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도행전 16장 16-25절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빌립보에 살던 여인 하나가 바울과 디모데의 일행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그들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인은 귀신이 들려서 미래를 알려주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여인을 돌봐주는 사람들은 이 여인의 이런 능력 덕분에 꽤 많은 금전적인 이익을 얻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보면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 보아도 귀신들린 사람들은 어디서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이번에도 이 귀신들린 여인은 바울 일행에 대해서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마다 이들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방해했습니다. 바울과 일행이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들이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방해를 하고, 기도를 하려고 해도 또 어느 사이에 쫓아와서 기도도 하지 못하게 하곤 했습니다. 얼핏 보면 여인이 바울일행에 대해서 말한 것 중에서 틀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더 수월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이야기는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역할을 했습니다.
우선 여인은 바울일행을 일컬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조금 잘못되어 있는 듯합니다. 여인은 헬라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헬라어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따로 없습니다. 그저 신이라는 뜻의 deus라는 말만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빌립보라는 도시는 유대인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이 말은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헬라인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 여인의 외친 “지극히 높은 신의 종”이라는 말이 그 곳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빌립보 사람들에게 지극히 높은 신은 어떤 신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신은 제우스입니다. 그러니, ‘지극히 높은 신의 종’이라고만 말하면 바울 일행은 하나님이 아니라 제우스가 보낸 종이 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원의 길’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 구원이라는 말은 기독교만 사용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종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구원이라는 말은 이방종교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지, 죄 용서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든지 하는 일들이 아니라 병고침을 받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부자가 되고... 이런 일들을 일 모두가 다 구원이라는 말로 불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길’이라는 말 또한 사람들의 소원을 성취해 주고 또 욕심을 채워주는 일 정도로 밖에 이해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이 귀신에 들려서 신통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그 도시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진짜 복음이 들려지기도 전에 바울 일행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심각하게 오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는 심각한 선입견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제우스로, 그리고 구원은 소원성취로 들려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여인의 말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전혀 틀린 부분이 없지만, 그 말이 빌립보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심각한 오해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못한 바울은 그 여인, 정확하게는 그 여인을 사로 잡고 있는 악령을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악령은 일부러 여호와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피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악령에게 참 주님의 이름을 선포합니다. 악령이 ‘지극히 높은 신’이라고 애매하게 말하고 있는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선포하며 그 이름의 능력을 힘입어 그 악령을 향해 그 여인에게서 나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악한 영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주님의 이름을 듣자 맥을 추지 못 하고 그 여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인도 악한 영으로부터 자유를 얻었고 바울 일행도 괴롭힘을 면할 수 있었지만,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사탄이 그 여인을 통해서 상당한 금전적인 이익을 얻고 있었던 사람들을 사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이 이 여인의 ‘주인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사라지자 무단으로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을 붙잡아서 관리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향해지도 못할 풍속을 전합니다.” 그랬더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일어나서 동조했습니다. 그 여인의 주인들이 한 말이 얼마나 교묘한지 모릅니다. 먼저 이들은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을 유대인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유대는 당시 로마의 식민지이고 게다가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유대 땅도 아니니 두 사람이 유대인이라는 것은 임의대로 처리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의도적으로 로마라는 말을 등장시켜서 은근히 그런 유대인 나부랭이들이 로마의 고귀한 전통과 권위에 도전한다는 느낌을 풍기면서 로마의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로마의 관리들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으니 빌립보 사람들과 직접적인 이익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관리들은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작 두 사람에게는 전혀 자초지종을 물어보지도 않고서 말입니다. 관리는 두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팬 후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단단히 지키라고 당부합니다. 간수는 그 명령에 따라서 두 사람을 옥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가두고 두 사람의 발에 차꼬를 채워 버렸습니다.
지난 번 금요일에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들을 몇가지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실 때, 아주 특별하고 영광스럽게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항상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평범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지 조차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지루한 시간, 무의미한 시간이 계속 이어질 수도 있고, 사람들의 상식과는 전혀 반대되는 방향으로 그 길이 이어져 갈 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대해서 장미빛 꿈을 갖게 부추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전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또 우리의 삶의 경험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빌립보로 건너왔고 거기서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다가 겨우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후견인을 만났고, 그 날은 그저 기도하러 나가다가 귀신들린 여인 하나를 고쳐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함을 받고 갑자기 매를 맞고 갑자기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부재중이실 때, 바울 일행에 대한 인도하심을 멈추셨을 때, 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길을 인도하실 때, 그리고 두 사람이 그 길 위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을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주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을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감성적으로는 굉장히 예민하고 풍성한데 정작 그 능력은 별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뜨거운 감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 사실에 굉장히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물론 신앙에는 반드시 이런 감정들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이 매마르지 않고 풍성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은 이런 것만 있다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은 우리를 꼭 필요할 때 진짜 힘이 되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성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에 대해서 더 큰 아픔과 오해를 품게 되는 것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시련과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그저 자신에게 닥친 불행한 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려고 하거나 때로는 그저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쉽게 넘겨 버립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는데 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섭리해 가시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는 질문을 풀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 특별한 일이 일어날 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나에게 허락하셨을까? 하고 자동적으로 묻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하심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이런 질문들이 우리에게 더 깊고 큰 고통과 때로는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선입견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비현실적이고 성경적이지 않은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좋아하시겠지만 저도 아주 좋아하는 시편, 그리고 어찌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시편이 있습니다.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떠오르는 시편인데요. 부족함 없음,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같은 말들이 정말 우리를 은혜롭고 든든하게 만드는 시편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로운 시편 중간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하나님은 다윗을 인도하지 않고 계셨습니까? 분명히 다윗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섭리를 믿으며 주님의 뒤를 따를 때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성경적인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이 이렇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에 과연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아무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가게 되어 있다면 말이지요. 차라리 세상의 방법으로 요리 조리 그런 길을 피해가며 사는 것이 더 지혜롭지 않을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다윗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일이 주는 진짜 유익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살며,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상황 속에서 받게 될 해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고 손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진짜 유익이고 또 능력입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바다를 건너 빌립보까지 왔는데, 힘들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악한 영에 시달리는 여인을 구해주었는데, 예수 이름으로 악한 영을 내쫓는 능력까지 행했는데 돌아온 것은 심한 매질이며, 억울한 모함이며, 깊은 옥에 갇히는 일이라면 보통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하나님을 원망하겠지요. 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심하게 삐쳐 있겠지요. 감옥 속에서 억울하다고 소리 소리 지르겠지요. 그러나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은 전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25절로 가셔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것이 그런 억울하고 몹쓸 짓을 당한 사람들의 반응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상상하기 힘든 반응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두 사람이 지금까지 당한 모든 일들이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두 사람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평안함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믿는 믿음과 그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일의 참된 능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우리를 고난에서 건져주기도 하고 또한 우리에게 우리가 바라는 모양의 형통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일부분에 불과하고 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은혜도 아닙니다. 사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우선 우리를 담대하고 여유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중에 경험되는 것들이고, 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짜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적어도 우리가 바른 길을 가다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당하게 되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줍니다. 억울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 상황을 넉넉히 이기게 하며, 그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른 길을 가도, 또 하나님께 순종해도 우리의 삶에는 어려움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손해와 고통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르지 않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과 상관 없이 돌아가며 때로는 하나님을 대놓고 대적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 그리고 참으로 그 인도와 섭리의 선하심을 믿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안과 기쁨을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처럼, 그리고 바울과 실라처럼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올바르고 현실적인 성경의 가르침이고 그 인도하심을 믿고서 거기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이런 은혜가 얼마나 보배로운 것인지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비현실적이고 성경적이지 않은 가르침들, 달콤하기는 하지만 전혀 능력이 되어주지 못하는 가르침들에 마음을 빼앗겨서 진짜 가치있고 능력있는 은혜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 가운데, 그 인도를 따라가며 당하는 어려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은 가장 영광스럽고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걸어 가는 사람들에게 그 마음과 생각을 흔들림 없이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 받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하는 담대함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능력있는 은혜를 구하며, 이 은혜를 붙들고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이 세상의 가장 복된 성도들, 감옥같은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양하는 그런 강하고 담대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