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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7.31. 새벽예배 - 백성이 믿으며2(출애굽기 23)



출0427to31 - 백성이 믿으며2(출2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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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4장 27-31절



성도들이 가장 많이 상처를 받고 가장 크게 절망하는 곳이 어디일까요? 얼핏 생각하면 우리가 세상이라고 부르는 삶의 자리인 것 같습니다. 거기는 시험도 많고 유혹도 많고 또 신앙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진 적극적인 반대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현실 속에서 입는 손해와 세상에 입게 되는 상처는 그래도 견딜만 합니다. 그것은 성도라면 모두 다 세상이 그렇다는 것,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런 역하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가장 크게 실망시키는 곳, 그리고 가장 큰 상처를 입히는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굉장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상처입고 실망하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라면 교회에서 큰 상처를 입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실망을 얻게 되는 이유는 놀랍게도 ‘신앙적인’ 이유입니다. 교회가 독특한 이유는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일이 현실적인 동시에 또한 모든 일이 신앙적이고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 두 가지를 따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입는 상처 또한 현실적인 동시에 영적이고 신앙적인 상처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현실적인 상처가 그 사람에게 더 크고 깊은 영적인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모세의 형인 아론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영접하고 또 그다지 말에 능숙하지 못한 모세의 입 노릇을 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론이 이 소명을 받아들인 것이 쉽게 이루어진 일로 여기기가 쉽습니다. 성경이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모습만을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론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아론이 그렇게 반응하고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적으로 볼 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론이 모세의 형이었으니까요. 형이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쳤던 동생을 맞이하러 광야로 나가고, 거기서 동생을 영접해서 애굽으로 돌아오고 동생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아론에게 어떤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일반적으로 볼 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무런 장벽이 없는 그런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볼 때도 그것은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 굉장히 난처해 질 수 있으니까요. 아론이 이 소명을 쉽게 받아들였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실적으로 본다면 아론은 이 두 가지 장벽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져 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있는 사람도 아니고 똑똑한 사람도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도움이 야 되겠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은 바로 겸손한 사람이고 자기의 입장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존심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쉽든 어렵든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이, 직분, 경험, 그리고 사회적인 위치, 학벌, 재산… 이런 것들 때문에 그런 것들이 자기만 못한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로 가지 못 한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 답게 해 낼 수 없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아론이 모세의 형이라는 사실처럼 스스로 내세우고 싶은 것, 내세워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내세우지 않을 때,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 답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고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깊은 상처를 입게 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으며, 친히 가장 낮은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을 믿음의 주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우선권이 교회 안에서도 똑같이 주장되고 버젓이 통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정신을 따르는 곳이지 예수님의 정신과 마음을 따르는 곳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존심과 ‘가진 것’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은 그런 점에서 교회가 교회되고 그 안의 성도들이 기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미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아론의 이야기를 듣고 모세가 일으킨 기적을 본 장로들과 백성들의 반응을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장로들과 백성들은 아론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경배하며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아론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그에게 겸손이 필요했다면, 장로들과 백성들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현실논리를 넘어서는 믿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현실은 항상 고려대상에 들어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현실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에 의하면 교회에서 조차 현실이 우선입니다. 믿음은 현실적인 조건이 충분해야 그제서야 등장하는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은 너무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겠지만 동시에 정말 현실성 없어 보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의 노예와 비슷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이런 그들이 과연 자신들이 애굽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질 수 있었을까요? 특히 보수적인 장로들에게 말입니다. 그들도 사람이었으니 그 일이 얼마나 일어나기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현실론을 들고 나오기 전에 믿음을 사용했습니다. 아론의 이야기를 믿었고, 그래서 모세를, 그 초라한 행색의 모세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보내신 구원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현실론을 넘어섰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일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성도들을 가장 크게 좌절시키는 것은 교회 안에 득세하는 현실론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도, 또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옳은 일이고, 그렇게 되어야 마땅한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어도 현실적으로 힘들거나 가능성이 낮으면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번번히 현실론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믿음으로 해 보려고 하는 성도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입고 좌절을 겪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그러면서도 성도들이 그 안에서 상처를 입고 영적인 좌절을 겪지 않으려면 그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자존심과 위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앞세울 수 있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현실론 보다는 믿음을 따라 결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용기가 꼭 필요합니다. 모세는 홀로 모세일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감당하는 모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나중에는 많이 변질되기는 하지만, 아론이 있었고 또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손을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현실론이 아니라 믿음을 따라 결단하는 용기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놀랍게 일하시는 것도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이 모인 교회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믿음으로 세우는 그런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항상 겸손과 믿음을 따라 행하는 우리들이 되어서 이런 복을 나누고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