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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절기

2014.12.25. 성탄절 -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2014년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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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빌립보서 2장 5-8절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아주 오래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모든 기적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날입니다. 그 날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날인데, 그것도 여인의 몸을 빌어 갓난 아기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다른 모든 기적들은 작은 것이 더 커지고, 평범한 것이 더 빛나고 영광스러운 것이 되고, 또 더 웅장한 것이 되는 기적이고 그래서 우리의 눈동자를 커지게 하지만, 그 날 일어난 기적은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그 안의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분,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으신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 작은 아기가 되어 이 세상의 한 구석,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마굿간 구유 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 날 거기서 그렇게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전혀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이전처럼 그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작고 연약한 인간 아기로,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그렇게 사시고 죽으시고 또 부활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영영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고 결국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한 아기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첫번 성탄절은 어느 날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찾아온 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날을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해 오시고 또 알려 오셨습니다. 처음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그 때부터 하와에게 이 날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 아들을 세상의 구세주로 주시겠다고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아기가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그 날의 그 순간은  그 모든 말씀과 약속이 이루어진 가장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이 세상에는 그 어떤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보이지 않던 큰 별이 빛을 내고 있기는 했지만 거기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유대 땅은 그 어떤 때보다도 어수선하기만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모든 식민지의 인구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모든 유대인들이 그 일로 자기 고향으로 여행을 하는 통에 나라 전체가 그야 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예수님도 요셉의 고향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 구유를 사람의 몸을 입고 처음 만나는 세상의 첫번째 휴식처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온 세상의 구주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시는 날이 왜 그렇게 평범한 날이어야 했고 심지어는 어수선한 날이어야 했을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부자집이나 왕의 아들로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또 온 세상이 알 수 있게 떠들썩하게 당신의 오심을 알리면서 오시지 않으셨을까요? 성부 하나님은 어떻게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그 영광스러운 날, 그저 밤 하늘에 빛나는 별 하나만 더 빛나게 하셨을까요? 그래도 온 세상의 구세주이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날인데 말입니다. 


유명한 사람, 힘 있는 사람 하나만 나타나도 법석을 떨어야 하는 우리들의 생각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해답은 그렇게 이 세상에 오시고 사시고 죽으신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마음이 그 분을 그렇게 이 세상에 오시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빌립보서는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책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이 빌립보서가 그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이제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결을 눈 앞에 놓고서 기록한 편지이지만 바울이 기록한 그 어떤 편지보다도 차분하고 기운차며 기쁨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가 그런 편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편지를 쓰는 바울의 마음이 그렇게 평안하고 힘이 넘쳤고 또 기쁨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바울의 그런 상황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며 두려워 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바울이 그런 처지가 되었으니 그들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고, 믿음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불안한 마음에 서로 이리저리 부대끼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바울이 그들을 위해 내린 최고의 처방전이었습니다. 


그 처방은 바로 예수님을 본 받는 것이었는데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 주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예수님의 모든 선택과 행동 또한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그저 예수님의 행동을 흉내내거나 본받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것이고 그 마음을 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고 또 뒤쳐질 것이 없는 본질까지 완전히 일치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대접받으실 자격과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당신께서 가지고 누려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오히려 그래야 마땅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주님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성자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가질 수 있는 것 다 가지지 않고, 취할 수 있는 것 다 취하지 않고, 주장할 수 있는 것 다 주장하지 않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는 것,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것, 그것이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기쁘게 자기를 비워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왕이시고 주인이셨지만, 그리고 그렇게 계시는 것이 그 분의 당연한 권리였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비움은 단순히 조금 내려놓고 조금 포기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비움을 통해 성자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한 아기가 되셨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되셨으며, 마굿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내어놓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종이 되셨고 결국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위해서 그 목숨까지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기쁨이고 영광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겸손하신 본성이 기뻐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낮아지심이나 겸손을 생각할 때, 흔히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시고 또 비우셨을 때, 그렇게 이 세상에 작은 아기로 오시고 또 가난한 삶을 사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내리기 힘든 결정을 내리신 것이고 그래서 우울하시고 고통스러우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을 그린 예술작품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데요. 그래서 예수님을 그린 그림 중에서 웃고 계신 그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 분을 우리들과 비슷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대접해 주지 않으면 불쾌해 하시고, 스스로를 낮추고 비우는 일을 가장 힘들어 하고 불편해 하시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비우심 그리고 순종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전혀 부족함이 없는, 모자라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를 낮추기에 주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본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즐거워 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낮아짐과 비워짐이라도 기쁘게 감당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사형선고가 내려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빌립보서라는 기쁨과 힘이 넘치는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바울은 이미 나이가 많아서 노년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요. 그만큼 그의 믿음도 성숙했을 때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감옥에 있지만 기뻐할 수 있었고, 가장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흔들리고 불안해 하며, 두려워 하는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해서도 그 마음을 품으라고, 그것이 답이라고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었습니다. 낮은 자리가 더 편하고 얼마든지 자기를 비워낼 수 있고 그래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 그래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마음. 그것이 바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알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 가장 낮은 사람으로, 가장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가장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마굿간의 구유를 요람삼아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자리를 편안해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저 밤 하늘을 밝히는 별 하나로 예수님의 오심을 조촐하게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가장 어울리는 방법이었느니까요. 


예수님의 마음이 겸손이셨다는 것, 그 분께 겸손함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이었다는 것은 오늘 함께 모여 우리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기뻐하는 우리들에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마음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 옛날 마굿간의 구유가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모셨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겸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 날 밤 예수님이 누워계셨던 그 구유를 닮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그 분이 편안해 하실 수 있으니까요. 


저를 참 안타깝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얼굴에서 평안과 기쁨, 그리고 안식의 표시가 보여야 하는 성도들의 얼굴에서조차 그런 은혜의 흔적들을 많이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웃고 있고 즐거워 하는 성도들의 표정 속에도 여전히 허무함과 건조함, 그리고 참된 안식을 모르는 피곤함의 그림자가 드러워져 있습니다. 단지 삶이 힘들고 피곤해서 그렇다면 그래도 괜찮을텐데. 전혀 그렇지 않은 성도들의 얼굴에도 똑같은 어두움이 있고 그림자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예수님을 여기 이 마음 속에 모시고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이 우리의 진짜 복이 되려면, 그 분을 믿는 것이 우리의 평강과 기쁨, 그리고 안식의 이유가 되려면 그 예수님이 여기 우리 마음 속에 계신 것이 우리에게 편안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여기 우리의 마음 속에 계신 것을 편안해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편안해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왕궁 안의 황금 요람이 아니라 말 구유를 첫번 요람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 세상에서의 첫날 밤을 평안하게 지내셨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낮은 자리로 오신 이 날,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로 구해야 할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는 은혜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구주의 거처가 되는 우리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뭔가 이유 없이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하고 만족을 모르고 자꾸 다른 사람들을 향한 정죄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면, 그런 것들이 우리 마음의 기쁨과 안식을 방해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 마음 어딘가는 너무 많이 높아져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우리가 그 곳을 낮추어 주님의 우리 안에서 편안하게 거하실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놀라운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온 세상 가장 높은 분이셨지만 지극히 겸손하셔서 인간이 되시고 종이 되시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에 대한 나머지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줍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영광은, 그리고 그 분의 높아지심은 바로 그 분의 낮은 마음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하나님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던 마음,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종이 되시는 일을 편안해 하셨던 마음,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는 것을 즐거워 하셨던 마음. 구유라도 편안한 쉼터로 삼으실 수 있었던 그 마음이 예수님을 가장 높고 영광스러운 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 영광은 높은 마음에 깃들지 않습니다. 참 기쁨과 참 안식은 높은 마음에서 편히 쉴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높아진 마음 속에는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편하게 거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으로 모든 높아진 것들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낮은 마음의 영광과 낮은 마음의 행복을 맛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땅에 한 사람의 마음 속이나 사람들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참된 평안이 없는 것은 모두가 다 높아진 마음으로 살면서, 그 높아진 마음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쉴 수 없는 마음으로 쉼을 찾으려 하고 만족을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그 마음 닮기를 소원하는 우리에게 낮은 곳을 편안해 할 줄 아는 거룩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마굿간의 구유가 가진 그 영광스러운 누추함을 배우게 하셔서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참 복을 누리게 해 주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