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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6.11. 새벽예배 - 유다와 스불론과 잇사갈(창세기 158)


창4908to15 - 유다와 스불론과 잇사갈(창15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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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창세기 49장 08-15절



야곱은 자기 아들들에게 차례대로 복을 주며 그들로 부터 생겨날 지파들의 미래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이제 야곱의 시선은 유다를 향합니다. 첫째 아들부터 세째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좋지 않은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지파의 대표자로서 혹은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자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자신의 약점과 마음 속의 악함을 잘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유다는 우리가 알다시피 형제들 중에서는 가장 지혜도 있었고 또 생각도 바로 할 줄 알며, 또 아버지나 형제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아는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기 지파의 대표자요 시조로서 엄청난 복을 받고 그 복을 자기 후손들에게도 물려 줍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볼 때는 참 부당하고 불공평 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대표를 바라보시는 눈이고 또 그 대표를 대하시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대표의 역할을 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이미 개인이 아닙니다. 그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전체를 보십니다. 그래서 그 대표 한 사람은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자신이 대표하는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가정을 신앙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가정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신실하며 또 순종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인 동시에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내가 속해 있는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를 대표하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로다” 이것이 야곱이 유다에게 처음 들려준 이야기 였는데요. 잘 보시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셨던 꿈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분명히 요셉의 꿈은 이미 이루어 졌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가족들을 만났을 때 이미 이루어 졌습니다. 반면에 유다에게 주어지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예언은 그의 후손들을 향한 것입니다. 형제의 높임을 받고 원수의 목을 잡고 형제들의 절을 받는 것! 이것은 그가 왕이 된다는 뜻입니다. 형제들로 이루어진 한 나라의 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0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에서 왕이 나올 것이며 그 왕권이 유다지파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가 오실 때까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로라는 말은 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 밖에 나오질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메시야 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지파는 정치적인 왕을 계속해서 배출하는 지파가 될 뿐만 아니라 이 때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메시야가 나오는 지파로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유다지파가 받은 복 중에는 풍요의 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은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유다지파는 풍요의 상징이 될 것입니다. 포도주는 빨래하는 물처럼 흔해질 것이고 우유가 입 속에서 항상 머물러 있을 정도로 풍요해질 것입니다. 실제로 출애굽 당시 유다지파의 숫자가 가장 많았던 것을 보면 이 약속은 가장 힘든 현실 속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져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끊이지 않는 왕권과 마르지 않는 풍요로움. 이것이 하나님께서 유다를 택하셔서 그를 통해 그의 자손들에게 허락하신 복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모든 면에서 야곱 아들들 중에서 장자로 선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유다의 자손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그러니까 영적인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음을 생각해 볼 때, 이 복이 미친 범위는 정말 어마 어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다에 대한 예언을 마친 야곱은 이제 스불론과 잇사갈로 넘어갑니다. 스불론에 대한 예언은 단 한 절입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네 째 아들 차례이지만 야곱은 차례를 훌쩍 건너 뛰었습니다. 레아의 여섯 째 아들이자 야곱의 열 한 번째 아들인 스불론을 먼저 축복한 것입니다. 이것은 레아의 다섯번 째 아들인 잇사갈 보다도 앞선 것입니다. 이유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앞선 자가 얼마든지 뒤로 처지고 뒤 따르는 자가 앞서게 된다는 성경의 말씀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불론에게 주어진 약속은 굉장히 짧지만 거기에 부정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잇사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다른 형제들은 다 양인데 잇사갈만 그들 사이에 꿇어 앉은 나귀라고 표현되는 것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비록 잇사갈 지파는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하지만 거기서 그들이 하는 일은 나귀가 되어 압제 아래서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정착 후의 역사를 전해주는 사시기를 보면 잇사갈 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비록 여호수아로 부터 농사 짓기에는 가장 좋은 땅을 분배 받았지만 결국 그들은 거기서 가나안 사람들의 지배를 받게 되고 맙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대로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내어 쫓아야 했는데 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그러다가 결국 다시 왕성해진 가나안 족속들의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서는 이러다가 잇사갈 지파가 심지어는 그들에게 흡수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복주심, 그리고 사람의 책임은 참으로 묘한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 관계를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 속에서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영원한 구원을 제외한 모든 선택과 복주심은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과 무척 밀첩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잇사갈을 보면 그것이 정말 분명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잇사갈 지파에게 그런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그들의 운명이었을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잇사갈에게 주셨던 예언은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라기 보다는 너희가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잇사갈이 왜 압제 아래서 이방인들을 섬기는 종이 되었나요? 가장 좋은 땅, 자신들이 원하는 땅을 차지하였으면서도 말이죠. 그것은 그들이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그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내쫓지 않았고 그래서 결국 그런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아무런 이유 없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벌을 주시거나 저주를 내리시지 않습니다. 그 벌과 저주를 가져오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복들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에는 벌과 저주는 더디 내리시고 복은 더욱 더 풍성하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은 후히 주시지만 징계는 더디 내리시고 또 감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은혜에 반응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것들로 채워져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항상 복 주시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을 헤아리셔서 그 은혜 안에서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