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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4.06.01. 주일오전 -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마가복음 77)



막1601to13 -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마가77).pdf


20140601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6장 01—13절




마가복음 15장 47절과 마가복음 16장 1절. 성경책으로 보면 한 절에서 그 다음 절로 넘어갔을 뿐이고 우리가 직접 마가복음을 읽을 때에는 그 사이를 넘어가는데 1초도 걸리지 않지만, 실제로 이 사이에는 날 수로는 삼일, 정확하게는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아침까지 하루 반나절쯤의 시간이 끼어 있습니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고 여느 주간의 다른 날들과 똑같이 흘러간 똑같은 길이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에게는 가장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고, 또 절망스러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 하루 반 나절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의 하루 반나절, 모든 소망을 걸고 따라다녔으며, 영혼을 기쁘게 하는 천국 복음을 전해 주었고, 또 가장 사랑했던 분을 잃어버린 다음의 하루 반나절 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달아나 버렸지만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았던 여인들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는 곳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거기 잘 모셔놓는 것까지 지켜 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 했던 것은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미처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드리지 못했던 향품들을 발라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으로는 그렇게 해야 정상적인 장례 절차가 이루어 지는 것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해가 졌고 안식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하루 동안은 향품을 사러 갈 수도 없었고, 또 자신들이 머무는 곳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곳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꼬박 하루를 기다렸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정말 슬프고 정말 힘들었겠지만 그렇게 하루를 지냈습니다. 안식일이 다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토요일 저녁이 된 것이죠. 두 마리아와 살로메는 해가 지자마자 시장으로 달려가서 향품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새벽같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하기는 했겠지만 아마도 눈에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슬픔과 절망,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덤을 향해 가면서도 그들에게는 커다란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이 너무 커서 도무지 여자 셋이 옮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돌을 어떻게 치우고 무덤으로 들어갈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일단 가서 누군가를 붙들고 사정하면 그 돌을 치워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정신 없이 무덤을 향해 가던 그들이 처음으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든 곳은 무덤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도착한 세 여인은 너무 놀랐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어야 할 그 커다란 돌이 활짝 열어 젖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놀라움 반, 걱정 반 무덤으로 달려 들어간 여인들 눈에 들어온 것은 세마포에 싸인 예수님의 시신이 아니라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었습니다. 사실 이 청년은 천사였지만 여인들의 눈에는 그저 흰 옷을 입은 청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말을 건 것은 그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은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렇게 보니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여인들은 더 놀라고 더 당황했겠지만 청년은 차분하게 이렇게만 말합니다.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여인들은 그저 놀라고 무서워 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무덤에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두려움 때문에 여인들은 천사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전해달라는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새벽이 지나 이제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각에 막달라 마리아는 아주 특별한 은혜를 입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처음으로 사람 앞에 나타나신 것이기 때문에 아주 각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제 막달라 마리아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걱정에 빠져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무덤에서 만났던 그 청년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고, 그래서 여전히 슬퍼하면서 울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로 뛰어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예수님께서 정말 다시 살아나셨다고 소리쳐 알려 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믿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 했을까요? 그랬으면 참 좋겠지만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성경은 그저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마도 그들은 마리아를 나무랐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을 가지고 장난을 치냐고 역정을 냈을 것입니다. 아니면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충격이 너무 커서 저렇게 되었다고 불쌍히 여기며 동정했을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함께 모여 슬퍼하던 제자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모든 것을 체념하고서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 길에서 예수님과 만나서 몇 시간 동안 가르침을 받고 식사까지 함께 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 나서 사라지실 때까지 자기들 곁에 있는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 때 예수님은 이전에 돌아가시기 전, 그 남루하고 초췌한 모습이 아닌 너무도 아름답게 회복된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결국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그 길로 예루살렘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이전에는 자신들과 함께 슬퍼하던 제자들에게로 뛰어 들어가 자신들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제자들은 이 두 사람의 이야기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처럼 믿지 않던 사람 둘이 갑자기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들은 계속해서 불신을 고집했습니다. 


처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접한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고,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면서도 계속해서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슬픔과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전혀 이야기 된 적이 없었고 그래서 전혀 예측할 수 없게 일어난 일이라면 이러한 제자들의 반응은 너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충분히 예고된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만 해도 예수님께서는 다섯 번이나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까요. 기록된 것만 이러니 기록되지 않은 것까지 하면 예수님은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굉장히 여러 번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항상 그것과 더불어 말씀하셨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항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한 덩어리로 놓고서 이야기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진짜로 그것도 말씀하신 대로 당국자들의 손에 붙들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남은 것일까요?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부활입니다. 적어도 이제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는 커녕 그런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조차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기적이 아니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정말 너무나 엄청난 기적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것을 믿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처음으로 목격하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했습니다. 그 기적들 중에서는 나면서 부터 맹인이었던 남자가 다시 보게 된 일, 40년된 중풍병자가 일어난 일,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 매장지로 향해 가던 나인성 미망인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 등. 정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정말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일도 여러 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렇게 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수많은 기적을 목격해 왔고 사실 이미 여러 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보아 왔으니까요. 그들은 이미 죽은 자의 부활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아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었을까요? 왜 여인들은 천사들을 만나 부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도 그저 두려워 하기만 했고, 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증언을 두 번씩이나, 그것도 믿을만한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들었으면서도 그것을 믿지 못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상황과 그 상황이 만들어낸 감정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고, 또 예수님께서 자신이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지만, 막상 눈 앞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처참하게 돌아가시자 그들은 그 상황에 사로 잡혔고 또 그 상황이 만들어낸 절망에 붙들려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그 절망이 그들을 그러한 불신앙 가운데로 몰고 갔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은 그 상황 자체로도 사람들을 굉장히 힘들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이 사람을 정말로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상황이 주는 고통이나 스트레스가 아니라 그 상황이 그 사람에게 품게 만드는 뿌리 깊은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입니다. 객관적인 상황은 정말로 그렇게 심각하거나 절망적인 것은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성도 있고 소망을 품을 근거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상황 자체가 주는 감정에 사로 잡히게 되면 더 이상의 희망도 가능성도 없다고 믿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충분히 소망할 수 있는 것도 소망하지 않게 되고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것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 외에 다른 상황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지만 성도들에게는 더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래서 안된다, 저래서 못한다, 그러니까 끝이다라고 말하는 그 자리에만 주저 앉아 있게 됩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현실이 전부이고, 그것을 넘어선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서 옆에서 아무리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자기 상황에 대한 이야기만 반복하면서 그래서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하게 됩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면 그 사람의 삶 속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 그리고 믿음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불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때부터 신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를 뒤흔들어 놓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우리 모두가 좋아할 만한 구절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요. 그 중에서도 11장 1절은 성도들이 대표적으로 사랑하는 구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정말 힘이 되고 은혜로운 말씀이죠. 그러나, 사실 이 말씀은 사랑을 받고 있는 만큼 잘못 이해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꿈은 이루어 진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으면 곧 그것이 현실이 된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물론 이 말씀 속에는 그런 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크게 보면 그런 뜻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뭐든지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된다는 그런 막연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절부터 3절까지를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합니다. 더 길게는 12장까지를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하고요. 1절은 과연 참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짧은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바로 1절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서 3절은 그렇다면 과연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말해 줍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그 믿음이 하는 역할인데요. 그런 믿음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합니까? 믿음은 우리가 보는 이 세계가 보이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러니까 진짜 실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는 것이 믿음이 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라는 현실보다 더 견고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또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절은 바로 이 믿음으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확실하고 흔들림 없이 견고한 것으로 믿고 붙드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믿음 장인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영웅들, 그리고 12장에 나오는 예수님은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서 하나님으로 부터 인정을 받은 분들입니다. 히브리서가 믿음에 대해서 이런 설명과 증언을 들려주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의 진짜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기 때문에, 주어진 보장이 있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 내가 눈으로 보고 있고, 또 경험하고 있는 것보다 더 변함 없고 더 확실한 것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비록 천사를 만나고 믿을만한 사람에게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들려주신 약속을 붙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현실과 그 현실이 주는 자기 감정에만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보았고 남들은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이적들을 수없이 경험하였으면서도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말씀 뿐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뒷 받침해 주는 증거까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성도의 믿음은 보이는 것에 근거해 있지 않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래서 참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에 묶이지 않습니다. 참 믿음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게 만든,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에 묶이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그 모든 약속들을 일일히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 성경 자체가 약속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너무도 든든하고 은혜로운 언약의 보고가 바로 이 성경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약속들은 그 약속을 믿고 진실로 그 언약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현실이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언약을 정말로 믿는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실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그 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합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왜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까? 그 성경이 바로 그러한 변함없는 약속을 가득 담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단순히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약속들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있었다면 마가복음 14장 이후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처럼 슬프고 절망스럽기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거나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도 두려움과 슬픔, 절망 가운데 숨어 있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향해 갈 때도,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초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도무지 믿지 못할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던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그 모든 이야기들을 기쁨과 감격 가운데 읽어내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은 단지 그 약속이 이루어 졌을 때에만 그 사람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 언약을 붙들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이 됩니다. 비록 자기가 만들어낸 꿈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꿈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른 삶을 사는 법인데, 자신에게 보장이 있고 확실한 변치 않는 약속, 그 누구도 취소시키거나 변경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진짜로 믿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더 달라지겠습니까? 얼마나 확실하며 얼마나 든든하고 또 얼마나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겠습니까?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다른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서 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분명히 자신을 절망시키고 그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있게 만드는 그런 현실을 살다가 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부정적인 감정을 붙들고 여기 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여기 붙들려 있고, 여기 주저앉아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이 부활하셨는데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해서 계속해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제자들처럼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는 항상 주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빠져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만들어 내는 감정에 붙들려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참 믿음은 그 모든 것 너머에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고, 그 약속을 내가 살아가야 할 진짜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꼭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을 여러분의 신앙의 목표로 삼으시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래야 그 믿음이 여러분을 능력있고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흔들리는 현실과 그 현실이 만들어 내는 나쁜 감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죽음같은 현실 속에서도 거듭 거듭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