으로 몰려서 최악의 감옥인 수도원 감옥이라는 곳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거기서도 중병을 얻어서 그런 사람들만이 수용되는 ‘4호실’이라는 곳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간수 중에서 죄수 중의 한 사람의 옛 친구가 있었는데, 부활절 날 그 간수는 그 친구를 위해서 몰래 선물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설탕 두 덩어리였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야 이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몇 년동안 설탕이라는 것을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었고 모두들 중병과 형편 없는 식사로 육체는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쇠약해진 몸은 모두들 그 설탕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호실 죄수들은 모두 그 죄수의 손에 들린 설탕 두 덩어리에 시선을 집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선물을 받은 죄수는 가펜쿠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충분히 그 설탕을 먹을 수 있었고, 또 그의 몸은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설탕을 먹지 않고서 다시 포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범브란트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설탕을 먹지 않겠네. 누구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르지 않나?”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침대 곁에 놓아 두었습니다. 그 설탕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다음부터 그 설탕 두 덩어리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죄수들의 침대를 이 침대에서 저 침대로 옮겨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인가는 고열로 신음하는 범브란트 목사님의 침대에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이 이 설탕을 먹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분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 분도 자신보다 더 악화될 사람을 위해서 그 설탕을 간직했습니다. 범브란트 목사님은 그 이야기의 마지막 쯤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2년 동안 그 설탕은 4호실에 있는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 두 번이나 나에게 돌아왔다. 그 때마다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했던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 감옥에서 몇몇 죄수의 처형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수들 중의 한 사람이 자신은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으니 살려 달라고 소리를 치며 애원했습니다. 그 때 그 수용소 안에는 막시밀리안 콜베라는 신부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신부님은 그 외침을 듣고 앞으로 나서면서 자기가 그 사람 대신에 처벌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관계 당국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콜베 신부님은 지하감옥에 감금되어서 그 곳에서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만약 인간이 상황이 좋아야만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 상황에 어울리는 악하고 이기적인 반응만 내놓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한 죄인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어둡고 절망스럽고, 또 이기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상상할 수 없이 아름다운 반응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역사 속에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기록될 수 있고, 또 이렇게 오늘 그 이야기를 읽고 듣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보게 될 룻기는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룻기 안에는 악인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선한 사람들이고 자기 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룻기를 읽다 보면 세상에 정말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나오미 같은 시어머니만 있다면, 룻 같은 며느리들만 있다면 그리고 보아스 같은 남자들만 있다면 그 속에서 누군들 불행하겠으면 누군들 상처받고 힘들어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룻기를 읽는 며느리들은 우리 시어머니가 나오미 같은 시어머니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시어머니들은 룻이 내 며느리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남자들은 룻같은 여인을 아내로 삼고 싶어 하며, 결혼을 앞둔 자매들은 보아스 같은 남자를 찾아 헤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성경을 거꾸로 읽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읽어야지 남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읽으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면 인생이 괴로워지고 불만스러워 집니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미워지게 됩니다. 


아무튼 룻기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룻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룻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그렇게 살기가 정말 어려운 시대였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의 한 부서에서 사사기를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사기를 설교하는 동안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사기가 정말 너무 거칠고 잔인하며 어두운 역사들만을 잔뜩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는 겉으로 보면 사사라고 불리는 신앙의 영웅들의 이야기 같이 생각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기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영적으로는 우상숭배가 당연시 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신데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인간 왕을 요구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도덕적인 타락도 극에 달합니다. 레위인들은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타락하고, 나실인인 삼손은 사사이면서도 방탕한 삶을 살고, 결국 이방여인에게 빠져서 그야 말로 패가망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 주면 또 다시 타락하고 건져 주면 또 다시 타락하고… 거의 3, 40년 단위로 이런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난폭해지고 잔인해져 갔고요. 사사기는 한 마디로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로 요약할 수 있는 그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은 룻기가 쓰여졌을 때가 바로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온 유대 땅이 그런 혼란과 어둠에 빠져 있을 때, 법도 없고 규칙도 없고 신앙은 타락할 대로 타락한 그 시기, 항상 블레셋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 되어야만 했던 그런 시대에 베들레헴의 한 구석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사랑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쓰여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룻기라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어두운 배경의 전부가 아닙니다.  시대는 이스라엘의 암흑기인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게다가 어느 해인가는 유대 땅에 아주 심각한 흉년이 찾아옵니다. 정말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베들레헴 사람 하나가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이방 땅인 모압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유대 땅에는, 심지어는 떡집인 베들레헴에도 떡 한 조각 남지 않았으니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살기가 어려워도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떠나면 안됩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이 그런 선택을 했으니 그의 상황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이사간 곳에서도 엘리멜렉의 가족들은 복되게 살지 못했습니다. 이사간 지 얼마되지 않아서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리고 모압에서 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은 큰 아들 말론과 둘째 아들 말로 기룐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와 이제는 시어머니처럼 미망인이 된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 이렇게 세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전부 일어나는데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10년 동안 한 가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상태가 되었고, 남겨진 가족들까지도 가장 불쌍한 사람들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의 대명사는 바로 성경이 ‘고아와 과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런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율법으로 정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사람들은 연명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망인이라고 다 같은 미망인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있고 그 자녀들이 다 자란 미망인들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도 자녀가 없는 미망인들, 게다가 나오미와 며느리들처럼 남편도 없고 자녀도 없는 미망인들은 불쌍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남자에게서 남자에게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가족 중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결국 모든 삶의 기반을 잃게 되는 것을 의미했으니까요. 게다가 지금 나오미는 모압 땅, 그러니까 이방 땅에 있습니다. 살아 보겠다고 약속의 땅과 형제 자매들을 팽계치고 거기까지 왔는데 자기 혼자만, 그것도 자신처럼 미망인이 된 며느리 둘과 함께 남겨지고 말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며느리의 손자들조차 없이 말이죠. 이것이 바로 룻기의 배경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쓰여진 배경은 가장 풍요롭고 평안한 시절, 강대한 나라의 유복한 집안이 아니라 이렇게 척박하고 잔인한 깨어질 대로 깨어진 삶의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가 읽게 될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임을 기억하면서 이 이야기를 읽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룻기는 단순히 그런 시대를 살다간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정말 은혜롭고 더 아름다운 메세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단 한 번도 하나님께서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으시는 이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사람들은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척박한 시대의 거친 삶의 자리에서 살면서도 결코 자신의 자신됨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사람들,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고 선한 삶을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굉장한 오해를 하게 만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도 우리처럼 큰 일을 크게 보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큰 일을 한 사람들을 큰 인물로 여기시며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착각에 가장 심하게 빠져 있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같은 목회자들인 것 같습니다. 자신이 큰 목회를 해야만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꼭 욕심 때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진심을 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큰 교회를 세우려고 안깐힘을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생각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는 큰 일과 사람들이 남기는 커다란 업적에 정말 관심이 많으실까요? 우리가 그런 일을 하고 그런 결과를 남겼을 때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실까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남긴 그런 일들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실까요?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런 유치한 분이 아니시라는 것은 모두 잘 알고 계시지요? 우리 하나님은 크고 빛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것 자체로는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 처럼 작은 사람들, 큰 일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고 그래서 우리들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큰 일을 하는 사람을 크게 보고, 빛나는 업적을 세우는 사람들을 선망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큰 일을 할 수 없고, 그런 업적을 세울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30등 하는 아이의 눈에야 10등 하는 아이가 대단해 보이지 1등 하는 아이의 눈에도 10등 하는 아이가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십니까? 하나님께는 큰 일이란 없습니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들이 하나님께는 늘상 행하시는 일들에 불과합니다. 또 하나님은 온 우주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우주를 섭리 가운데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놀라게 할만큼 커다란 인간의 업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관심 가지시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 분을 정말 기쁘게 해 드리고 심지어는 흥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광과 선함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 분은 인간들의 탁월한 능력이나 거대한 업적 앞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의 작은 성실함과 아름다운 삶을 보실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하고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붙들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크게 사용하십니다. 


룻기는 딱 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살아보겠다고 이방 땅으로 갔다가 어쩔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의지할 곳 없는 늙은 미망인입니다. 또 한 사람은 그 편견많은 유대 땅에 그 시어머니를 따라 들어온, 그 스스로도 미망인이 된 이방여인입니다. 나머지 한 사람도 그저 작은 지방성읍의 평범한 지주입니다. 여기 위대한 인물을 없습니다.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성경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훈훈한, 그리고 은혜로운 이야기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을 위해서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 사람이 각자가 처한 위치나 환경은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형상됨을 지켜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복음성가들이 몇 곡 있는데요. 그 중에서 제가 들을 때마가 이것이 나의 삶과 존재의 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곡이 하나 있습니다. 이승철이라는 가수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자기 앨범에 포함시키기도 한 곡으로 유명한데요. 제목은 ‘소원’입니다. 제가 가사를 읽어드릴 테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그 맘을 알기 원하네

그 길 그 좁은 길로 가길 원해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알며

소망, 그 기쁜 길로 가길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 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 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 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 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 가는 길만 비추기 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내가 노래하듯이

또 내가 얘기하듯이 살길

난 그렇게 죽기 원하네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

사랑, 그 좁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깊은 길로 가기 원하네

그 높은 길로 가기 원하네



저는 이 복음성가를 부르고 또 들을 때, 정말 가슴이 떨려오고 마음 속에 눈물이 흐를 때가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꼭 큰 일을 하고 남보란 듯이 번쩍 거리는 삶을 살아야만 하나요? 그래야만 떳떳하고 그래야만 자랑스러워 할 수 있습니까? 정말 우리 삶의 한 절이라도 아름다우신 우리 주님을 닮을 수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면 그 삶이 아무리 낮은 삶이고 그 삶이 아무리 평범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족하고, 그것으로 가장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만들어진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피조물입니다. 나의 상황이나 나의 상태, 그리고 삶의 여건이 어떠할지라도 이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환경이나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다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존재의 영광이며, 우리의 인생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삶의 여건이나 환경 때문에 여러분의 영광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도록 지음받고 또 부름받은 그 영광스러운 소명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러니 이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람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니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됨을 놓치지 않고 우리 삶의 한 절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하기 위해 내어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영광의 가장 빛나는 한 조각으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세상에 자랑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옆에 있는 성도들과 손을 맞잡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 이렇게 고백합시다. 따라 하겠습니다. “나는 / 빛나고 아름다운 /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겠습니다.” 이제 그 상태에서 눈을 감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그렇게 고백했던 그 형제와 자매, 그리고 나의 가족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또 더불어 나의 삶도 그런 삶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드러내며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살아가게 해 달라고 소리를 내서 마음을 담아 기도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