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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4.09.05. 금요기도회 - 안디옥 교회에(사도행전 75)


행1301to03 - 안디옥 교회에(사도행전75).pdf


20140905D.mp3.zip





본문 : 사도행전 13장 1–3절




오늘부터 사도행전의 후반부를 함께 살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은 사도행전이 24장이니까 장수로 보아도 딱 앞쪽 절반에서 뒷쪽 절반으로 넘어가는 곳이 13장이지만 13장은 이제 드디어 복음 선교가 유대인 중심에서 이방인 중심으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은 바로 시리아의 중심도시인 안디옥 입니다. 우리가 안디옥을 이미 한 번 살펴본 적이 있죠. 1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 전에 11장에서 안디옥 교회가 소개되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안디옥 교회는 신생교회였습니다. 스데반의 일 때문에 흩어져 가던 성도들 중 몇 사람이 안디옥으로 가서 세워진 교회였죠.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은 처음부터 복음에 호의적이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이 힘을 합쳐서 교회를 돌보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 교회가 놀라운 것은 이제 생긴지 얼마되지 않은 교회가 자신들도 쉽지 않은데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였고 자신들도 넉넉치 못한 상태였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13장은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을 때, 그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로 갔던 바나바와 바울이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때부터 이방인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로 부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일을 시작하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에서도 나타나듯이 안디옥의 성도들은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성도들의 필요를 헤아리고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전에 그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줄 만큼 다른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스러운 일을 그 교회에서 시작하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로 세워져야 할까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아주 큰 교회가 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저 선교사 한 분 전적으로 충분히 지원해 드릴 수 있을만큼, 딱 그만큼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도 욕심이라고 한다면 욕심이겠지만 저는 이 정도 욕심은 하나님께서도 애교로 봐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공식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슴 속에 이 꿈을 품으시고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딱 이 정도까지만 성장하려고 하더라도 지금보다 우리 교회에 성도들이 훨씬 더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필요로 하고 또 우리 교회가 필요한 성도들과 가정들을 우리 교회에 붙여 주셔야 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보고 계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10년 동안만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말씀드린 꿈도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우리 편에서도 꼭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 바깥을 향해서 활짝 열린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의 특징은 거의 모든 성도들이 굉장히 오랫동안 함께 신앙생활을 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는 갈등이나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잘 넘기면서 잘 지내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교회의 참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절대로 그렇게 편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어떻게 하면 ‘우리’라고 부르는 그 공동체 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더 큰 ‘우리’가 되게 할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그 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열린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과 태도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가 광현교회라는 이름으로 신앙생활하는 모습이 우리에게만 편안하면 안됩니다. 누가 와서 보더라도 ‘이 교회 성도들은 참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 내가 저 안에 섞여 들어가도 전혀 문제가 없겠구나. 나도 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가 되도록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민하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붙여 주실 때, 그 분들이 우리들 때문에 마음 상하고 힘들어 하지 않고 편안하고 기쁘게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 이야기를 들어보면 새로 담임목사가 부임하면 심지어는 그 목사에게도 텃세를 부린다고 하는데, 우리 교회에는 그런 텃세가 없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는 여러분을 정말 많이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참 안타까운 것은 때때로 여러분 안에서 서로를 거칠고 조심성 없이 대하는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는 그러면서도 또 잘 지내니까 괜찮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고 상처가 되는 모습입니다. 저도 처음에 와서는 그런 모습 때문에 굉장히 당황스럽고 화가 났으니까요. 아마 새로 우리 식구가 된 성도가 그 모습을 보게 된다면 우리 교회의 식구로 남는 일에 대해서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시지요? 그래서 우리 교회가 아름답고 풍성한 교회로 세워지기를 바라고 계시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말씀드린 소망처럼 이웃들과 선교사님들을 넉넉하게 도와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속에 있는 거친 모습들을 잘 살피시고 그런 것들을 꼭 처리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거칠게 대하고 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그 사람을 내 생각에 끼워 맞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나 행동이 나와 다른 사람을 나와 다른 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틀렸다고, 그러니까 내가 내 방식대로 고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직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서 주장하는 것들 중에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들이 대부분 입니다. 장목사를 따르든 김집사를 따르든 전혀 상관 없는 그런 것들이 더 많습니다.  소금을 넣든 간장을 넣든 상관이 없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자꾸 거칠게 대하게 되는 것은 나의 편함과 입장을 중심으로 생각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내가 조금 불편하고 내가 조금 손해 보는 것이 그렇게 싫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 덕분에 다시 산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 덕분에 지금도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얻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가 예수님과 다르다고, 예수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우리를 내치셨다면, 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이익과 편안함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셨더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단 한 사람도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셨고, 또 당신의 유익과 편안함을 생각하지 않으셔서 지금 구원얻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항상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정말 많이 바뀔 것입니다. 적어도 나 편하고 나 유익하자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런 모습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내 기준을 강요하고 내 유익을 챙기라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내 잣대가 분명해도 그 잣대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법을 연습하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유익을 내려놓는 주님을 닮아가는 연습을 하라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과 다른 곳이 되는 곳입니다. 따라해 보겠습니다. “교회는 나를 없애는 연습을 하는 곳이다.” “교회는 나를 없애는 연습을 하는 곳이다.” 그래야 교회는 교회다운 곳이 됩니다. 그래야 교회는 제대로 주님의 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됩니다. 여러분 덕분에 우리 교회가 꼭 이런 곳으로 세워져 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3장 1절은 안디옥 교회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그 교회를 섬겼던 네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나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누가 선생의 역할을 했고 누가 선지자의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13장 1절은 이 네 사람이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과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안디옥 교회를 가르치고 인도했던 네 지도자의 구성이 굉장히 독득하고 서로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바나바입니다. 아시다 시피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성품이나 역할이나 사역을 위한 은사까지도 정말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첫번째 자리에 왔습니다. 이것은 그가 안디옥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정말 그럴 자격이 충분한 인물입니다. 그 다음에는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입니다. 니게르라는 말은 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시므온을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의 두번째 지도자는 흑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젖동생은 왕궁에서 다음에 왕이 될 왕자와 함께 양육되는 어린아이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마나엔은 아주 어릴 때부터 헤롯과 함께 자라난 헤롯과는 죽마고우인 그런 사람입니다. 게다가 이 젖동생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좋은 집안 중에서 왕자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골라서 왕자의 친구가 되게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마나엔은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이 마나엔이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헤롯은 세례 요한을 목 베어 죽인 장본인인 반면에 그와 형제 이상의 사이였던 마나엔은 예수님을 믿고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증명해 보이기도 남습니다. 복음은 그 좋은 집안과 왕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그 엄청난 특권 조차도 의미 없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복음은 그 복음을 진짜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그것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게 만드니까요. 마지막 네번째 지도자는 바로 우리가 바울이라고 부르는 사울입니다. 이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일의 선두에 섰던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여전히 완전히 믿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듯한 그런 인물이죠. 그래서 그런지 아직은 안디옥의 지도자 네 명 중에서 네번째에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참 놀라운 점은 이렇게 이질적인 네 사람이 한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럴 뿐만 아니라 이 네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를 함께 섬기는 교사와 선지자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 안디옥이라는 도시가 국제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런 네 사람이 한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은 그 것만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미국같은 나라만 보아도 대개의 교회는 인종과 계층별로 교회를 이루고 있으니까요. 우선 이 네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 주고 서로를 향해서 마음을 열지 않으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인종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또 신뢰할 수 있는 정도도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네 사람이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 네 사람 모두를 자신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람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 네 사람 모두가 함께 교회를 섬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사도행전 1장 4절을 보면 “사도와 함께 모이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뜻만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과 함께 모여 있었는데…’라는 뜻이 되지요. 그런데, 이 평범한 구절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함께 모이사’라는 말은 우리 말로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옮기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모이게 하셔서 사도들이 모이게 되었고 거기 예수님도 함께 계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무엇보다도 교회는 개개인이 마음대로 모여서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우선 예수님이 모아 놓으셨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모임의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예수님의 부르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그 모임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광현교회에 속해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그렇게 모이게 하셔서 모인 우리들, 그리고 그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모으셨으니 우리가 함부로 저 사람은 맞다, 저 사람은 아니다 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로 주님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의 과거도 생김새도 출신도 조건이나 성품도, 그 어느 것도 묻지 않고 우리를 받아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를 그렇게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과 지도자들이 그렇게 서로 다른 서로 서로를,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절대로 섞여서 지내야 할 이유도 없었을 서로를 받아주고 인정하고 또 자신들을 지도하는 교회의 지도자로 세웠고, 또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교회가 되었는지를 알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꼭 그래야 합니다. 그저 육신의 눈으로 나를 보고 서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단 교회 안에 들어왔으면 자신과 상대방을 전혀 다른 눈과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모이게 하셔서 모여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 안에 우리를 묻지 않고 받아들여 주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거기에 맞게 서로를 대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다운 것이고 또 교회다운 것이며,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일이니까요.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 그것은 서로를 향해 활짝 열린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이 그러셨듯이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며 거칠고 무례하게 대하지 않는 그 일부터 시작됩니다. 항상 우리가 어떤 은혜로 여기에 있는지, 광현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는지를 잊지 마시고 항상 그 은혜에 합당하게 서로를 받아줌으로써 우리 교회도 안디옥 교회와 같은 아름답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교회로 세워져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