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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5.01.11.주일오전 - 예배하는 자는2(2015년 신년2)



20150111SM.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4장 13-24절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성도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우선 하나님 앞에서 좋은 예배자,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좋은 예배자,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이지만,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될 때,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얻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저 이렇게 한 시간 혹은 몇 시간 형식에 맞춰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예배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거룩한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공급받지 않으면 우리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와 예배자로서 사는 일을 제대로 해 낼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지만 성도가 살아가는 모습은 그가 예배드리는 모습과 굉장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열정적이고 기쁘게 예배드릴 때는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정말 기쁘고 기운차게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같은 사람인데도, 그렇지 않을 때는 예전만큼 힘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고 더 자주 짜증을 내고, 다시 예전의 걱정과 두려움으로 되돌아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집중적이고 풍성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공급받지 못하니 영혼이 시들고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예배를 드리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문제는 이렇게 비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일상생활의 모습을 결정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권면합니다. 올해는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꼭 예배자로 바로 서겠다는 뜻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것을 여러분의 우선순위로 삼고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서 예배가 회복되어져 가고 여러분이 참된 예배자로 세워져 감에 따라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여러분의 일생생활과 영혼에 깜짝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올 한 해는 예배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삶과 영혼이 놀라운 변화들이 풍성하게 일어나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왜 우리가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되짚어 본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자를 찾으시기 때문이고, 그런 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예배자가 되었을 때에만 예배의 참된 영광과 은혜를 맛보고 또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주제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참 예배자가 될 수 있는가? 참된 예배자란 어떤 예배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를 알고 거기 도착하면 얻게 될 즐거움에 대한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거기로 가는 길을 모른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어떤 장소에서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소개를 받은 사람이고 여러분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경우에 대개 어떻게 약속을 정하지요? 요즘이야 휴대폰이 있으니 서로 전화통화를 하면 그만이지만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기가 참 쉽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경우에는 이렇게 만나셨을 겁니다. ‘내가 몇 날 몇시에 어디로 하얀색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서 머리에는 빨간색 모자를 쓰고 나갈테니까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게 난 줄 알아라’라고 서로 약속을 정합니다. 그리고, 그 날 시간을 맞춰서 그런 차림새로 나가서 누가 나를 찾나 두리번 거리다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혹시~”라고 말을 건네서 그 사람을 만나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내가 그 날 당일이 되어서 그 사람을 만나러 나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 갑자기 기억이 헤깔리기 시작합니다. 머리에는 모자를 쓴다고 했는지 아닌지 또 티셔츠는 흰색인지 아니면 검은색인지 말이죠. 불행하게도 나의 기억이 나에게 ‘그냥 맨머리와 검은 티셔츠야’라고 알려 준다면 나는 허겁지겁 그 차림새로 약속장소로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나를 찾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그 약속장소가 공고롭게도 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복잡한 장소라면 말이죠. 아마 나와 만나기로 한 그 사람은 멀리서 머리에 빨간 모자를 쓰고 흰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있나 두리번 거리다가 그냥 돌아가 버리고 말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나를 알아볼 수 있는 표시를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면 그 사람에게 나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 날 내가 그 사람에게 없으면 안되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받기로 했는데, 내가 그런 실수를 한다면 그것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찾고 계십니다. 분위기로 보아서 아주 열심히 찾고 계신 것 같은데요. 애석하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찾으려는 사람들을 쉽게 찾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무의식적으로 예배는 그저 드리기만 하면, 예배의 자리에 참석하기만 하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예배는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받으시는 것으로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그저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한 부류의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이런 이야기가 되겠지요. 한 예배당 안에서 100명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정작 하나님 보시기에 그 중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몇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 사람도 없을 수도 있구요. 또 반대로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이 예배드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특별한 예배자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예배실 안의 사정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예배자를 찾고 계실까요? 그 때 유대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 수성구, 시지동, 지금 이 순간 광현교회 예배당 안에서 어떤 예배자를 찾고 계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예배드리고 있는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예배자, 그리고 그냥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예배자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첫째, 다른 대상이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 둘째, 아버지께 예배드리되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만 한다는 것. 이렇게 두 가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고, 그래서 예배의 참된 영광과 은혜를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첫번째 조건, 그러니까 우리가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신을 믿는 종교들이 굉장히 많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만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하고 너무나 은혜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한 분 밖에 없는 ‘신’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 신을 나의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자기 아버지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너무 불행한 경우,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할 때 그 말이 자신을 몸을 낳아준 그 아버지의 이미지와 겹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을 굉장히 꺼리거나 두려워 합니다. 저는 실제로 그런 분들을 몇 번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오해죠. 너무 큰 오해이고 안타까운 오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지만 그 아버지는 불완전한 아버지, 실수투성이 아버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아버지, 때로는 자녀들에 대해 무책임하고 무자비하기까지한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가장 능력있고 가장 부유하며 가장 정직하시고 실수가 전혀 없으신, 자녀들을 영원히 책임지시고 무한히 사랑하시는 그런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그 곳이 그저 멀리 떨어져 있기만 하고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으며, 두렵기만 한 그런 ‘어떤 신’ 앞이 아니라 그렇게 완전하신 ‘나의 아버지’ 앞이라는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 아버지를 만나서 그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고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예배의 자리로 오는 자녀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로 나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며, 끝까지 책임지시고 사랑하시는 완전하신 나의 아버지로 알고 있느냐 하는 것과 그래서 그런 아버지께서 예배를 통해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러 나오고 또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께서 나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부어주시고 하늘 양식으로 풍성한 식탁을 차려 주셔서 나를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 나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고서, 하나님께 내가 그렇게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예배의 자리로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책에서 성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한 설명을 읽다가 그 당시의 저로서는 정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기 전에는 예배란 그저 내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높여드리는 그런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그저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중요한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신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고, 또 모든 것을 드리고… 그런데, 그 책에서는 예배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식탁에서 우리를 섬겨 주시려고, 우리 영혼을 은혜로 먹이시려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책은 심지어 하나님을 친히 식탁을 차려 놓고 앞치마를 두르시고 자녀들의 식사를 위해 섬기는 아버지, 자녀들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지켜 보시며 빙긋이 웃으시는 아버지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적잖은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반대로 내가 그 동안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가 왜 그렇게 풍성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기쁨을 채워주시려고, 나를 배불리 먹여 주시려고 나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데, 정작 나는 그런 것을 받으려는 기대도 없이 자꾸 하나님께 드리는 일만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도 사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그렇게 하려고 끙끙대고 있었으니 예배에서 얻는 만족이 그렇게 형편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참 신앙은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배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주셔서 우리 영혼을 만족하게 해 주시는 일이 가장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한 분이면 족하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경험하게 되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실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고차원적인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믿으면서 그 아버지를 만나러 오고 그 아버지께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 필요를 완전하게 채워주실 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기대와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면 우리를 채워주시고 만족시켜 주시기 위해서, 마치 월급날 용돈 주려고 하나 하나 아이들을 부르는 아빠의 마음으로 여러분을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우리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랑하면서 사는 부부가 누구죠? 저희 부부 말고 어떤 부부가 그렇게 살죠? 자신있는 부부 손 한 번 들어볼까요? 그러면 한 번 물어볼까요? 집사님 부부는 왜 서로 사랑하죠? 사랑하는 일이 가치 있어서?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고상하고 아름다워서? 우리 부부는 원래 사랑이 너무 많아서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시나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필요를 잘 헤아려주고 그것을 잘 챙겨주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무언가 배우자가 자신에게 만족을 주고 있으니까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면서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닌가요? 아니라면 왜 우리 사랑이 변하나요? 왜 조금 잘못하면 밥도 안 차려주고, 조금 속 썩이면 말도 안하고 그러나요? 다 상대방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만족도가 떨어지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참 이상하죠? 하나님이 우리를 만족을 주는 대상을 사랑하고 그 대상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그렇게 이기적으로 만드셨다니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자기를 만족시키는 대상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대상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 많은 만족을 주는 대상일수록 더 사랑하고 그를 위해 더 헌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대충 아무거나 가지고 진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별것 아닌 상태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은 영원한 것, 완전한 것이 아니면 진짜로 만족할 수 없는 그런 피조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정말 고상한 존재로 지음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 중에서는 완전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고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고, 또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인생의 답이고 또 하나님만이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켜 주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처음에 인간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 사랑하며 정말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범한 후에 이게 완전히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들어가셔야 할 자리에 자기 자신을 가져다 놓고 아니면 자기가 보기에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가져다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은 참된 만족을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배란 이런 인간이 하나님께 다시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다시 하나님만이 나를 만족시키실 수 있고, 그래서 나는 나를 채워주실 것을 믿고 기대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오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은혜로운 일이 가장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시간이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해 주실 수 있는지 맛보는 시간, 그래서 더욱 더 하나님을 기대하게 만들고, 또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시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에 억지로, 형식적으로, 아무 기대없이 그렇게 나오는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상태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이 우리를 진짜로 만족시킬 수 있는 분으로 알고, 또 그렇게 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 실제로 우리를 만족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하나님께로 올 수 있을까요?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마음놓고 믿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다른 관계에 있는 분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나를 너무 너무 사랑하시고 언제든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하시는 나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우리 집 첫째와 관련된 아주 아픈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울컥할 때가 있는데요. 저희 집 아이가 세 살 때쯤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 때만해도 지금보다도 훨씬 더 못되먹은 아빠였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제가 제 방에서 뭘 고치겠다고 납땜질을 하다가 하던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저희 집 첫째에게 “너 이거 건드리면 안돼.”라고 주의를 주고는 화장실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다녀와 보니 그대로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하던 일을 마치고 정리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제가 저는 저희 집 첫째 다리 정강이에서 갈색으로 부푼 화상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그랬느냐고. 처음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부드럽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나간 사이에 납땜기를 만져 보려고 하다가 다리에 닿아서 화상을 입었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못되먹은 아빠였기에 그 어린 아이가 아빠한테 혼이 날까봐 그렇게 심하게 데었는데도 울지도 않고,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그렇게 꾹 참고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때 제 아이에게 그런 못되먹은 아빠로 인식되지 않았다면, 아이는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먼저 저에게 달려 와서 울면서 어리광을 부렸을 것입니다.  저도 아이를 잘 보듬어 주었을 것이고요. 그러면 오히려 그 상처는 저와 저희 첫째를 더 깊은 사랑으로 묶는 끈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는 내가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또 믿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생각과 신뢰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또 신뢰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두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또 신뢰하며 예배드리고 있고, 또 그래서 하나님께 어떤 기대를 품고서 예배드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예배를 통해서 어떤 은혜와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아무 예배자나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또 그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예배를 기뻐하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믿으며 또 기대하며 예배하는 예배자를 찾고 계시고 그런 예배자의 예배자를 진정으로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예배자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알고 있고 인정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기대하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런 예배자들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그런 예배자에게만 허락되는 아버지의 선물, 우리를 만족하게 하며 기쁨으로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그 은혜를 주시려고 자기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당신의 자녀들을 찾으십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영적인 목표는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가 되어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믿고 기대하는 그 분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 관계를 온전히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자리로 나올 때마다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쁘게 뛰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나를 가득 채워주실 아버지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올해는 꼭 아버지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아버지에게서 참 만족을 찾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아버지를 기대하는 어린 아이같은 성도들이 될 때, 우리의 예배는 참 예배가 될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참 예배가 될 것이며, 우리의 주린 배를 가득 채우는 아버지의 식탁이 될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한 번 한 번의 예배가 더 드려질 때마다 그 안에서 아버지가 주시는 참 만족을 더 많이 맛보게 되는 복된 자녀들, 복된 예배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내가 올 한 해는 참 예배자로 하나님에 서는 회복이 있게 하소서.
  2. 내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나를 만족하게 하시는 아버지이심을 기대하며 예배하게 하소서. 그래서 예배를 통해 충만한 만족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