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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4.08.06. 새벽예배 - 나는 여호와니라(출애굽기 26)



출0521to0609 - 나는 여호와니라(출2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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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출애굽기 5장 21절 - 6장 9절




어제 살펴 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모세와 아론을 신뢰하고 또 자신들을 돌아보신 하나님을 경배했지만, 자신의 몸에 화가 미치자 태도를 바꿨습니다. 없는 말까지 지어내면서 모세와 아론을 비난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불신앙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고 힘든 일이 생기자 태도를 바꾼 것은 백성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성들이 자신을 비난하자 모세는 다시 기도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앉았습니다. 말이 기도지 사실 하나님께 따져 묻기 위해서 하나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따져 묻기 시작합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학대하며 주께서도 이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모세의 이 말은 백성들의 말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는 듯하지만 굉장히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결국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고, 게다가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나몰라라 하고 계신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은 ‘몸’에 약합니다. 몸은 현실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몸은 현재 밖에 신경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몸에 약하고 민감한 사람은 거의 항상 현재의 상황만 보면서 그 현재에만 반응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불신앙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라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은 항상 과거의 상황과 미래의 상황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현재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현재가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특히 과거의 상황이 현재의 재료가 되었듯이 현재의 상황은 미래를 위한 재료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과거에 어떤 상황 속에 있을 때, 그것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을 위해서 어떻게 사용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아주 좋은 상황 속에 있다고 해서 미래에도 그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또 지금 힘든 상황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것이 또 어떤 미래를 위한 좋은 재료가 될 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재만 보고 그 현재에만 반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때, 현재만 보고 인도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만 생각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 모든 인류의 역사 전체와 그 마지막,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고려 하십니다. 현재의 상황을 미래를 위한 어떤 재료로 어떻게 사용할지를 완벽하게 판단하시고 그대로 섭리해 가십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악을 행할 때도,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도 때로는 거기에 전혀 무관심하신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때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무 말씀 하지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하나님께 올바른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반응은 신앙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신 일을 믿음만으로 감당해 내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행하실 놀라운 일들로 인해서 오히려 나중에는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발 좀 나가라고 쫓아내게 될 것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수많은 하나님의 이름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특히 이 이름은 언약을 주시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이름을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언약의 하나님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그래서 반드시 그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의 신음소리를 듣고 너희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했고 그래서 너희를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이 왜 우리 편에서 보면 불필요해 보이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구원하실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어떤지, 성품은 어떤지를 제대로 알려주시고 또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한 후에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따르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더디 믿고 잘 믿지 못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게 하려면 그렇게 힘든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험하여 아는 과정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우리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분이시고 또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시고 또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못하게 가로 막는 현실적인 어려움은 실은 우리 믿음을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도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까지도 오히려 그러한 현실에 걸려 넘어져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니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안타깝고 또 안타까우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모세는 그 대답을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며, 또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신 이유를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그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음 반응은 어떤 의미에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면 모세의 설명을 듣고 나서 보인 두번째 반응은 다분히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악화된 상황 때문에 생긴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리고 여전히 그대로인 현실 때문에, 이유를 듣고 하나님의 보증을 받고 나서도 마음의 불신앙을 거두어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히 변함 없는 여호와, 언약의 신실하신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모두 이루어지기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은 전부가 다 잠정적인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결정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항상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믿는다면, 이 믿음 하나로 충분할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삶의 질곡 가운데서 더 확실하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또 알게 되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