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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5.09. 금요기도회 -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4 (사도행전 60)


행1036to43 -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4(사도행전6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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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0장 36-43절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온 세상의 왕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선포입니다. 다른 신이나 혹은 어떤 사람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라면 그리 복된 소식이 될 수 없지만, 복음은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소리이기 때문에 정말 기쁜 소식, 최고로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선하신 성자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보다 더 좋고 복된 소식은 있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기꺼이 예수님의 왕되심을 받아들이고 그 분의 다스리심에 순종한다면 우리는 그 좋으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복음 되려면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왕되었던 삶, 세상과 사탄을 따라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회개가 없으면 안되는 것이죠. 그래서 회개는 부담스럽고 힘든 것이 아니라 너무도 복된 초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삼고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 우리 삶에는 정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모두 선하신 분, 전지전능하신 분이 이 세상과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눌린 사람들을 고치시고 그 백성에게 유익하게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만 용서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구석 구석까지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서는 분명히 마음의 치유가 일어나며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얼마나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보다 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지금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훨씬 더 큰 기쁨을 누리며 훨씬 더 아름답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결코 그 마지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다 이런 복음의 맛을 알며, 이런 복음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하게 소원합니다. 항상 성령 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은 점점 더 영광스럽고 풍성해지며 또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만족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순종이 하나님 나라를 여러분의 삶에 이루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음이라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떠올리실 것입니다. 아주 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인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베드로는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이 그 복음,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핵심보다 증인이 더 중요할 수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누가 그 이야기를 전하느냐 하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합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이 전하면 그 이야기까지도 가치를 잃어버리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럽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니,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특히 전해야 할 소식이 그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게 사실이어야만 다른 모든 것들이 진짜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모두 완전하게 지켜 보았습니다. 그 두 가지를 그저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서 그리고 가장 먼저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자격을 갖춘 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증인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은 참 복된 소식입니다. 세상을 구원하고 그 세상에 새 생명을 주는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복음이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집니다. 증인이 또 다른 증인을 만들고 그 증인이 또 다른 증인을 만드는 식으로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이후의 증인들은 직접 보고 들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증인이 되는 것일까요? 증인이란 원래 목격한 사람입니다. 직접 보거나 경험한 사람을 증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점에서 참된 증인이란 자신이 증거하는 것이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일부분이 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사람은 진짜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복음은 분명히 이 사람의 입에서 저 사람의 입에서 들려집니다. 그리고 들은 사람들 중에서 그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죠. 그런데 복음은 그 복음이 진짜로 믿어지는 순간 그 사람을 단순히 복음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경험하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성령님께서 복음이 말하는 놀라운 일들이 그 사람의 속 사람과 삶 속에서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와 부활은 놀랍게도 그 사람의 삶의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 됩니다. 그래서, 정말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복음을 빼놓고 자기 삶을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복음이 자신의 삶 속에 일으킨 어떤 ‘사건’이 전혀 없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을 어떤 사람에게 믿어지게 하고 또 적용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 없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복음은 어떤 식으로든 그 복음을 진실로 믿은 사람의 삶을 바꿔 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은 사람이 또 다른 증인이 됩니다. 여기에 우리가 능력 있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능력있는 복음의 증인이 되려면 우리가 먼저 복음을 경험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도 은혜이지만 우리가 들은 복음이 우리의 삶을 바꿔놓고 새롭게 만드는 그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증언은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의 증언이 되어서 효력있는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복음을 경험하는 일은 결국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우리 삶에서 경험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첫째로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십자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말합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나무라고 말합니다. 나무나 십자가나 그게 그거 인 것 같지만 십자가를 나무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율법 때문인데요. 율법은 나무에 달려 죽는 자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예수님을 믿거나 따라다닐 가치가 없는 죄인으로 낙인 찍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이는 일이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온전히 짊어지고 돌아가신 분이시라는 확실한 증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기준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돌아가신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께 하나님의 저주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셨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퍼 부으셔야 하는 저주를 면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지 않았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퍼부어야 할 저주까지도 대신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거기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그 죄도 예수님의 것이 아니며, 그 저주도 예수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저주는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그 저주까지 함께 뒤집어 쓰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십자가가 아니라 나무라고 말한 것에는 이런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쏟아부어져야 할 저주까지도 대신 감당한 그런 죽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을 향해서 그 어떤 악의도 품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쏟아부어져야 할 저주는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녀인 우리, 백성인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적대를 받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벌 받을 것이 두려워서 억지로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면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런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베드로는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두 번째 기둥입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고 인정하셨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으로 부활이라는 도장을 찍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그 누구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하셔야 할 일에 성공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받으셨고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 어디서도 확인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그 분을 믿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을 의심이나 흔들림 없이 믿고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만 부활이라는 도장을 찍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또 하나의 엄청난 의미가 있고,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반드시 부활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자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자의 부활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임을 보여 줍니다.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빼먹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다는 것과 둘째로 그렇게 하실 때,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의 부활이었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한 사람이 살아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서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되 예수님처럼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은 단지 우리가 다시는 죽음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은 죄가 만들어 내는 최악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말은 이제 죄의 모든 악한 결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길이 열려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이제 죽음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죽음마저도 우리를 영원히 묶어 놓을 수는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는 부활의 확실한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육체적인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죽음은 오히려 영원의 문이 열리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죽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살아서 믿는 자에게는 죽어도 다시 살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의 공포가 사로 잡지 못합니다. 그 공포에 사로 잡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이 이렇게 되었다면 우리가 과연 다른 것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고 꽁꽁 묶어 놓았던 쇠사슬이 끊어져 나갔다면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근심과 걱정에 묶여서 한숨 쉬며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래서 우리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미 죽음의 두려움도 넘어 선 것입니다. 그러니 살면서 경험하는 두려움은 이제 우리에게는 진짜 두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자꾸 이런 저런 근심과 걱정으로 여러분을 위협하려고 하거든 당당하게 나는 죽음도 이긴 사람이라고 말하십시오. 죽음도 묶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스러운 생명을 몸에 지닌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며 사탄을 대적하십시오. 우리가 부활을 믿는 참된 믿음으로 그렇게 하고 또 한다면 두려움과 근심은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과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로 인해 죄의 형벌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우리가 당해야 할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이 나가 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단순히 죽음을 면제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영원히 영광스러운 부활을 약속받았으며, 그 영광을 소망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음도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음도 우리를 어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죄와 죽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 은혜와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형벌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삶의 근심과 걱정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끝장을 내 놓았으니 믿음으로 그 복과 능력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복음을 확고히 믿는 믿음 안에서 온갖 두려움과 싸워 승리라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